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노동 프로젝트/2021 성노동 프로젝트 제 5회 우리가 그리는 미래

[2021 성노동 프로젝트 제 5회] 달연 : 밤은 길어, 노래해 소라야

성노동자해방행동 주홍빛연대 차차 2021. 10. 10. 06:33

 

밤은 길어, 노래해 소라야 

달연

 

어떤 말로 시작해야 할까.

그때를 기록하는 것에 앞서서 많이 망설였다.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제 발로 들어갔으니까’ ‘어쨌든 돈 벌었으니까’ ‘합의 한 거니까’ 약자의 위치라고 착각하지 말라는 누군가들의 단호한 편협함 앞에서조차 부끄럽고 싶지 않았던 비겁한 나라서, 정작 무슨 말을 하고 싶었는지 나조차 모르겠다. 하지만 끊임없이 그때의 이야기가 하고 싶어 뒤돌아보게 되는 걸 어쩔 수 없었다. 폭력이 아닌 노동을 위한 투쟁, 그걸 하려는 사람들이 마음에 밟혀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나도 거기 있었고, 같은 걸 겪었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리고 그것만으로도 무언가 바뀔 수 있다는 믿음이 생겼기에, 기록할 용기가 났다.

말하고 싶은 것은 한도 끝도 없이 많지만, 나는 아는 게 별로 없다. 그래서 그냥 내 이야기를 하기로 했다. 이것이 괜찮을지 아닐지 더는 고민하고 싶지 않다. 단지 숨기고 싶지 않을 뿐이다. 내가 기록하지 않으면 누구도 그곳의 나에 대해 모른다. 그 모든 시간을 건너온 지금의 내가 왜 악착같이 진탕에서 헤엄치듯 살고 있는지 모른다. 오로지 나만이, ‘소라’에 대해서 기록할 수 있다.

가장 믿었고 좋아했던 친구에게 성추행을 당했던 것이 결정적 계기였다. 많은 주변 사람들이 그 아이의 편에 섰고, 무더기로 떠나갔고, 아무도 신뢰할 수 없었다. 소중했던 만큼, 참아왔던 만큼 다 끝내고 싶었다. 우울증이 갈수록 심각해져 정상적으로 출퇴근하고 사람들 속에 섞여 서비스를 제공하는 업무가 불가능해 기존에 다니던 일자리와 이후의 구직활동에서도 다 잘리고 난 이후였다. 더 이상 ‘망가지지 않을’ 이유가 나에겐 없다고 느껴져 ‘이 일’을 선택했었다. 매일 밤 되살아나는 그때의 촉감이 너무 괴로웠다. 차라리 정말 모두가 내 몸을 만지게 되면 덜 아플 거라고 확신했다. 나 자신을 가장 비참하게 만들어 놓은 후 죽고 싶었다. 그래야 모두가 죄책감을 느낄 테니까. 어차피 죽을 거, 내 삶이 어디까지 바닥으로 갈 수 있을지 알고 싶었다. 그런 강한 충동이 들었다.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거, 비겁하고 비난받아도 할 말 없다는 거 안다. 하지만 나는 정상적인 사고가 불가능한 상태였고 오로지 덜 아프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래서 시작하게 된 일이었다.

​그리고 알게 된 건, 성노동은 ‘바닥’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내가 어리석었고 기만적이었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누군가의 노동을 망가진다느니 바닥이라느니 그런 취급 했었는지. 현장에서 일하며 사회적으로 학습된 탓에 자꾸 ‘이런 일’이라는 표현이 습관처럼 나와버릴 때도 있었는데, 그럴 때마다 분위기가 싸해졌고 나는 모두에게 미안해서 어쩔 바를 몰랐다. 모든 노동 현장과 마찬가지로 성노동 현장에서도 모두가 자신의 존엄을 지키려고 부단히 노력한다. 엄연히 치열한 노동과 삶의 현장이다. 누군가는 성노동을 ‘쉽게 돈 버는 일’이라고도 말하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뼈가 으스러지는 듯한 정신노동이다.

내가 처음 일하게 되었던 직종은 노래방 아가씨였다. 지금껏 길들여온 이름이 아닌 다른 이름으로 불려야 하는 그곳에서 나는 ‘소라’라는 가명을 썼다. 언젠가 내 노래를 하게 된다면 쓰려고 했던 이름이었다. 소라껍데기에 귀를 대면 바다 소리가 들리니까. 그리고 여전히 나는 소라이다. 이 이름을 사랑한다.

