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노동 프로젝트/2021 성노동 프로젝트 제 5회 우리가 그리는 미래

[2021 성노동 프로젝트 제 5회] 데파코트 : 죽음의 위계화에 저항하며

성노동자해방행동 주홍빛연대 차차 2021. 10. 13. 05:04

 

죽음의 위계화에 저항하며

데파코트

 

내 친구들은 모두 가난합니다. 이 가난에 대해 생각해보세요. 이건 곧 당신의 일이 될 거랍니다. 우린 쓸모없는 사람들이 아니오. 너희가 먹는 빵을 만드는 사람일 뿐 포도주를 담그고 그 찌꺼기를 먹을 뿐.

-이랑, 늑대가 나타났다-

 

당신에겐 사랑했던, 소중했던 존재가 있는가? 나에게는 많지는 않지만, 소중한 사람들이 있다. 그 사람이 좋아하던 하늘의 색이 물드는 시간, 향기, 꽃, 꽃말, 좋아하는 색감, 노래, 장소, 좋아하는 음식, 싫어하거나 못 먹는 음식, 그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하나하나 알아나가고, 알고 지내는 몇 년동안 몰랐던 새로운 모습을 마주하게 되기도 한다. 그러던 그가 어느 날 세상에 존재하지 않게 된다면? 바닥에 떨어진 머리카락들처럼 그 사람의 아주 작은 편린만이 이 세상에 남는다면. 나는 지정성별 여성이고, 성소수자이고, 그 안에서도 트랜스젠더퀴어이다. 그런 내 주변에는 자연히 지정성별 여성(그러나 높은 확률로 트랜스젠더퀴어인)인 성소수자들이 많다. 그들은 나와 같이 정신병에 걸려 있고, 그러나 아픔을 충분히 치료받을 수 없을 정도로 빈곤하고, 그래서 늘 죽고 싶어하고, 때때로 자살을 시도하기도 한다. 그래서 나는 내 곁에 있는 사람들이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이상할 것 없는 세계에 살고 있다. 그 말이 이 세계가 괜찮다는 뜻도, 그 사람이 그렇게 죽는 것이 괜찮다는 뜻도 아니다. 내가 무언가 선물을 줄 때마다 친구는 나는 곧 죽을 건데 이런 선물이 필요없다고 말한다. 그래서 나는 더더욱 그 사람을 이 쓰레기 같은 세상에 붙들어 놓고 싶은 이기적인 심정으로 그에게 선물을 건넨다. 너와 나 우리는 이름도, 명예도 없는*1 아주 하잘 것 없는 존재들이기에, 너나 나의 죽음은 사막에서 발에 채이는 모래처럼 아주 흔하고 고요한 죽음이 될 것이다.

2021년에도 많은 성노동자들이 소리 소문 없이 죽어갔다. 2021년 3월 미국 애틀랜타 한인 스파에 백인 남성이 한인 마사지샵 3곳을 돌며 스파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총기를 난사하였다. 8명의 사망자 중 4명의 여성이 한인 여성이었다. 가해자인 백인 남성은 ‘스파가 나를 그곳으로 발걸음하게끔 유인했기 때문에 그 장소들을 없애기 위해 살인을 저질렀다’고 말한다. 사망한 피해자들에 대한 기사의 댓글에  “힘들게 일하긴 싫고 평범하게 일해서 받는 월급으론 명품이나 수입차는 언감생심이고 쉽게 일해서 돈은 많이 벌고 싶고”, “저건 딱히 죽었어도 쉴드치기가 참 건실한 한인 여성이면 몰라도 망신스러움”  “저런 소리 안나오게 이제 한국계인들이 성매매업 종사에서 빠져야 하지 않을까? 그들에게 그러한 핑계거릴 제공하지 말아야지”나 “성매매 업소 일하다가 죽은건데 뭐가 당당해서 티비를 나오는지 포주였는지 직접 뛰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대단하네” 등 죽은 피해자를 탓하는 2차 가해들이 일어났다.  이는 비단 해외만의 일이 아니다. 2021년 8월, 전자발찌를 훼손하고 도주한 남성의 손에 두 명의 여성이 살해당했다. 이들의 직업이 노래방 도우미로 밝혀진 것은 나중의 일이다. 만일 살해당한 두 여성이 처음부터 성매매 여성임이 밝혀졌다면 이 사건에 이렇게까지 많은 관심이 쏟아졌을까? 하는 의문이 마음 한구석에서 든다. 성노동자들은 가정폭력으로 인해 가정으로부터 이탈한 이들, 성노동을 한다는 이유로 가족에게 버림받고 단절된 이들, 또는 이혼 후 자녀의 양육비를 감당하기 위해 가장이자, 가정 경제의 부양자로 노동하는 경우들이 많다. 이들에겐 자신을 지켜줄 안전망이 되어줄 가족구성원이 부재하거나, 자신이 홀로 가정경제를 부양하는 가장이어서 살해당해도 발견되지 않거나, 발견되더라도 아주 뒤늦게 발견된다. 그리고 성노동자 대상 혐오범죄를 저지르는 가해자들은 이 점을 정확하게 인지하고 이를 악용하고 있다. 성매매특별법에 의해 어떤 성노동자의 존재는 불법으로 규정되기 때문에 성노동자들은 현장에서 성폭행, 구타 등의 폭력을 당해도 경찰에 신고할 수 없다. 성노동을 자발과 비자발로 나누는 남성중심적 이분법과 분할통치에 의해 어떤 당사자만이 피해자로 승인받고, 어떤 당사자는 강간을 당해도 범죄자가 된다. 그러나 성산업 현장에서 자발과 비자발을 명확하게 구분할 수도 없으며, 많은 성노동자의 삶이 자발과 비자발의 경계를 넘나들며 펼쳐진다. 그럼에도 남성뿐만이 아니라 ‘일부’ 페미니스트들조차도 성매매 피해자는 구제해주어야 하지만, 자발적으로 성매매하는 여성들은 ‘강간을 당해도 싼’ 존재라고 이야기하며 ‘순수하고 무결한 피해자’임을 증명할 것을 요구한다. 자신을 성노동자라고 명명하는 성매매 경험 당사자나 벗방 BJ, 피해자의 언어와 서사를 말하지 않는/못하는 이들은 폭력에 노출되어도 되는 존재라고 말한다. 그들의 말과 인식이 두 성노동자 여성을 사망에 이르게 한 강윤성 살인사건이 되어 돌아왔다. 혐오범죄는 비단 가해자 한 사람만의 잘못이 아니다. 자발적으로 성매매를 하는 여성은 폭력을 당해도 싸다는 말들이 그들을 사회로부터 더욱더 유리시키고, 고립시켰다. 이 고립은 사회적으로 구성되고 조장된 고립이다. 사회에 만연한 성노동자 혐오는 성노동자 혐오 범죄를 위한 기틀과 지반이 된다. 여성혐오와 겹쳐져 있는 성노동자 혐오를 보지 못하면 우리는 이 사건을 제대로 볼 수 없고, 이와 같은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대안을 만드는 것도 불가능하다.

