성노동 프로젝트/2021 성노동 프로젝트 제 5회 우리가 그리는 미래

[2021 성노동 프로젝트 제 5회] 다영~♡ : 참을 만한 존재의 가벼움

성노동자해방행동 주홍빛연대 차차 2021. 10. 7. 15:45

 

참을 만한 존재의 가벼움

다영~♡

 

 

예전에 선배들은 나에게 ‘무엇이 될 것인가’보다는 ‘어떻게 살 것인가’가 중요하다고 이야기했다.

물론 삶의 의미와 가치를 묻는 ‘어떻게’에 대한 문제는 중요하고, 지금도 계속 세상사 속에서 나에게 던져지는 질문 중 하나이다. 하지만 그 ‘어떻게’가 뿌리내려야 하는 ‘무엇’에 대한 문제가 의문문으로 남아 있다면, 즉 내가 정상성 범주에 삶이 놓여 있지 않기 때문에 던져지는 ‘나는 무엇인가에 대해 질문’이 해결되지 않는다면 삶의 가치와 의미는 내 존재 표면에서 계속 미끄러져 내려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서인가 많은 트랜스젠더들은 자기가 원하는 그 ‘무엇’ 자체가 삶에 가치가 되는 경우가 있다.

이 사회에서 소수자로 인생을 사는 사람들은 이 문제에 끊임없이 부딪히고 답을 찾기를 원한다. 소수자는 ‘보편’ 내지는 ‘동일성’ 권력에 의해 끊임없이 대상화되고 또한 주변화됨으로써 남들과는 다른 나에 대해 계속 고민하게 된다. 그 고민은 나는 무엇인가에 대한 문제를 마주하는 과정 속에서 자신을 인정하지 못하거나 그 ‘무엇’에 대해 집착하는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나는 ‘무엇’ 즉 정체성과 관련해서 현상적인 수준에서 내 일상을 통해서 드러내고자 한다.*1 다만 나는 이 글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과 별반 다르지 않을 수 있는, 하지만 독특할 수 있는(나는 ‘다름’이 아닌 ‘독특한’이라는 표현을 좋아한다) 상황들을 그려내면서 우리 삶의 ‘독특한 평범성’을 그려내고 싶다. 그래서 이 글은 나에게는 무겁지만 듣는 사람들에게는 가벼울 수 있는 이야기이다.

1. 여성

나와 얘기를 나눈다면 보통은 바로 익숙하지 않은 낯섦을 느낄 수 있다. 일단 목소리부터 바로 낯설다. 사람들이 실제 나를 여성으로 느끼는 것은 나와 말을 섞기 전까지이다. 즉 나의 순수 여성(내가 순수 여성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트젠이라는 인식이 전혀 섞이지 않은 시스 여성을 말하는 것이다)으로서의 경험은 실제 사람들과의 소통을 통해서 경험하기는 힘들다. 나만의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트젠 친화적인 사람이라도 우리를 여성으로서 바라보아주는 거지 여성으로 인식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2

그래서 여성으로서의 나의 경험은 사람들이 트젠이라는 인식을 갖기 전, 길거리에서 마주침의 순간들, 즉 타인의 ‘시선’을 통한 나의 주관적 느낌. 특히 남자들의 시선과 관련된 경험에 한정할 수밖에 없는 것은 아직 많은 부분 미천한(?) 나의 한계이다(물론 워낙 자연스러운 분들의 경우 주변에 사시는 분들도 전혀 트젠임을 인식을 못 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럴 경우는 예외이다).

나는 주로 이태원에 놀러 가기를 좋아한다. 그리고 나의 개인적 취향에 따라 주로 몸매가 드러나는 미니원피스에 힐을 신고 나가는 경우가 많다. 물론 집에서 잠깐 나오는 경우에는 보통은 롱스커트에 운동화로 코디한다. 이렇게 코디할 경우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편하다.