노래방 첫 출근 날을 나는 여전히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다. 첫날부터 굉장히 무례하고 진상인 손님을 연달아 받았다. 술에 떡이 된 남자들이 얼음을 옷 안에 집어넣거나 많은 사람 앞에서 옷을 벗겼지만 큰 충격을 받지는 않았다. 오히려 구매자들의 손길이 정말 지난 성폭행의 경험, 그 감촉과 같아 위로마저 되었다. 그렇게라도 나 자신을 괴롭히는 폭력에 적응하고 싶었던 것 같다. 첫날부터 진상들을 의연하게 대처하는 내게 언니들이 대단하다고 해줬다. 머쓱했다. 애초에 나는 울지 않을 자신 있었기에 일하기로 한 거였으니까. 나는 그저, ‘내가 왜 아무렇지 않을까’ 하는 생각만이 들었다. 그렇게 빠르게 무던해졌다. 구매자의 명령에 따르는 것, 몸을 내어주는 것, 혐오스러운 농담에 웃어주는 것, 노래를 못한다고 구박받는 것. 다 아무래도 좋았다. 그게 내가 원했던 스스로의 권리를 극단적으로 포기하는 자기 파괴의 방식이었으니까. 다만 유일하게 가장 모멸감을 느끼며 괴로웠던 것은, 죽어가는 나의 앞에 놓여진 죽은 존재를 마주하게 될 때. 즉, 스스로가 비건이라고 말하지 못하고 육식을 해야 할 때였다.

나를 가장 많이 단독으로 지명했었던 중년 남성 한 명은 매일 내게 지속적인 연락을 하며 사무적인 회식 자리에도 나를 불렀다. 아직 어린 내가 먹어 보지 못했을 법한 비싼 안주가 있다는 명목이었다. 내가 아무리 심한 알레르기가 있다고 거부해도 통하지 않았다. 그의 진짜 목적은 내게 좋은 안주를 먹이는 것이 아니니까. 내가 상사들 앞에서 본인의 것인 마냥 행동해 주면, 그게 곧 그 남자의 권력이 되기 때문에 부르는 것이다. 그들의 상사도, 그도, 내가 그를 실제로 좋아하는지 아닌지는 신경 쓰지 않는다. 나는 그저 명품 시계처럼, 그가 더듬어대는 손을 피하지 않은 채 그 남자에게 종속되는 역할일 뿐이다. 나는 어차피 인간으로서 존중되지 않기에 내 모든 발언은 금기시되었고 거부는 사치였다. 주는 대로 먹고 맛있다는 리액션을 해야 한다. 내가 계속해서 그의 젓가락을 피하거나, 먹지 않는 것 같으면 그가 나를 단속했다. 빨리 먹으라고 재촉하듯 테이블 밑으로 들어오는 그의 손이 무서웠기 때문에 나는 살점을 씹었다. 그럴 때마다 내가 진작 죽지 않은 것을 후회하고 후회하며 살점을 삼키고 화장실에서 토해야 했다. 여기서 나는 ‘비건권’* 따위를 주장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그 자리에서 나에게는 어떤 음식을 먹을지 혹은 먹지 않을지에 대한, 아주 기본적인 선택권, 만약 내가 정말로 그 음식에 치명적인 알레르기가 있었다면 생존이 걸려 있었을 기본적인 권리조차 주어지지 않았다는 사실. 엄연히 이 사회에 존재하는 어느 미천한 ‘계급’에 대해 말하려는 것이다. 비참하게도 이런 상황이 나는 매우 익숙했다. 노래방뿐 아니라 직장에서도 이런 식의 육식 강요를 당한 적이 너무나 많았으니까. 하지만 이것은 또 다른 종류의 공포감이었다. 그들은 어떤 ‘합당한 이유’라도 갖고 있는 듯 행동했다. 그리고 그것은 어느 정도 현실성이 있었다. 당장 그 자리에서 물리적으로 그가 나의 목을 졸랐었다고 해도, 난 어디에도 신고할 곳이 없었으니까.