여성대상 폭력, 여성 살해에도 불구하고 많은 남성들이 요즘은 여성상위 시대이고 남성이 오히려 여성에게 역차별을 당하는, 남성이 차별받는 시대라는 망언을 집단적으로 내뱉고 있다. 사회적 약자의 인권이 과거에 비해 나아졌고, 다른 국가(이들 국가는 주로 이슬람 국가로, 이런 발언이 이슬람 국가에서 페미니즘 운동을 하는 페미니스트들에게 실례라는 것을 하루빨리 인지하기 바란다)에 비해 낫다고 말하는 것은 기득권층이 차별적 사회구조를 은폐하는 오래된 문법 중 하나이다. 지금이 낫다면 과거에 있던 차별들은 없었던 것이 되는가? 과거에 있었던 차별과 폭력들을 제대로 반성하고, 인정하고, 그 차별의 피해자들에게 사죄하고 제대로 배상하였는가? 그 폭력으로 인해 희생된 사람들은 다시 돌아올 수 없다. 더 이상 어떠한 사죄를 수신할 수 없는 피해 생존자가 없다면 그 사건들은 종결된 사건들인가? 그러한 사회적 반성과 공적 기억 이전에 사회적 약자의 인권이 더 나아졌다고 과연 누가 말할 수 있는가.

1950년대 미국의 정치전략인 매카시즘*2은 나치의 차별의 정치*3를 이어받아, 공산주의자와 성소수자를 사회질서를 어지럽히고 국가를 무너지게 하고 사회체제를 교란하는 풍기문란하고 반사회적, 반국가적인 존재들로 지목했다. “성도착자들은 대부분 감정이 불안정하고 윤리의식이 부족해 간첩의 회유나 협박에 넘어가 쉽다”라는 말도 안되는 이유로 성소수자들을 탄압했다. 그러한 국가적 차원의 혐오선동에 영향을 받은 미국 정신과 협회는 1952년 정신질환 진단 및 통계 편람(DSM)*4에 동성애를 반사회적 성격장애로 등록하였다. 이로 인해 그 시대를 살았던 성소수자들을 대상으로 동성애 전환치료를 목적으로 한 최면술, 전기충격, 구토제, 수술 등이 시행되었고, 특히 레즈비언들은 호르몬 투여나 음핵절제술을 받아야 했다.*5

또한 당시 미국은 도시와 거리라는 공간에서 성소수자를 제거하고 추방하기 위해 ‘거리 청소’를 실시했는데, 성소수자로 추정되는 인물을 체포하였으며 대학에서 성소수자로 추측되는 교수와 학생들을 쫓아냈다. 성소수자 혐오적 정치로 인하여 많은 성소수자들이 직업을 잃었고 노동권 침해를 받았으며, 생존에 대한 권리, 시민으로 거리와 도시에 존재할 권리를 박탈당했다. 1960년대 초 미국의 뉴욕시에서는 1964년 세계박람회의 개최를 위해 ‘도시경관 정화’를 명목으로 게이바 등 성소수자 공간을 제거하는 캠페인을 시행했다. 뉴욕시에 위치한 게이바들의 주류 판매 면허를 취소하여 성소수자 공간에서 주류를 판매할 수 없도록 함으로써 게이바 영업에 막대한 불이익을 입혔다. 이는 성소수자 공간을 뉴욕에서 뿌리뽑겠다는 의지의 표명과 같았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한국에서 시행되고 있는 성노동자 대상의 함정수사는 1960년대 뉴욕에서 동성애자들을 상대로 실시되었다. 사복경찰이 위장해 있다가 게이바나 크루징*6 장소에 있는 남성들을 대상으로 거짓 플러팅을 했을 때, 해당 남성이 술을 사달라 하거나 함께 장소를 이동하게 되면 함정수사의 대상으로 그 남성을 체포하였다.

영국과 미국은 개신교의 영향으로 오랜 과거부터 동성애를 처벌하는 소도미 법(Sodomy law)*7을 존치시켜 왔다. 이 소도미 법으로 영국의 작가 오스카 와일드도 유죄판결을 받아 2년 동안 교도소에 수감되어 강제노역을 했고, 그때 얻은 병이 뇌수막염으로 악화되어 추방지인 타국 땅 프랑스에서 사망한다. 미국의 경우 1998년 합의된 성행위를 한 혐의로 체포된 동성애자들이 소도미 법에 대한 위헌심판을 제청하였다. 이후 연방대법원에서 소도미 법을 위헌이라고 판결하여 2003년에 이르러서야 동성 간 성관계가 불법이 아니게 되었다. 한국은 소도미 법의 잔재로 군형법 제92조6 “항문성교를 한 사람은 2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가 아직 남아있다.