이태원 길거리를 걷거나 남자들이 나를 돌아볼 때 특히 그의 시선에 의해서 내가(나의 감추어진 관종 욕망과 그리고 육체도) 벌겨 벗겨지는 듯한 기분이 들어 얼굴이 빨개져 고개를 들기 힘들지만, 어쨌든 나는 나를 보여주고 싶은 마음에 그들의 시선을 살짝 흘려버리면서 고개를 들고 걷는다. 하지만 잠깐씩 나를 훑어보는 그들의 시선에서 ‘양면적’ 시선을 느낀다. 본능적으로 나를 향해 눈이 돌아간 그 시선 뒤로 미소와 비웃음 사이의 표정. 마치 ‘너는 쉬운 여자야’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 그리고 그런 여성은 나의 성녀는 아니라는 비웃음.

내가 집 근처에서 입는 롱스커트와 이태원에서 입는 미니 원피스 사이에는 ‘시선’이라는 측면에서만 보면 많은 차이를 갖게 된다. 물론 이것이 사회적 시선의 권력이며 내가 무엇을 어떻게 입어야 하는지 알려주는 하나의 권력일 수도 있다는 것은 알고 있다. 다만 나는 그것을 넘나드는 것을 즐길 뿐이다.

2. 트랜스젠더

이태원 부킹바에 도착하면 나는 자리를 잡고 그날 일하는 스텝 언니에게 눈인사를 한다. 주로 나는 남자들이 앉아 있는 맞은편에 자리를 잡는다. 그리고 거리에서는 부담스러웠던 남자들의 시선을 이곳에서는 맘껏 즐긴다. 남자들이 자기들끼리 대화를 하면서 흘끗흘끗 쳐다볼 때 나는 스텝 언니와 얘기를 하는 척하지만 좀 더 어필할 수 있는 나의 이쁜 자세들을 취한다.

거리에서의 시선은 나의 몸에 대해 순결 이데올로기를 작동시키고 있었다면, 지금 이곳에서의 시선은 오직 오늘을 즐기기 위해 자기 몸에 충실한 감각적 눈빛들의 마주침의 순간들이다.

착한 스텝 언니는 남자분에게 나에 대해 얘기를 해준다. 그러고 나서 언니가 나에게 다가오지 않는다면 나가리다. 근데 언니가 나에게 다가와서 합석을 권유한다면 남자는 나의 정체를 알고도 오케이한 것이다.

하지만 보통의 경우 대부분 일반 남녀가 처음 만나서 대화를 하는 것과 다른 광경이 바로 연출된다. 남자들은 꽤 높은 비율로 트젠인 것을 확인하면 너무나 쉽게 양해 없는 스킨십을 진행한다. 남자들이 트젠임을 확인한 이후 왜 이토록 나를 가볍게 대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남자들이 나를 어떻게 여기는지는 알고 있다.

그들에게 트젠은 창녀와 다르지 않다. 사랑과 구애가 아닌 다른 수단으로 쉽게 얻을 수 있다고 생각되는 존재. 

만약 그 자리에서 그 남자가 마음에 들어서 스킨십을 진행하면 떠날 때 하나같이 나에게 ‘고맙다’고 한다. 그리고 그냥 이렇게 해도 되냐고 묻는다. 어떤 남자는 지갑에서 돈을 꺼내주는 경우도 있다. 그에게 나는 섹스의 대상이 되어주는 고마운 상대일 뿐 감정 소모의 대상은 애초에 아니었던 것이다(요새의 남자들은 너무 빠른 것을 좋아한다. 그들은 감정의 날것을 바로 드러낸다. 육체에 대한 강조가 낳은 포스트모던 현상일까? 사랑은 이제 낭만주의의 신화인가?). 남자들에게 있어 나와의 섹스는 사용가치에서 교환가치로 전환되는 회로가 작동하는 듯하다.*3 그래서인지 그들은 섹스 후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고 고맙다고 한다.