내가 가지고 있는 소수자성. 그리고 누구나 가질 수 있을 만한 그것들. 비건, 퀴어, 경증장애인, 페미니스트 같은 개인의 차별성이나 신념 같은 것은 금기시되는 구조가 그곳에서 나를 가장 괴롭게 만들었다. 그런 개별성을 드러내는 순간 ‘상품성’이 떨어진다고 판단되었다. 뿐만 아니라 안전이나 피임에 있어서도 성노동자에게는 ‘구매자의 요구에 긍정하는 것’ 이외의 선택지는 대부분 존재하지 않는다. 만약 존재하더라도 그것은 구매자에게 ‘허락’을 받는 형태로 이루어질 뿐이다. 거래가 이루어지는 방에 들어가는 순간 성노동자는 딱 ‘구매자에게 허락받은 만큼만 존재’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쓸모가 없어진다. 그렇게 합의가 되어있다. 그것이 몇 천년 동안 내려져 오는 역사 속에서 수많은 이들이 가부장적인 폭력과 자본의 논리를 들먹이며 만들어낸 기라성 같은 ‘밤 문화’라는 것이다. 법이 보호해주지 않는 세계에선 그것을 조신히 따르는 게 아가씨들이 안전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그리고 그 남자들이 낮에는 회사로, 가정으로, 학교로 돌아가며 그 버릇을 버리지 못한다. 그렇게 결국은 ‘모든 곳의’ 여자들을 죽이게 된다는 걸 뼈저리게 알게 되고서는 심장이 아주 차가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성노동 여성이라는 어떤 미천한 ‘계급’이 그들 머릿속에 존재한다는 것을 뒷받침하는 증거가 하나 더 있다. 구매자들은 정말 지독하게 아가씨들을 지적으로 미숙한 존재, 그저 자기 우월감을 채워주는 대상으로만 보고 있다. 그것을 맨 처음 깨달았던 것은, 앞서 말한 단골손님인 그가 후에 ‘소라가 마음에 든 결정적인 이유’를 들려줬을 때였다. 그를 처음 만났던 날, 그는 ‘세기란 어떻게 나누어지’, ‘우리나라가 광복된 연도가 언제냐’ 정도의 상식적인 질문을 내게 했었다. 그리고 내가 답을 맞히니 아주 말을 잇지 못할 정도로 놀라면서 좋아했었고, 그 부분에서 ‘소라는 뭔가 다르다’고 느꼈다는 것이다.

이처럼 대부분의 구매자 남성들은 성노동자 역시 지적 관심도가 높을 수 있고 본인들처럼 사회생활을 하며 신념도 있는, 아침이면 같은 지하철을 타고 출퇴근하는 어엿한 사회인이라고 절대 봐주지 않았다. 밤에 업소에서 본인들에게 긍정만 하도록 설계되어 있는 여성들은 낮에도 같은 모습일 거라 생각하는 것이다. 성노동자들은 다 본인들보다 지적 수준이 낮아 이런 일을 하고 있고, 그래서 본인들이 지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미디어와 사회가 만들어낸 편견의 탓일 수도, 그들 계급의 문제일 수도 있지만, 어찌 되었든 나는 성노동 현장의 인권침해가 시작되는 부분이 구매자의 이 논리 지점에서 시작한다는 것을 느껴왔다. 성노동 종사자로 계시면서도 누구보다 경력 있고 현명하게 본인의 삶을 가꾸며 살아가시는 분들께서 대화 주제에 참여하기 위해 한마디라도 얹을 때면 구매자들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그 말을 부정하거나 무시하기 위해 악을 쓰곤 했다. 보고 있자면 더 유치할 수 없는 정말 추잡한 광경이었다.

그런데, 한 번은 이런 현실을 뒤집는 흔치 않은 경험을 한 적이 있었고, 그것도 기록에 남기고 싶다. 당시 구매자들은 30대의 직업군인과 의사였다. 함께 들어간 언니는 자리에 앉자마자 본인이 대화 주제를 이끌기 시작했다. 그날은 3월 1일이었고 언니는 독립운동가분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으로 대화의 물꼬를 틀었다. 언니는 플라톤의 국가론과 평화의 댐, 한미 정치 상황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내기 시작하셨다.

구매자들이 상황 파악을 하는 사이, 언니는 조금 더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자며 내게 어떤 시를 좋아하냐고 물었다. 나와 언니는 손님들을 빼놓고 둘이서 좋아하는 시인 이야기를 나누었고 언니는 자진해서 본인이 좋아하는 시를 낭송하기까지 했다. 이때까지도 아직 술은 아직 한 병도 다 마시지도 않은, 만난 지 십 분밖에 안 된 상황에서 이 모든 일이 벌어져 대화의 주도권이 완전히 언니에게 넘어갔다. 구매자들은 거의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상태였다. 의사였던 이는 본인의 가방끈이 여기서 제일 짧은 것 같다며 의기소침해지기까지 했다. 손님들은 대부분 성노동자들들의 학력이 본인보다 많이 떨어진다고 생각하지만, 그 생각을 뒷받침할 근거는 없고 그래야 할 이유도 없다. 아가씨들이 똑똑하면 그들이 만지지 못할 이유는 무엇인가. 그들은 마치 ‘멍청한 여자’를 찾아서 노래방까지 온 것처럼 행동했다.