많은 사람들이 퀴어 봉기의 시초로 스톤월 항쟁을 꼽지만, 스톤월 항쟁 이전에도 퀴어 혁명이 존재했다. 1966년 샌프란시스코 텐더로 지역의 컴튼스 카페테리아에서 훗날 '진 컴튼스 카페테리아 항쟁(Gene Compton's Cafeteria riot)'이라고 불리는 사건이 발발했다. 1960년대 미국에서 동성애는 여전히 불법이었고, 과거 한국에서의 ‘너 빨갱이지!’와 같은 의미로 작동했다. 뉴욕의 경우 성별이분법적인 복장검열을 실시하여 지정성별에 맞는 의상을 3가지 이하로 착용한 사람들을 체포하였다. 샌프란시스코의 컴튼스 카페테리아에 트랜스젠더, 크로스드레서, 드랙퀸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들어왔다. 카페 매니저는 눈살을 찌푸리며 전화기를 들었다. ‘공간에 침입한’ 성소수자들을 쫓아내기 위해 경찰을 부른 것이다. 그러나 이 트랜스젠더, 크로스드레서, 드랙퀸들은 ‘여기 성소수자가 있으니 잡아가시오’라는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에게 순순히 붙잡히는 대신 유리창을 깨부수고 불을 질렀다. 공권력의 성소수자 체포에 저항하여 퀴어들이 봉기한 것이다. 소요는 몸집을 불려 다음날 더 많은 사람들이 카페테리아 앞으로 모여들었다. 그들의 손에는 성소수자 차별을 규탄하는 색색의 피켓이 들려있었다.*8

그로부터 3년 뒤 혁명의 불씨는 뉴욕 그리니치 빌리지의 술집에서 다시 지펴졌다. 스톤월 인은 퀴어 커뮤니티 안에서도 이중으로 배제되고 소외된 트랜스젠더, 탈가정 청소년 성소수자, 드랙퀸 등이 주요 손님층인 게이바였다. 6월 28일 토요일 새벽 1시 20분, 사복경찰이 스톤월 인에 들어닥쳤다. 경찰은 사람들에게 신분증을 요구하며, 경찰서로 이송할 퀴어들을 분류하여 한 공간에 밀어넣었다. 경찰서로 이송될 예정 중의 한 사람이었던 마리아 리터(Maria Ritter/트랜스젠더 또는 크로스드레서로 추정됨)는 “나의 가장 큰 두려움은 내가 체포되는 것”이라고 말했으며, “두 번째로 큰 두려움은 내 사진을 어머니가 신문이나 텔레비전으로 보게 될 수도 있다는 것”, “나는 죄가 없다”라는 말들을 반복하며 바에 있는 술병을 깨뜨려 부수기 시작했다.*9 현장에 있던 퀴어 여성인 마샤 P 존슨(Marsha P. Johnson)*10과 실비아 리베라(Sylvia Rivera)*11, 레즈비언 스토메 델라베리에(Stormé DeLarverie)*12는 경찰의 폭력에 저항하기 시작했고, 소요는 점차 주변 사람들에게로 퍼져나가 퀴어들을 쉽게 체포할 수 없게 되었다. 마을의 레즈비언 수호자로 이름을 날리고 있는 델라베리에의 “얘들아, 왜 아무것도 안해?‘라는 짧고 굵은 한마디에 현장의 목격자들은 스톤월 인 주점 안으로 너도나도 뛰어들었다. 퀴어들을 경찰서로 연행할 두 번째 경찰차가 스톤월 인 앞에 도착하자 민중들은 “게이에게 인권을 달라”라고 외치며, ‘우리는 극복하리라’라는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경찰의 폭력적인 단속에 체포당하던 퀴어들이 동전과 술병, 보도블럭 조각들을 던지며 단속에 맞서기 시작했다. 민중들의 반란이 걷잡을 수 없이 번지자 추가 경찰 부대를 투입하였지만 시위는 쉽게 사그라들지 않았다. 다음날 신문에 대서특필된 사건의 사진을 보고 퀴어들은 더더욱 스톤월 인 앞으로 모여들었다(퀴어 대형으로 모여!). 아마 그들은 이미 그 자신이 체포되었었거나, 그들의 친구들이 체포된 이들이었을수도 있다. 6월 28일에 시작된 스톤월 항쟁은 7월 2일 수요일 밤까지 4일 가량 지속되었다. 항쟁의 목격담에 따르면, 퀴어 커뮤니티 내에서 가장 멸시받던 이들이 적극적으로 봉기에 참여했다고 한다. 스톤월 항쟁이 백인 중심의 퀴어 봉기였다는 평가를 받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스톤윌 항쟁의 현장에도 레즈비언, 트랜스젠더, 드랙퀸, 크로스드레서, 퀴어 성노동자, 유색인종 등 퀴어 커뮤니티 내에서 이중의 차별을 경험하는 이들이 있었다. 스톤월 항쟁의 영향으로 다음해인 1970년 6월 28일, 스톤월이 있던 크리스토퍼 거리에서 최초의 퀴어 프라이드 행진이 개최된다.

