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노동 프로젝트/2021 성노동 프로젝트 제 5회 우리가 그리는 미래

[2021 성노동 프로젝트 제 5회] 모르겠는 사람 : 모르겠다

성노동자해방행동 주홍빛연대 차차 2021. 10. 9. 05:11

모르겠다

모르겠는 사람

모르겠다.

 하고 싶은 말이 언제나 많았는데, 어느 순간부터인가 나는 말을 잃어버렸다. 예외에서 태어나 법 바깥에서 살아내는 일은 언제나 내 말문을 막았다. 사람들의 질문에는 언제나 답이 정해져 있었고 내 말풍선은 언제나 정답 바깥에 있었다. 붉게 그어진 채점표 아래에서 나는 입을 닫았다. 언제나 바쁘게 설명하고 열변을 토하던 입은 읽는 법도 쓰는 법도 듣는 법도 말하는 법도 잊어버려서 그저 꾸역꾸역 먹기만 한다. 맛있는 음식을 씹어 삼키고 있으면 혀에 스며오는 단맛이 뇌세포를 사르르 녹여낸다. 구겨진 뇌 주름이 매끈하게 펴지는 기분이 나쁘지 않다. 그동안 뇌에 너무 힘을 주고 살았던 걸까? 이전에는 어떻게든 잘 살려고 아등바등했었던 것 같은데 이제는 그냥 살아진다. 그냥.

 이 낯선 '그냥'의 감각이 보통 사람들이 갖고 있다는 그 일상성이라는 걸까? 별로 죽고 싶지도, 살고 싶지도 않고 별로 생각을 많이 하지도 않는 '그냥'의 삶. 이게 좋은지 나쁜지 굳이 판단하고 싶지는 않아서 그냥 살고 있다. 이 감각이 어떤 건지 스스로에게 설명해보려 뇌에 힘을 주는 순간, 다시 사는 일이 힘겨워질 것 같아서. 혓바닥을 어디에 둬야 할지 갑자기 의식된다거나, 숨을 쉬는 법이나 걷는 법이 갑자기 의심스러워진다든가, 계속 보고 있던 글자가 이 생김새가 맞는지 갑자기 불편해지는 것처럼 또 살아가는 모든 감각들이 의심스러워질 것 같아서.

그럼에도 이 글을 쓰기로 마음먹은 이유는 문득 텅 빈 입안이 공허해져서 그렇다.

모르겠다.

그냥의 삶이 적성에 맞지 않는 사람도 있는가보다, 하고 생각을 한다.

 손님들을 미워하지 못하게 되었다. 생각해보면 당초 그들을 무서워하거나 얄미워하거나 연민하거나 반가워하거나 안쓰러워하거나 비웃은 적은 있어도 미워했던 적은 없는 것 같다. 이런 말을 하면 누군가는 내가 너무 많은 사람들을 포용하려 하고, 너무 많은 감각을 공감하려 해서 그런 것 같다고 말해주고는 한다. 또 누군가는 내가 ‘손님들을 남자친구 대하듯 다뤄야 한다’, ‘돈 주고 이런데 오는 게 얼마나 외롭고 불쌍한 사람들이야’하는 업주들의 교육을 너무 깊게 새겨들어서 그런 거라고 말해주고는 했다. 손님들은 내가 이런 일에는 영 어울리지 않는 너무 정 많고 순수한 애라서 그런 거라고 말해주고는 했다. 유흥업 종사자의 이름표를 달고 있는 나를 이렇게나 자애로운 애로 여겨주다니 이 얼마나 사랑스러운 사람들인가. 다들 그렇게 상냥하고 다정하게 말해주어서 나도 내가 그런 줄 알았다. 내가 너무 말을 잘 듣는 매니저라서, 내가 너무 공감을 잘 하는 사람이라서, 내가 너무 사랑이 많아서 그런 줄 알았다.

 그런데 그냥 나는 사람을 미워하는 데 재능이 없는 것뿐이다. 아무도 밉지가 않다. 날 죽이려 들었던 엄마도, 여전히 나를 착취하는 아빠도, 날 그렇게나 괴롭게 했던 너도, 손님들도, 실장들도, 인터넷의 글들도. 아무도 밉지가 않다. 나를 떠나간/떠나가야 했던/내가 떠나게 만들었던 그 사람들이 죽을 만큼 밉다고 생각했던 적도 있는데, 그 미워하는 마음도 이제와서 생각해보면 미움보다는 비참함과 상실에 가까운 감정이다. 내 생을 감싸고 있던 그들의 관심과 애정이 한순간에 내 살에서 떨어져 나가서 괴로웠던 것이었다. 그들이 나에게 저질렀던 일들? 밉지 않다. 오히려 이제와서는 안쓰럽다. 불쌍한 사람들. 나에게 그렇게 굴지 않으면 안 되었던 사람들, 나에게 한풀이를 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사람들. 작고 약한 내가 아니면 풀 곳이 없었던 불쌍한 사람들. 나에게라도 뭔가를 풀어야 했던 사람들. 새까만 늪의 바닥 아주 아주 낮은 곳에서 잠겨 죽어가고 있는 나보다 아주 약간 위에 서서 나라도 밟고 있어야 겨우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 어떻게 미워할 수가 있겠는가. 진흙 속에서 서서히 질식해가는 중인 나는, 어설프게 미워하기 대신 같이 끈적하고 질척하게 죽어가기를 택했다. 그게 적성에 맞는 사람 인가보다.

모르겠다.

 나는 말을 잃었다. 더 나은 미래를 거짓말하는 일을, 지금의 일상에서 벗어난 진짜 일상으로 돌아가겠다고 거짓으로 맹세하는 일을 그만두게 되었다. 변명하는 일을, 괜찮은 척하는 일과 아픈 척하는 일을, 당신이 폭력이라 이름지은 인생에서 탈출하길 약속하며 내가 결코 살아가지 않을 다이어리를 꾸미는 일을 전부 잃어버렸다. 대신 지금 내 다리가 선 곳에 발을 붙이고 당신들 틈에 섞여 살기로 했다. 축축하고 차가운 늪에서 서로를 끌어안고 서로의 체온으로 진흙을 녹이며 천천히 함께 죽어가기로 했다.


글에 삽입된 사진은 아래 링크 작품과 함께 감상하길 권합니다. https://drive.google.com/file/d/1cK_Gp3cIaXUu60mc1teMHrpLqNJRoxRn/view?usp=sharing 

 

휘이익, 틱!.mp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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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소개글 : 늘 용기가 한발짝 늦는 사람. 부끄러움에 발발떨다 작년에 써둔 초고를 겨우 올해에 내놓고서는 올해에 쓴 일기는 결국 다음을 기약하며 또다시 묵혀놓게 된 사람. 그래도 사랑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