이후에 그들은 이 분위기를 어떻게든 해야겠다고 느꼈는지 노래를 마구 예약하여 부르기 시작했다, 그런데 언니는 파트너의 노래를 예약해주기는커녕 본인이 부르고 싶은 팝송을 계속해서 예약했다. 그들이 급기야 ‘너 그만 좀 부르면 안 되겠냐’고 부탁하는 지경까지 갔으나 언니는 ‘나는 아직 부르고 싶은 곡이 많으니 조금만 기다리라’고 하셨다. 그렇게 언니만 신나고 그들은 허탈한 표정으로 돌아갔다. 묘하게 그 언니의 술값과 노래방비를 손님들이 내주신 것 같은 분위기가 되었다.

​그 언니가 어떻게 그렇게 해도 될 만한 ‘어리바리한’ 손님을 알아채고 호쾌한 시간을 보냈는지는 몰라도, 아마도 언니는 구매자들이 본인을 그런 방식으로 무시하는 것에 아주 질렸던 것으로 보였다.​ 언니가 그렇게 화풀이하듯 테이블을 휩쓸고 지나간 것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대화의 주제, 본인의 취향과 선곡, 안주, 모두 손님을 상대하는 내내 아가씨에게는 선택권이 거의 주어지지 않는 것이다. 필요 이상으로 상품화되는 것이 아닐 수 없다. 의사였던 손님은 내가 낮에는 극단에서 배우로 연기한다고 하니 갑자기 가슴을 만지던 손을 빼기도 했었다. ‘아가씨들에게도 성매매가 아닌 일상이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해본 적 없었다’면서 말이다. 물론 술이 들어가자 다시 만졌지만, 나는 묘한 기분이 되었다. 그들에게 필요한 건 생각 없이 즐길 만한, 하나의 인격체가 아닌 오로지 ‘아가씨’였다. 그런데 그런 건 당연히 존재할 수 없다. 모두에게는 삶이 있다. 성노동자 여성들은 특별히 다른 세계의 인간들이 아니다. 어딘가에서 ‘노래방 아가씨’라고 공장에서 찍어내서 팔거나 사육하는 그런 게 아니란 말이다.

단순히 구매자들만 이런 시선으로 성노동 여성을 바라보고 있다고 할 수는 없다. 현장에 오지 않고 편견만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더한 경우가 훨씬 많다. 영화나 드라마 등 미디어에서 성노동 여성들을 다루고 있는 방식을 찾아보면 죄다 얄팍하고 편협하기 그지없다. 오직 남성 캐릭터를 설명하기 위한 장치나 장면의 자극적인 장치로 이용하기 위해 편견 속의 성노동 여성을 그려내지만 현실은 다르다. 함께 일하던 언니는 방송작가 취준생이었으며 학자금을 갚기 위해 일을 하고 있었다. 다른 사무실 언니는 이탈리아에 성악 유학도 다녀오셨고 장성한 아들도 키우고 계셨다. 성노동 여성들의 삶은 제각각 입체적이고 다양하다. 그리고 본인들도 이 직군의 위험을 잘 알면서도 감내해야 했을 만큼 간절했다. 누구보다 자신의 삶에 진지하고 치열하다. 사회의 인식만 몇십 년이고 멈춰 있다. 성노동 현장과 유흥업소에서 이루어지는 범죄는 나날이 늘어가고 거대해져 가지만, 누구도 성노동자 여성들의 삶을 자세히 조명하려 하지 않는다. 어쩌면 애써 새로이 찾을 필요도 없을 것이다. 우리는 너무도 평범한, 어느 대학생이며, 어느 빈곤층이고, 어느 싱글맘이고, 어느 취준생이니까.

이것은 여성 인권이 좀처럼 제도적으로 나아지지 않았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여성들은 경제적인 ‘재난’이 발생하거나 혼자서 해결하기 힘든 커리어, 질병, 사회적, 가정 내 문제가 생겼을 때 도움을 찾을 곳이 터무니없이 부족하다. 특히 성에 관련된 문제에 휩싸인 경우 2차 피해나 트라우마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오히려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 더 두려워지는 상황이 와버린다. 이런 상황에서 사회는 남성과 달리 여성들에게는 동등한 교육과 취직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싶어 하지 않는다. 모퉁이로 밀려난 삶에는 관심도 없다.