지금까지 국가의 폭력에 저항하는 퀴어 자긍심에 관해서 이야기했다면, 이제부터 할 이야기는 슬픔에 대한 이야기이다. 2021년 3월 3일 노동현장에서 나인 그대로 노동할 수 있는 권리를 위해 공개적으로 커밍아웃을 한 트랜스 여성의 사망 소식이 들려왔다. 나는 평소에 잘 보지 않는 TV를 켜고 뉴스에 채널을 고정했다. 그녀의 죽음이 TV에 보도되기를 기다렸다. 세상의 이런저런 여러 가지 소식들이 보도되고, 뉴스 뒤에 이어지는 스포츠 뉴스가 시작되었다. 뉴스는 그렇게 끝이 났다. 그녀에 대한 이야기, 그녀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는 뉴스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세상은 아무런 일이 없다는 듯이 흘러갔다. 뉴스가 그렇게 끝났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트랜스젠더가 트랜스젠더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직장에서 해고를 당해 죽음에 이르렀는데 TV 뉴스에서는 엉뚱한 말들만 흘러나왔다. 8시 뉴스에 보도되는 죽음과 8시 뉴스에 보도되지 않는 죽음, 그 경계를 가르는 것은 무엇일까. 너무 이상한 세상이야. 알 수 없는 감정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 이런 감정이 내 몸을 스멀스멀 기어올라 올 때면 나는 방을 뒤져서 커터칼을 찾고 싶다. 나는 죽고 싶다. 성소수자가 죽으면 죽고 싶고, 성폭력 생존자가 죽으면 죽고 싶다. 성소수자를 죽이고, 성폭력 생존자를 죽이고, 성노동자가 살해 당해도 그 죽음이 ‘그런 일을 한 성노동자의 탓’인 이런 세상에서 살아가고 싶지 않다. 죽고 싶은 일밖에 일어나지 않는 세상인데, 숱한 죽음의 시간을 통과해왔고, 앞으로도 숱한 죽음의 시간 속으로 걸어 들어가야 하는 세상인데 어떻게 친구들한테 감히 이런 세상에서 살아달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죽음 앞에서 모두 평등하지 않다. 왜 사회적 약자들은 죽음까지도 차별받는가. 왜 어떤 죽음은 기억되고, 기록되고, 의미화되는데 왜 어떤 죽음은 외면되고, 지워지고, 은폐되는가. 수많은 노동자를 착취했던 대기업 자본가의 죽음은 요란하게 보도되고, 여러 정치인들이 근조화환을 보내 추모하고, 기념 건물을 짓는데, 어두운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의 노래처럼 빛나던 이들의 죽음 앞에서 세상이 너무나 고요하고 적막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사회의 그 거대한 침묵이 내 온몸을 짓누르는 것 같다. 그래서 퀴어 커뮤니티의 성소수자를 애도하고 추모하는 행동들이, 이렇게 말해도 괜찮은 것인지 모르겠지만, 귀하게 느껴진다. 직장에서 쫓겨나고, 도시에서 쫓겨나고, 거리에서 쫓겨나고, 사회에서 쫓겨나고, 인간관계에서 추방되고, 결국 삶에서 쫓겨난 이들에 대해 말하고 싶다. 어떤 행사나 ‘도시 조경’을 위해서 거리의 어떤 존재들은 강제 퇴거당하고 청소된다. 2019년 7월 즈음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 첫 여성시장이 홍등가의 유리방을 없애고, 도심의 성매매 업소를 폐쇄하는 ‘도시 정화 사업’을 시행한다는 기사를 읽었다. 홍등가를 외곽으로 이주하는 것, 그러니까 내 눈에 보이지 않는 사각지대로 치워버리는 것. 암스테르담에 첫 여성시장이 선출되었다는 사실은 좋고 기쁜 소식이었지만, 그 여성시장이 내세운 정책은 내게 고민과 씁쓸함을 함께 안겨주었다. 기사를 본 많은 페미니스트들이 그 시장이 발표한 성노동자 강제 이주 계획에 대한 강력한 지지와 열광을 표했다. 페미니스트들의 그러한 반응은 나에게 공포와 두려움을 심어주었다. 홍등가라고 불리는 성매매 집결지는 영업공간이기도 하지만 집이 따로 없는 성노동자들의 거주지이기도 하다. 성노동자들의  주거권을 박탈하고 강제 철거와 강제 이주를 집행하겠다는 폭력적 정책 앞에서 환호하는 페미니스트들이 무서웠다. 그곳에 거주하는 많은 성노동자들에겐 이미 돌아갈 가족도, 돌아갈 집도 없을 수 있다. 또는 가장이고 가정 경제의 생계부양자일 수도 있다. 실제로 현장의 성노동자의 90%가 집결지 강제 철거에 반대하고 있다. 성노동자는 여성주의라는 큰 대의 앞에서 살던 집 좀 밀려도 되고, 생계수단도 잃고 좀 희생되어도 되는 하잘 것 없는 하찮은 여성들이겠지. 성노동자가 보이지 않는, 보지 않아도 되는 투명인간 같은 존재겠지. 결국 사람들이 말하는 여성주의의 여성에서 성노동에 종사하는 여성은 여성 외부자이고 여성 바깥의 존재인거야.

강제퇴거는 비단 성노동자에게만 행해지는 폭력이 아니다. 월드컵이나 올림픽 같은 국제적 행사의 개최를 위해 국가들은 도시 경관 정비, 도시 정화를 명목으로 도시에서 보기 싫은 존재들, 거리의 빈민, 홈리스, 성노동자들을 몰아낸다.

“88 아시안 게임과 88 서울올림픽을 앞둔 1981년~1986년 동안 ‘사회 정화’를 명목으로 강제 구금된 인원은 8600명에서 1만 6천명으로 급증했다. 그 중 3천여명이 형제복지원에 있었다. 구금기간 동안 수천명이 강간, 폭행, 살해 당했으며, 살아남은 사람들은 강제노역에 시달렸다. 매달 4, 5명이 폭행으로 사망했다. 이 모든 ‘사회 정화 활동’은 국가의 용인과 승인을 바탕으로 이루어졌다. 박인근 형제복지원장은 1987년 특수감금 등의 혐의로 기소되었으나, 1989년 대법원에서 무죄 선고를 받고 횡령 등 가벼운 혐의에 대해서만 유죄가 인정되어 2년여간의 징역형을 받은 것이 처벌의 전부였다. ‘부적절’한 것들을 치워버리고 도시를 ‘정화’한 후 개발사업에 적합한 형태로 재구성하려는 시도는 메가스포츠이벤트가 개최되는 어느 곳에서나 그 사례를 찾을 수 있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을 앞두고 나치 정권은 장애인과 유대인을 거리에서 지워버렸다. 1968년 멕시코시티 올림픽을 불과 열흘 앞두고 열린 독재정권과 올림픽에 반대하는 집회에서 정부군의 시위대에 대한 발포로 수백명이 사망했다. 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도 도심 거리에서 노숙인들을 몰아냈다.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은 법개정을 통해 경찰에 과도한 권한을 부여하여 9천여명의 노숙인을 체포하여 올림픽이 끝날 때까지 재판도 거치지 않고 구금 해두었다. 우리는 빈곤을 범죄화하지 않고, 거리의 사람을 감금하지 않고, 빈민을 강제이주시키지 않고, 국가폭력의 실상을 명확하게 조사하여, 드러내며, 그 책임자들이 타당한 처벌을 받는 도시를 원한다”*13