물론 처음에는 이런 관계가 현타가 오기도 했지만, 지금은 나 또한 그들을 깃털처럼 가볍게 여긴다. 자고 일어나면 가볍게 날아가 버릴 정도로~

3. 논바이너리 트젠 지향

며칠 전에 친한 트젠 언니가 나에게 성 정체성을 물어봤었다. 그때 나의 대답은 “난 분명 남성은 아닌 것 같아요, 하지만 여자라고 얘기하기에는 뭔가 어색해요. 예전에는 나를 여자라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사회적 여성지향에 N성*4 같아요”라고 얘기했다. 대학 시절부터 여성주의와 나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해왔고, 이 고민의 연장선에서 지금은 사회적으로 규정된 여성성에 대한 이미지와 담론체계에 편입되는 것에 대한 정치적 거부가 생겼기 때문이다.

그래서 누군가 내 삶에서 여성주의가 어떤 의미를 지니냐고 물어본다면, 여성주의는 나에게 여성이라는 ‘정체성’, 즉 ‘무엇’의 문제를 내가 ‘만들어가야 하는’ 여성이라는 문제로 바꾸어 놓았다고 얘기하고 싶다.

4. 결론

여성, 트랜스젠더, 시디, 그리고 또 다른 ‘무엇’

우리를 트랜스젠더로서 또는 시디로서, 아님 여성으로 규정하고 그 꿈을 이룬다 해도 어떤 허무감에 빠져들어 내가 원한 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는 외로움의 연속이 될 수도 있다. 만들어진 정체성이 아닌 구성해나가는 N성을 통해서 우리의 욕구를 정체성에 가치를 두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내 느낌을 미래로 전유해나가는 감성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현재 나를 이루고 있는 상황들을 긍정적으로만 볼 수는 없지만, ‘총체로서는(Ensemble)’ 그 모든 느낌과 감성이 소중하게 생각한다. 내 몸속에서 그 경험들이 하나의 조화를 이루면서 지금의 나를 만들어가는 그 느낌이 너무 소중하기 때문이다. 무엇으로 규정되지 않지만 무엇인가 계속 만들어가고 있는 느낌. 그래서 나는 지금 나에 대한 느낌을 ‘참을만한 존재의 가벼움’으로 얘기할 수 있을 거 같다.


1. 필자는 정체성의 문제는 과학적으로 규정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만들어가는 생활속에서 답을 찾아야 된다고 생각한다. 즉 정체성은 그 시대적 맥락속에서 당사자들이 권리를 획득해가며 다수의 동의를 얻어나가야 하는 정치적 실천의 문제이다.

2. 필자는 여기서 ‘인식’에 대해서 ‘바라봄’과는 다른 용도로 사용하였다. 인식은 대상을 개념과 연결시켜서 종합적 판단을 함이고, ‘바라봄’은 소통상황 안에서 그 분위기에 맞게 상대를 배려하는 시선을 말한다.

3. 필자는 정치경제학적 용법보다는 은유적 표현으로 이 표현을 자주 쓴다. 사용가치는 내가 가지고 있는 본연의 모습, 즉 질적인 것을 표현한다면 교환가치는 나를 대상화시켜서 가치를 매기는 타인들의 행동을 나타낸다. 즉 가치로 표현된 나의 타자.

4. N성을 존재론적으로 다른 어떤 성을 표현하는건 아니고, 남성과 여성 ‘사이에’ 존재하는 성적 특성의 정도의 차이로서 그 사이의 스펙트럼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하자는 의미에서 N성이라고 쓴다. 필자는 이와 논바이너리는 또 다른 의미라고 생각하지만, 맥락은 같다고 생각한다.

5. 현재 남성중심 질서가 만들어 놓은 종속적 여성성이 아니라 능동적이며 여성임을 즐길 수 있는 구성적이며 생산적인 여성성. 필자는 현재 담론을 구성하는 힘과 또한 그 수단을 독점하고 있는 권력들과 계속 투쟁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정치성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한다.

 


 

작가 소개글 : 행복은 멀리있는것이 아니라 내 주변에 사람들과의 관계속에 있다고 믿고 있는 다영이 입니당~ 저는 우리 사회 소수자분들이 행복할 수 있는 세상을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조그마한 일들이라도 하자는 생각을 갖고 이번 성프에 참여했습니다. 우리의 이런 조그마한 정성들이 모여 성노동자분들과 많은 사회적 소수자분들에게 자그마한 기쁨이 될수 있었으면 좋겠네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