이내 점점 나는 그들 사이에서 그들이 원하는 모습이 되어 살아남는 것만을 생각했다. 그렇게 길들여지고 있었다. 단순히 돈 때문만은 아니었다. 어떤 일이든 일어날 수 있고 은폐되는 그 장소에서 당할 수 있을 물리적 폭력 혹은 보복이 본능적으로 무서웠다. 문을 닫고 구매자와 나 단둘이 되면 어떤 일이든 벌어질 수 있고, 그것은 영영 은폐될 것이며, 신고한들 나 역시 처벌받는다. 상상하면 상상할수록, 두려워하면 두려워할수록 나는 어느새 고분고분한, 그들이 원하던 판타지 같은 여성이 되어있었다.

그랬기에 그 남성 중 몇은 본인보다 적어도 20살은 어린 소라와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느끼기도 했었다. 일하며 가장 많이 들은 말 중 하나가 ‘소라 넌 참 사랑스러운 사람이야’, ‘넌 이런 곳에 안 어울려’라는 말이었다. 그런 말을 들을 때면 나도 모르게 멍해지고는 했다. 이들이 말하는 사랑이란 대체 무엇일까. 이들은 정말 이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걸까. 겨우 이까짓 게 사랑이라서, 다시 한번 세상에서 살아간다는 게 절망스러워지는 순간이었다. 그 위치에서 듣는 ‘사랑스럽다’ 혹은 ‘사랑한다’는 말은 폭력에 지나지 않았다. 위험한 환경 속에 판매되고 있는 입장에서 구매자가 말하는 사랑은, 통제되는 대상에게 ‘내가 너를 예뻐해 주고 있으며 너는 그 덕을 보고 있는 것이다’라는 암묵적 전제를 깔고 가지는 감정이기 때문이다. 내가 그들의 통제안에 굴복할 여성임을 알기 때문에 사랑한 것이다. 나는 그들이 말하는 사랑 때문에 목이 조였다.

이런 현실을 그들은 알고 싶어 하지도 않을 것이고, 알아도 변하지 않을 거란 생각을 했다. 언젠가 나 역시 그런 가해자였기 때문에. 인간을 위로하기 위해 ‘도구화’되어 ‘거래’되는 비인간 동물에 대한 인간의 사랑이 그들을 목 죄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특히나 미시 언니들* 사이에서 나이가 어렸던 나는 늘 가장 나이가 많거나 지위가 높은 남성 옆에 앉히는 ‘몸보신용 영계’로 불렸다. 그것이 내 위치였고 나는 ‘사랑받으며 먹히는 존재’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창녀들은 돈독이 올라서 뭐든 한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돈독이 오르지 않고서는 살아남을 수 없는 누군가들의 세상을 몰라서 참 좋기도 하겠다, 라고 저주를 퍼붓고 싶었다. 어느 순간 나는 지폐라는 수갑이 채워진 채 일을 하는 느낌이 늘 들었다. 돈은 벌어도 벌어도 끝이 없이 벌어야 했다. 어차피 벌어야 할 돈이지, 아파도 피할 수 없지. 스스로를 달래며 지하철에 몸을 실었던 것조차 못하게 되는 날은 정말 재난처럼 찾아왔다. 그 좁은 노래방 골목을 그만 나다니게 된 것은 외출조차 할 수 없을 만큼 우울증이 심해져서였다.

어떻게든 살아남았고 살아는 진다. 하지만 ​일을 그만둔 지 꽤 많은 시간이 지난 지금도 자주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어지고, 그 거리를 찾아가기까지도 한다. 노래방이 아닌 PC방과 카페 종업원, 배우로 일하는 지금도 여전히 성을 판매하고 있음을 느끼게 될 때가 그렇다. 그런 날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비명을 지르며 울게 되고 다시 속절없이 가라앉는다.

‘여자 아르바이트이기 때문에 손님들이 기대하는 게 있다’, ’남자들은 어디서든 여자 냄새를 맡는다’ 같은 점장의 말들. 어린 여성이기 때문에 묵살되는 내 언어들, 고깃집에서 분위기 잡치지 말고 가만 바닥 보고 앉아나 있으라는 선배들, 작품 안에서조차 수단화되는 나의 몸. 거래되는 나의 여성성. 이 세상이 거대한 포주이며 나의 정체성은 존중되기보다 이해시켜야 함을 끊임없이 느끼게 되는 노동 현장의 연속이다. 극단이 또 다른 성노동 현장이라는 생각마저 든다. 스타킹을 벗지 않으면 내쫓겠다고 했던 손님, 나와 동갑내기인 아들과 통화를 하며 내 가슴을 주물 대던 어느 아버지, 귀갓길까지 2차를 가자며 쫓아오던 남자들과 무엇이 다르다고 할 수 있을까.