위의 글은 평창올림픽반대연대가 형제복지원 진상규명을 촉구하며 올린 성명문의 일부이다. 형제복지원 사건은 1975년부터 1987년까지 당시 전국 최대 규모의 부랑아 수용시설인 형제복지원이 부랑자를 선도한다는 명목으로 연고없는 장애인, 고아, 거리를 걸어가고 있는 시민 등을 불법으로 감금하여 강제노역, 구타, 학대, 성폭행, 암매장한 사건이다. 살해 또는 고문으로 사망한 것으로 공식적으로 확인된 사망자의 수만 513명이다. 시체는 암매장하거나 근처 의과대학에 해부실습용으로 돈을 받고 판매했기 때문에 정확히 몇 명이 죽었는지조차 확인이 불가능하다. 이 사건에 부산시청과 부산 경찰도 공모하고 있었기 때문에 수감자가 탈출하여도 경찰에 체포되어 다시 형제복지원으로 잡혀들어왔다. 수용자들의 대부분 구타당해 맞아 죽거나 굶어 죽었다. 아직도 형제복지원 피해 생존자들은 고통을 호소하고 있다. 형제복지원과 같은 대규모 빈민 수용시설은 전두환 정권이 1986년 아시안게임과 1988년 올림픽 개최를 앞두고 대대적인 ‘도시 정화’를 위해 시행한 부랑자 단속 정책에서 비롯되었다. 1975년 「내무부 훈령 410호」 ‘부랑인의 신고, 단속, 수용, 보호와 귀향 조치 및 사후관리에 관한 업무 지침’이 제정된다. 이 훈령은 부랑인, 즉 빈곤한 사람을 “건전한 사회 및 도시 질서를 저해”하는 존재로 정의하고 있다. 정상성과 사회 규범에서 이탈한 존재들은 그저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 기득권층의 불편함을 유발한다. 퀴어 퍼레이드에서 빛나는 모습으로 행진하는 퀴어, 길바닥에서 잠을 청하고 있는 노숙인, 홍등가 유리방의 빨간 불빛 아래 앉아있는 성노동자들은 특권 계급의 반감, 반발감을 불러일으킨다. 특권 계급은 세계를 자신들의 자원/자본으로 채워 넣으려고 하고, 자신의 자원이 어디서부터 비롯되었는지 의문이 들게 하는 존재들을 보지 않으려고 저 구석, 변두리로 밀어넣는다. 그들의 존재가 자신이 가진 특권의 모순과 폭력성을 드러나게 하기 때문이다. 나는 저렇게 살지 않는데, 무엇이 저 사람을 저렇게 살게 하지? 무엇이 저 사람을 저런 환경 속에 살게 했을까? 나는 집에 있는데 왜 저 사람은 거리에 있을까? 라는 물음 이후로 이행하지 못한/않는 사람들은 그들을 지우고 은폐하기에 급급하다. 그런 의미에서 비성소수자들이 안 보는 실내 체육관에서 퀴어문화축제를 하라는 혐오세력과, 빈민과 장애인을 수용시설에 수용하려는 국가의 욕망(우리나라에 가난한 사람, 장애인은 없다. 왜냐하면 가난한 사람, 장애인들은 좁은 수용시설에 밀어넣어져 있으니까), 성매매 집결지를 도시의 중심부에서 외곽으로 강제 이주시키려는 페미니스트들의 욕망(우리나라 여성 중에 창녀는 없다. 창녀는 도시 외곽에 내다 버렸으니까, 집결지는 전부 폐쇄할 거니까)은 연속선상 위에 존재한다. 어떤 이들이 스포츠 경기를 안락하게 관람할 때, 집이 없는 존재들은 스포츠 경기 개최를 위해 머물던 길과 거리에서 내몰려 쫓겨난다. 성매매 업소가 깨끗하게 제거된 거리를 보며 비성노동자 중산층 여성은 가슴을 쓸어내리지만, 성노동자는 생계와 거주지를 잃는다.

어떤 퀴어들은 퀴어 운동의 무결함과 순수성을 수호하기 위해 퀴어 내 성노동자의 존재를 끝끝내 외면하고 싶은 것 같지만, 퀴어 인권과 성노동자 인권의 역사는 이미 둘을 나눌 수 없을 만큼 복잡하게 서로 얽혀서 자라왔다. 스톤월 항쟁의 시위자였던 트랜스여성 마샤 존슨은 성노동을 통해 번 돈으로 집에서 학대당하고 거리로 내몰린 탈가정 청소년 성소수자를 위한 쉼터를 운영하였다. 퀴어 봉기의 효시로 꼽히는 스톤월 항쟁의 현장에 퀴어 성노동자가 있었고, 청소년 성소수자 쉼터를 퀴어 성노동자가 설립하고 운영하였고, HIV/AIDS 감염인 인권운동에 퀴어 성노동자가 함께 참여했다. 당신은 퀴어의 인권과 성노동자의 인권을 정확하게 반으로 나눌 수 있는가?