나의 가정이 부유하지 못한 것도, 내가 트라우마를 잊기 위해 성매매를 선택한 것도, 다른 일자리를 구할 수 없었던 것도, 내가 더 강하고 똑똑하지 못했던 것도 모두 나의 잘못이 아니라는 걸 인정하기까지 너무나도 치열하고 오랜 시간이 걸렸다. 함께 그 시간을 건넌 사람들에게조차 의지할 용기 없던 나였지만, 그런 내게 다른 성노동자 분들께서 먼저 아픔을 말해주고 안아주셨다. 그건 기적이나 다름없었다. 자신을 창녀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는 걸 알고 있기에 그런 생각 말라고도 하지 않으셨고, 다시는 그런 일 하지 말라는 쉬운 말도 하지 않으셨다. 그럴 수 없단 걸 아니까. 다만 오늘까지 살아남아 줘서 고맙다고 해주셨다.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어서, 누구의 앞에서도 울 수 없었던 시간을 마음 아파해 주는 숨이 느껴져서 무너져 내렸다. 성노동자가 당한 성폭력 역시 당연히 폭력이라고 말할 수 있는 날까지 열심히 노력할 테니까, 제발 죽지 말아 달라고 서로에게 약속했다. 그들이 내 스스로가 더러워서, 누군가 사랑해주지 않을까 봐 불안하여 혼자 앓던 나와 헤어지게 해주었다. 가장 비참했던 곳에서 가장 강해질 수 있었다.

성노동에 종사하기 전의 나와 이후의 내가 거의 다른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바뀌었음을 느낀다. 그게 무엇인지 정확하게 설명할 수는 없다. 더 강해졌다고 하기에는 더 나약하기도 하고, 탁해졌다고 하기에는 어떤 것이 더 선명하다. 다만 확실한 것은 아주 복잡하고, 어쩌면 간단한 이유로 여기 모인 우리를 묶는 말이 ‘창녀’라든가, ‘걸레’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앞으로도 내가 성노동 여성이었음을 가능한 한 더 많이 말하고 싶다. 그것이 자랑이어서가 아니라, 그저 정말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죄가 아니고 부끄러워야 할 일이 아님을 떳떳하게 보여주고 싶다. 우리는 보호받을 권리를 말할 것이다. 성노동의 존재 이유에 대해 모두가 깊이 사유하도록 만들고 말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동정이 아닌, 서로를 살게 해주는 존중이다.

 

*

 

2021년.

처음 이 글을 썼을 때로부터 2년이 지나서야 다시 이 글을 읽으러 돌아올 자신이 생겼다. 말하고 싶은 게 너무 많아서 나오는 대로 주저리주저리 말한 듯한 글이다. 결국 무엇도 제대로 말하지 못한 글이지만, 그게 결국 그때의 소라 같아서 우습기도 하다. 너무나 많은 말할 거리로 머리가 가득 차서 뒤죽박죽이었다.

이 글을 처음 완성했을 때와 달리, 이제 소라는 나열할 수 없을 만큼 꽤 많은 시간 성노동에 몸 담갔다. 밤이고 낮이고 상관없이 많은 곳을 걸었고, 노래방뿐 아니라 어디든 처음이 아닌 듯 앉거나 눕게 되었다. 구매자에게 본인을 소개할 때 스물이든 서른이든, 유부녀든 대학생이든, 그런 건 다 상관없는 시간을 오래 살았다. 그건 꽤 위로되었고, 때론 죽고 싶기도 했다. 하지만 분명한 건, 돈 말고도 아파야 할 일이 지독하게 많은 생을 견디게 해주었다는 것이다.