미국에서 거리를 걷는 트랜스여성은 잠재적 성노동자로 의심받아 경찰에게 불심 검문을 당하고, 소지품 중에 콘돔이 발견되면 체포되었다. 어떤 사람이 퀴어로 의심받아 체포를 당한다면 ‘이상한’ 퀴어들을 욕할 것이 아니라, 퀴어라는 이유로 몸수색과 체포가 허용되는 차별적 사회 체제를 비판해야 하지 않을까? 어떤 사람이 성노동자로 의심받아 체포당하거나 불이익을 입는다면, 우리의 언어는 누구를 겨냥해야 할까. 미국의 한 경찰청에서는 함정수사의 일환으로 촬영되고 있는 카메라를 숨긴 채 성구매자로 위장하여 성노동자를 모텔로 끌어들이고, 성노동자가 옷을 벗는 모습을 모조리 촬영하여 성매매 혐의의 증거로 뉴스에 방송자료로 제공하거나 인터넷에 업로드한다. 한국의 오피스텔 성노동자들 역시도 성매매 혐의의 증거로 경찰에 의해 나체 사진을 촬영당한다. 비성노동자 여성에게는 명백한 성폭력이자, 불법촬영으로 명명되는 일이 성노동자에게 일어나면 그것은 더 이상 성폭력이 아닌, 범죄에 대한 정당한 처벌로 치부된다. 성노동자 멜섭왹비가 성구매자에게 성폭행을 당했다고 미투를 했을 때도 성노동자 혐오적 페미니스트SWERF(Sex-Worker-Exclusionary Radical Feminist)들을 중심으로 성폭력 2차 가해가 수 개월에 걸쳐 긴 시간동안 자행되었다. 성노동을 했으니 범죄자이자 가해자이고, 스스로 성노동을 해서 성폭력을 자초했으며, 다른 여성들은 성폭력을 당한 저 성노동자처럼 살면 안된다는 식이었다. 그 과정에서 한 페미니스트가 성노동자 멜섭왹비의 신상을 털어 인터넷에 게재하고 유포하였다. 성폭력 증언을 사회가 은폐하고 튕겨내고 적극적으로 2차 가해하는 일을 겪으면 죽고 싶지 않았던 사람도 죽고 싶어진다. 2010년 『뉴욕포스트』의 표지로 한 교사의 사진이 실렸다. 『뉴욕포스트』는 이 사진의 해설로 ‘갈보 교사’라는 글을 덧붙인다. 그 교사는 인터넷이 성노동자들의 조건만남 광고를 차단하는, 성노동자를 더욱 열악한 환경 속으로 몰아넣는 성노동자 차별적 온라인 정책들*14을 비판하는 글을 게시하였다는 것을 이유로 언론에 의해 대대적인 아웃팅을 당했다. 『뉴욕포스트』는 과거에 그 교사가 성노동자로 일하고 있는 모습을 불법촬영한 불법촬영물을 표지로 실은 것이다. 그는 결국 과거의 삶의 이력 중 성노동에 종사했던 시기가 있었다는 이유로 교사직에서 해임당하였다.

성노동자 대상 혐오 폭력에는 국경이 없다.  2018년, 성노동자가 소속되어 있는 아이돌 허니팝콘의 데뷔 소식이 알려지자, 이들의 활동을 막아야 한다는 #outHoneyPopcorn 해시태그 캠페인이 온라인에서 펼쳐졌다. “이러다 전세계 포르노 배우들 다 한국으로 몰려오는 건가” “여돌인권 바닥으로 더 추락하게 하지 마세요” “한국에서 성착취당하는 여자가 성매매랑 아이돌했어도 반대했을 것” SWERF들은 성노동자들을 따라다니며 퇴마하듯 염불처럼 탈성매매를 외지만, 사실 그들은 성노동자가 다른 노동에 종사하는 것 또한 바라지 않는다. 성노동자가 성노동이 아닌 다른 특정 업종에 종사하는 것이 그 노동을 ‘더럽히고 오염시킨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허니팝콘은 앨범을 발매하고 공연을 준비했지만, 비성노동자 여성들의 강력한 반대와 항의 전화로 인해 공연은 취소되었다. 그리고 허니팝콘의 행보를 지지했던 성노동자 메루메루님은 이제 이 세상에 없다. 어떤 죽음은 사람들의 분노를 결집시키지만, 어떤 죽음은 사람들에게 인지되거나 의미화되지 못한다. 행복하게 또는 평범하게 살아가는 성노동자의 모습을 보여주며 성노동자의 인권을 향상시키는 것을 자신의 정치적 전략으로 삼았던 메루메루님을, 자신을 성노동자라고 적극적으로 명명했던 메루메루님을 SWERF들은 ‘성매매를 해서 불행하게 살다 불행하게 죽었다’면서 죽음마저 도둑질하려고 도굴꾼 노릇을 하고 있다. 메루메루님의 친구들은 메루메루님을 기억하고 애도하는 아주 짧은 추모시를 지었다. 그건 하늘로 ‘메루메루빔’을 쏘아올리는 것. 4월 2일이면 메루메루님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지상에서 하늘로 쏘아올리는 별똥별처럼 시를 하늘에 올린다. 그 별빛들이 그에게 닿았는지는 알 길이 없다. 우리는 각자가 다시는 만날 수 없는 그 사람에 대해 가지고 있는 기억의 조각을 스테인드글라스처럼 맞추고 조각보처럼 꿰맨다. 죽는다는 것은 하나의 우주가, 하나의 은하가 영영 사라지는 것이다. 그 사람이 좋아하던 하늘의 빛깔, 향기, 꽃, 꽃말, 좋아하는 색깔, 노래, 장소, 사랑했던 사람들의 편린들을 소중하게 모은다. 그렇게 소중하게 모은 기억도 녹이 슬고 희미해져 사금파리가 될 것이다. 한 존재가 사라져버린다는 것은 이렇게나 쓸쓸하다. 모든 추모와 애도는 불완전하다. 그 어떤 추모와 애도도 늘 모자랄 것이다. 그럼에도 그 사람을 기억하는 것을 그만둘 수 없어서 사람들은 불완전한 추모와 애도를 하늘로 매년 쏘아 올린다.