비겁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더럽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쉽게 돈을 얻은 적 없다. 출근할 때마다 내 모든 안전과 목숨을 위태롭게 걸어야 했으니까. 매번 출근하며 벌벌 떨었다. 친구들에게 항상 장소와 시간을 알려주며 마치는 시간에 내가 연락되지 않는다면 꼭 전화를 해달라고 했다. 친구들에게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았지만, 그래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성노동 뿐이었다. 안 해본 아르바이트도 없다. 하지만 우울증 증세가 점점 더 악화되고 나서는, 악바리처럼 수능 공부를 하듯 메뉴를 암기하고 눈물을 뚝뚝 흘리며 포스기를 두들겨도 일주일도 안 돼 잘리기 마련이었다. 나라에서 주는 취업 보조금을 받고 있었지만 생활비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부모님께 손은 충분히 벌려왔었고, 이젠 한계란 것쯤은 나보다 쇠약해진 부모님의 손아귀에서 느낄 수 있었다. 설상가상 코로나 사태가 터져 일자리 찾기는 더더욱 하늘의 별 따기가 되었을 때, 무능력한 내가 죽을 만큼 싫은데 나라는 사람의 가치가 대체 어디에 있을까 싶을 때 나에게 매달렸던 진상 손님들이 떠올랐던 것뿐이다.

왜 너를 더 아끼지 않니, 그 방법밖에 없었니라는 말은 너무 많이 들었지만, 누구나 본인이 본인 삶에 대해 가장 잘 알고 깊게 사유한다. 그리고 간절하다. 변두리의 삶에 지독하게 무관심한 이 나라에 사는 여성들에게 성노동은 너무나 절박한, 때로는 정말 도저히 이것밖에 선택할 수밖에 없는 선택지가 되어버리기도 한단 말이다. 그런 세계에서 살아보지 못했으면서 왜 함부로 말하는 걸까? 그렇게 억울하고 화가 나기도 했지만 이내 생각했다. 이 모든 것이 누구의 잘못이 아니듯 내가 겪은 것을 누구한테 말하고 울어봤자 그것도 그저 마음 아픈 해프닝일 뿐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다는 것. 가족에게도, 애인에게도, 절친한 친구에게도 그 노동에서 느낀 것들을 말할 수가 없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고통받은 이야기를 듣고 싶은 사람은 없다. 각오한 아픔이기에 누구에게도 기대서는 안 된다고 오래오래 생각했다. 내가 자처한 것이니 누군가에게 어리광부리면 안 된다며. 이 악물고 참았다.

하지만 더 참을 수 없을 만큼, 속이 녹아버릴 듯 아파올 때가 종종 찾아왔다. 이제는 다 상관없어져 버린 것이지만, 이 기억들이 내게 무엇을 남겼었는지 어떻게든 발산해야 한다고 느꼈다. 그렇게 견딜 수 없는 때가 찾아와 소주 한 병 마시며 허공에 대고 지껄인 밤들이 많다. 내 고통의 분신을 어디엔가 남겨놓지 않으면 평생 ‘나’라는 육신에 더 많은 상처를 남기며 살게 된다. 이런 때 손 내밀어준 성노동 프로젝트는 이런 내가 끌어안을 마지막 기회 같았다.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는 이야기를, 여기에서 할 수 있겠구나.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해버릴지 나도 모르겠어서 겁이 나지만 무엇이든 이야기해보고 싶었다.

나는 결코 쉽지 않았던, 내 생의 성에 관련된 트라우마들이 나를 괴롭힐 때마다 성노동으로 귀결시켜 해결하는 식으로 이렇게 얼렁뚱땅 살아버린 것 같다. 애인의 가스라이팅, 가장 친했던 친구의 성추행, 교사의 성희롱, 그 학교의 성폭력 책임 전가, 2차 가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형사고소, 선배들의 성희롱, 직장 내 아웃팅, 그로 인한 경력 단절, 임신중절. 여성으로 살며 일상처럼 당하는 모르는 이에 의한 추행. 내가 ‘밝히는 놈들에게 밟히며’ 살아야 하는 사람이라서 이렇게 살아야 하는 거라고, 이게 나답다고 말해주는 것만 같아서 성노동 현장에서 나는 마음이 그렇게 편할 수가 없었다. 이게 노동인가? 자해에 가깝다고 때론 스스로 비웃어버리기도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은 때로 가장 상처받은 곳에서 인정받을 때 가장 위안을 받기도 한다는 걸 느낀다. 그렇게 회피하고 싶은 것이다. 그렇게라도 사랑받고 싶은 것이다. 언젠가 구매자가 ‘내가 언제 이런 애랑 자볼까’라고 감탄사처럼 내뱉은 적이 있다. 왜인지 그 말이 나는 지금까지도, 내내, 잊히지가 않는 것이었다. 그 말에서 아직까지도 도저히 빠져나올 수가 없을 때가 있다. 이런 스스로가 너무 싫으면서도, 그제서야 내 가치를 인정받은 느낌. 정말 어디서도 나는 그런 말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그때야 알 수 있었다. 나를 이 노동에 끌어들인 것도, 이 말도 안 되는 구조에서 적응하게 만드는 것도, 이 노동으로 자꾸만 돌아오게 만드는 것도, 또 안전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도, 전부 결국은 아주 지긋지긋한 ‘하나’ 때문이었다는 것을. 나는 살아남으려면, 소중한 것들을 지키려면 무조건 그것과 싸워야만 한다는 걸.

앞으로 나아가야 할 길. 잘 모르겠다. 다만 나는 조금 위로받고 싶다. 그리고 더는 숨길 것 없고 싶고, 내가 어떤 일을 하든 안전할 수 있고 싶다.

어떤 노동이 내게 곧 자해로 여겨졌고, 실제로 그것은 매우 효과적이었을 만큼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깎아내리는 형태였으며, 이후에도 단순히 그 직업에 몸담았다는 것이 나의 사회적 약점이 될 수 있다는 것. 그 노동 현장에서 빠져나온 이후/혹은 빠져나올 수 있었기에 죄책감 또는 후유증에 고통스러울 수가 있다는 것. 너무 위험하다. 이 사회에 성노동이 자리한 거대한 규모에 비해 이 노동환경의 구시대적이고 비상식적인 구조가 너무 위험하다.

이 모든 건 절대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며, 아주 낡은 가부장제와 자본의 논리에 멱살 잡혀 근근이 이어져 오고 있는 종류의 것이다. 지금의 성노동 구조는 구매자, 판매자, 판매자의 가족, 구매자의 가족, 그 주변인, 국가, 이 나라의 누구에게도 안전하지 않다.

하지만 누가 발 벗고 나서주는가. 생각할수록 가장 잔인하고도, 역겹고도, 왈칵 울음이 나오는 것은, 결국 가장 먼저 나서야 하는 사람은, 생을 걸어야 하는 이는, 이 모든 문제를 사무치게 느끼고 살아버린 당사자들이 바꿔나가야 한다는 것. 언제나 이런 식이다. 최전선에 선 사람들의 몫이 되어버린다.

그래도 혼자가 아니니까. 어쩌면 기적이 일어나지 않을까. 도시의 밤하늘을 뚫어지게 보면 희미하게 별이 보일 듯 말 듯 하는 것처럼. 그런 생각도 해보게 된다. 언젠가의 언젠가, 당당히 나의 자식 같은 창작물들을 내놓으면서, 그 이력으로 빼놓을 수 없는 성노동 경험을 밝히더라도 돌을 맞지 않을 세상도 올 것인가. 노래방이 아닌 무대에서 성노동자라는 사실을 말하더라도 안전해지는 그런 때가 올까. 사실 내가 살아있을 때 그런 때가 오지 않아도 상관없다. 그저 나는 이 싸움에서 더 이상 한 명도 잃고 싶지 않을 뿐이다. 제발. 간절한 마음으로 눈을 감고 되뇌는 바람이다. 희망을 가지게 되고, 혼자가 아니라고 느끼게 되는 건 어쩌면 한순간일 뿐인지도 모른다. 지독하게 혼자 버텨야 하는 시간은 너무 기니까, 지쳐버리는 순간도 올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쓰러져서, 아무도 잡아주는 이 없다고 느낄 순간이 끝도 없이 이어지는 날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감히 계속해서 살아보자고 말하고 싶다. 나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하고, 이 글을 읽고 쓴 모두에게 하는 부탁이기도 하다. 부디 존재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니 서로를 잡아주기를 바란다. 서로에게 더 관대해도 된다고 말해주었으면 한다. 서로가 아니면 이해할 수 없는 밤들을 건너왔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감히 해보는 부탁이다. 기록으로 만난 당신들의 품을 생각하면서 견뎌온 밤들을 잊지 말아 주세요. 꼭 우리 이렇게 더 씩씩하게 밤을 걸어갈 수 있도록. 부탁드립니다. 부디 서로의 밤들을 더 알아가 봅시다.


*비건권 : '비건들을 위한 권리' 를 뜻하는 신조어이다.

*미시 언니 : 장년층 구매자들을 상대하는 장년층 성노동 여성을 지칭하는 용어이다.

 


 

작가 소개글 : 비건지향 바이섹슈얼. 주로 하는 일은 그림 그리고 타투로 돈을 벌어먹는 것. 온새미치유연대에서 투쟁하고 가끔 낯선 무화과라는 이름으로 노래하고 연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