 

모든 것이 지난 후에 그제서야 넌 화를 내겠니
모든 것이 지난 후에 그제서야 넌 슬피 울겠니
우리가 먼저 죽게 되면
일도 안 해도 되고
돈도 없어도 되고
울지 않아도 되고
헤어지지 않아도 되고
만나지 않아도 되고
편지도 안 써도 되고
메일도 안 보내도 되고
메일도 안 읽어도 되고
목도 안 메도 되고
불에 안 타도 되고
물에 안 빠져도 되고
손목도 안 그어도 되고
약도 한꺼번에 엄청 많이 안 먹어도 되고

-이랑, 환란의 세대-

 

자신의 장례식을 기획할 수 있는 죽음과 자신의 장례식을 상상하고 기획할 새도 없이 훌쩍 세상을 떠나버린 이들의 죽음을 생각한다. 죽음은 모두에게 평등하지 않다. 죽음은 이미 완벽하게 서열화되고 있고, 위계화되어 있다. 집이 없는 존재들은 자신이 원하지 않는 장소, 내가 선택하지 않은 장소에서 죽음을 맞아야 한다. 사랑하는 사람들한테 사랑한다고, 지금까지 정말 고마웠다고, 작별 인사를 하지도 못한 채 죽을 수도 있다. 늘 죽음과 멀지 않은 경계에 살고 있는 심약한 친구가 ‘네가 죽으면 나도 따라 죽을 거야’라고 말하는 말버릇처럼 따라서 죽을 수도 있고, 나의 죽음을 슬퍼해줄 사람조차 없을 수도 있다. 무수히 많은 비인간동물들의 죽음은 ‘거의 대부분’ 기억되지도, 추모되지도 않는다. 오늘 밤, 또 한 명의 성폭력 피해자가 죽었다는 부고를 들었다. 트랜스젠더 군인을 강제 전역시켜 죽이고, 트랜스 여성을 CCTV가 없는 곳에서 각목으로 구타할 것이라며 여대 입학을 반대하고, 군대 내 성폭력으로 성폭력 피해자가 자살하는 이런 세상에서, 이렇게 죽고 싶은 일들로만 가득한 세상에서 살아달라는 폭력적인 요청을 한다.

꿈을 꾸는 사람들은 절망의 깊이만큼 이룰 수 없는 세계를 예감하고 노래하는 사람들이다. 꿈도, 사랑도 모두 이룰 수 없는 것들이기 때문에 꿈이고 사랑인 것이겠지. 나는 성노동 운동가 멜리사 지라 그랜트의 말을 믿고 싶다. “나를 계속해서 페미니즘으로 돌아오게 하는 것은 성노동자 페미니스트들이다.”*15 내가 상상하는 여성주의 안에는 트랜스 여성도, 성노동자 여성도, 빈곤한 사람도, 홈리스도, 장애인도, 비인간동물도 함께 존재한다. 이방인, 불청객, 침입자, 불법. 우리는 이 거리에서 그런 이름으로 불린다. 우리는 이 거리의, 이 도시의, 이 세상의 이물질. 우리는 국가를 망신시키고, 무너뜨리고, 사회질서를 어지럽히고, 풍기를 문란하게 하는, 반사회적이고 반국가적인, 불법의 존재들이다. 우리들은 거리의 정화와 위생을 위해 청소되고 수감되어야 하는 쓰레기이고, 세균이고, 병균이지만, 이 거리의 이물질 연대. 우리가 존재해서는 안 되는 공간이라고 말하는 불투명하고 투명한 모든 벽들을 불지르고 부숴버리자. 네가 있었던 멀리에 언젠가 가닿을 때, 너의 멀리와 나의 멀리가 스치고 교차할 때, 침묵을 가로지르는 노래를 듣게 될거야. 나의 저쪽과 너의 저쪽이 터무니 없이 멀 수도 있지만, 같이 나아가자.

러브호텔에서 죽고 싶지 않아
내가 바라는 세계는 모텔방에서 성노동자가 시체로 발견되지 않는 세계,
내가 성노동자여도 여전히 당신의 친구일 수 있는 세계,
나의 소중한 친구들인 성노동자들이 살아갈 수 있는 세계,
성노동자가 당할 만하다거나, 죽어도 싸다고 말하지 않는 세계,
퀴어 퍼레이드처럼 창녀들이 창녀 퍼레이드를 할 수 있는 세계,
더 이상 여성과 성소수자들이 여성과 성소수자라는 이유로 죽지 않는 불가능한 세계,
(성노동자여서, 트랜스젠더여서) 죽음과 애도가 차별받지 않는 세계,
네가 나와 함께 살아있는 세계.

추신 Y에게.
너는 이 은하에서부터 저 은하에서 쓰는 언어와 노래들에 닿을 만큼 큰데, 근데 사람들은 너를 그만큼 추모하지 않을 거야, 그게 슬퍼(김연경이 니 추모사 읽어야 하고, 니 장례식 TV에서 방송해주고, 국장하고, 니 기념관 세워야 하고, 니 살아생전 생가 영구 보존해야 하는데 그럴거 아니면 나 채개장 먹이지 마라). 

1. <임을 위한 행진곡> 中 차용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 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동지는 간 데 없고 깃발만 나부껴

2. 2차세계대전 이후 미국의 상원의원 조셉 매카시가 무정부주의자, 공산주의자 또는 미국인이라고 간주되지 않는 인종, 국적, 민족적 타자들을 배제하는 정치전략. 그로인해 1947년과 1950년 사이 성소수자라고 의심되는 사람 1,700명이 구직 시 불이익을 입었고, 4,389명이 군에서 해임되었으며, 정부 기관에 근무하던 420명도 해고 당했다.

3. 나치는 1928년 “남자 간 또는 여자 간의 사랑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은 우리의 적이다”라고 단언하고, 성해방운동의 성과로 만들어진 성과학연구소를 파괴하였으며 모든 자료를 불태웠다. 그리고 수만 명에 달하는 동성애자들을 집단학살과 의학실험의 대상으로 삼았다. 현재까지도 전 세계의 성소수자들은 나치즘에 희생된 성소수자들을 추모하기 위해, 전쟁반대의 대표적인 구호로서 핑크트라이앵글을 사용하고 있다. 출처: ‘동성애자인권연대 웹진 ’너, 나, 우리 “랑” lgbtpride.tistory.com/339, [재게재]사진으로 알아보는 스톤월 항쟁 이야기, 정욜(동성애자인권연대 활동가), 2021.05.25.

4. 미국 정신의학회에서는 동성애를 정신장애가 아니라고 판단하여 1973년, 정신질환의 진단 및 통계 편람(DSM)에서 제외하였다. 2013년 DSM-5부터 성주체성장애(Gender Identity)가 젠더 위화감(Gender Dysphoria)으로 변경되었다.

5. 각주 3과 동일

6. 크루징은 주로 게이 남성이 공원, 공중화장실, 클럽, 대중목욕탕 같은 공공장소에서 섹스하거나 섹스할 누군가를 찾아 나서는 행위를 뜻한다. 출처: 섹스와 건축, 크루징 파빌리온, 토끼는 토끼는 즐거워 , 2019.11.07

7. 동성애를 처벌하는 법으로, 구약성경 <창세기> 19장에 나오는 도시의 이름으로, 성적으로 타락하여 하나님의 심판으로 유황과 불세례로 멸망받는 도시 이름 소돔(Sodom)에서 유래되었다.

8. 각주 3과 동일

9. 위키백과, 스톤월 항쟁

10. 마샤 P. 존슨(Marsha P. Johnson/1945.08.24.~1992.07.06.): 미국의 퀴어해방 운동가이자 드랙퀸, 성폭력 생존자, 성노동자, 젠더비순응자. 1987년부터 1992년까지 ACT UP의 AIDS 활동가였다. 성노동을 통해 번 돈으로 STAR House(탈가정 청소년 성소수자를 위한 쉼터)의 임대료를 지불했다. 1992년 7월 초, 뉴욕시 프라이드 행진 직후, 마샤 P. 존슨의 시신이 웨스트 빌리지 부두의 허드슨 강에 떠 있는 채로 발견되었다. 경찰은 머리에 상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존슨의 사망을 즉각 자살로 결론지었다. 리베라를 포함한 존슨의 친구들과 지역사회 구성원들은 존슨이 자살을 생각하지 않았다고 주장했고, 존슨이 존슨의 시신이 발견된 장소 근처에서 더 일찍 괴롭힘을 당했다고 말했다. 출처: 위키피디아 https://en.wikipedia.org/wiki/Marsha_P._Johnson

11. 실비아 리베라(Sylvia Rivera/1951.07.02.~2002.02.19.): 트랜스 여성으로 미국 퀴어해방 및 트랜스젠더 인권운동가. 친구인 마샤P 존슨과 함께 트랜스 여성, 홈리스, 드랙퀸, 청소년 성소수자를 지원하는 그룹 STAR(Street Transvestite Action Revolutionaries)를 공동 설립하였다. 출처: 위키피디아https://en.wikipedia.org/wiki/Sylvia_Rivera

12. 스토메 델라베리에(Stormé DeLarverie/1920.12.24.~2014.05.24.): 레즈비언 부치.(쓰리피스 수트에 남성모 등 그린듯한 부치 스타일) 가수, MC, 레즈비언 바 경호원, 마을의 레즈비언 수호자로 알려져 있다. 스톤월 항쟁 당시 경찰 헬멧으로 머리를 폭행당한 후, 피를 흘리며 경찰차 뒷좌석으로 떠밀려진 상태였다. 스토메는 밖에 있는 목격자들에게 소리쳤다. “얘들아, 왜 아무것도 안해?” 사람들은 요청에 응답하며, 스톤윌 인 안에 있는 사람들을 돕기 위해 뛰어들어갔다. 공연 예술인인 스토메는 학대받는 여성과 어린이를 위한 공연을 만들었다. 파트너인 댄서 다이애나와 그녀가 죽을 때까지 25년 동안 함께 살았다. 출처: 국제 앰네스티 홈페이지 스톤월 항쟁 50년: 자긍심과 시위, 그리고 평등을 향한 갈망, 위키피디아 https://en.wikipedia.org/wiki/Storm%C3%A9_DeLarverie

13. 평창올림픽반대연대, 형제복지원 사건 진상규명을 촉구한다 2018.09.10. noolympic2018.blogspot.com/2018/09/blog-post.html?m=1

14. 조건만남 성노동자는 주로 트위터 계정을 개설하여 조건만남을 광고하여 손님을 고르는데, 성노동자의 조건계를 신고하여 삭제시키면 결국 그 성노동자는 가지고 있던 그나마 나은 손님 리스트, 피해야할 블랙리스트, 단골 손님 등의 정보를 잃게 된다. 노동환경이 0으로 리셋되는 것이다. 이후 트위터보다 더 열악한 무작위 채팅앱에서 손님에 대한 정보 없이 더 위험한 환경에서 성노동을 하게 된다. 성노동자의 조건계를 신고하여 삭제시키는 일은 성노동자의 안전을 더욱 취약한 자리에 놓는다.

15. 멜리사 지라 그랜트, 『성노동의 정치경제학』, 박이은실 옮김, 여문책, (2017), 213p

 


 

작가 소개글 : 안녕하세요. 논바이너리 트랜스젠더퀴어 성노동자 데파코트라고 합니다. 창녀 페미니즘을 생각하고 고민합니다. 흩어지고 부유하는, 횡단하는 몸의 역사를 증언합니다. 성노동을 하면서 겪는 정신건강의 문제나 힘겨움, 주변의 혐오와 낙인에 대해 성노동자가 자신의 목소리로 자신이 겪는 경험을 말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말할 때 세상이 바뀐다고 믿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