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노동자해방행동 주홍빛연대 차차 2022. 3. 25. 06:14

 

익명 성노동자

 

성노동자 당사자를 자발과 비자발로 나누는 것은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난 처음 성노동을 시작했을 때 남들이 불쌍하다고 여길만한 절절한 사연을 가지고 성노동을 시작하지 않았다. 하지만 손님들은 나를 불쌍해했고 피치 못할 사정이 있는 애라고 생각했으며 사장과 실장도 나를 안타까워했다. 나를 안쓰럽게 보면서 "쯧쯧, 어린 나이에 이런 험한 일을 하니…." 하면서도 그런 내가 싹싹하고 대견하다고 했다. 그저 나는 같은 시간을 투자해서 더 많은 돈을 얻을 수 있는 일자리를 원했을 뿐이었다. 어쨌든 나는 성매매 피해 여성 같은 피해자 위치로 여겨질 때마다 불쌍한 사연을 하나쯤 가져야만 내가 창녀가 된 걸 사람들이 정당하다고 인정해주나 싶어졌다. 성노동은 불법이고 나는 범죄자다. 사람들에게 범죄행위를 연민 받으려면, 나는 억지로 성매매를 강요당했고, 그만두지 못할 피치 못할 사정이 있어야 하는 거 같았다.
 
나에게 돈이 많이 필요하게 된 계기가 있었다. 가정폭력으로 가출을 했고, 부모의 지원을 받을 수 없는 상황에서 용돈벌이 삼아서 성노동을 시작했다. 그렇게 일을 하는 과정에서 사기를 당하고 빚을 져서 생업이 됐다. 이런 이야기가 있었지만 그게 뭐? 그래서 "어쩔 수 없었어요. 봐주세요."라고 말하면 내가 성노동 하는 거 이해해줄 거야? 사람들은 불쌍한 창녀와 아닌 창녀를 구분하려 한다. 거기서 성노동자를 자발과 비자발로 구분하고 불쌍한지 안 불쌍한지 심판하려 든다. 불쌍하고 가련한 불행 서사를 가진 창녀에게 따뜻한 동정과 위로를 건네는 동시에 가엽지 않은 창녀는 모욕하고 짓밟고 공격해도 되는 대상으로 여긴다.
 
창녀 주제에 보지 파는 걸 당당하게 말하는 창녀를 미워한다. 창녀로 일하면서 기쁘다거나 즐겁거나 긍정적인 감정을 표출하는 걸 미워한다. 창녀는 늘 불행하고 일하는 내내 우울하고 부정적인 감정으로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발적으로 일에 뛰어든 것처럼 여겨지는 창녀는 욕을 먹어도 싸다고 생각한다. "네가 스스로 그런 일을 하기로 했으니까 이런 취급을 받아도 할 말 없지. 네가 좋아서 하는 일이잖아."라고 말하며 자신의 혐오를 정당화한다. 정말 그런가? 자기가 스스로 결정한 일이니까 이런 취급을 받아도 되는 걸까? 성노동을 선택한 사람을 짓밟을 권리는 어디에 있단 말인가?
 
정말 한 개인이 성노동을 선택하는 과정은 자발적이었고 자유로운 선택이었을까? 국가가 능력이 없고 경력 없는 사람은 임금을 충분히 받을 수 없게 만들었다. 가난한 사람은 계속 가난하고 취약하게 위치시켰다. 노동에 계급을 매기고 계급마다 가치를 부여하는 구조. 주 5일 하루 9시간 이상 꾸준히 일을 할 수 없는 사람에게는 생계를 위한 충분한 임금도 주지 않는 국가. 이들이 날 성노동을 선택하게 했고, 내가 웃음을 팔다가, 가슴을 팔다가, 보지까지 팔게 만들고 이제 여기서 나가지 못하게 만들었다.
 
과연 내 선택은 자발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아니, 수많은 사람이 노동하면서 사는 건 먹고 살기 위해서 아닌가? 노동을 하는 모든 사람이 "자발적"으로 노동을 선택했다고 말할 수 있나? 창녀에게만 자발과 비자발을 나눠서 말하는 게 얼마나 무의미한 일인가. 그럼 당신이 하는 일은 어떤가. 당신이 원해서 일을 시작했으니 일하다가 손님에게, 혹은 사장에게 처맞거나 강간당해도, 혹은 임금을 충분히 받지 못해도 그래도 네가 선택한 일이니 할 말 없다고 할 건가?
 
자발과 비자발이라는 이분법은 성노동자를 취약하게 만든다. 폭력을 정당화하고, 낙인을 강화하는 단어이다. 비자발적으로 일하게 된, 또는 성매매 피해 여성이라는 말에는 "불쌍한" 성노동자 라는 시선이 들어있다. 너무 납작한 대상화가 아닌가. 네가 뭘 알아. 네가 뭔데 그렇게 판단해? 그걸 왜 너네가 구분하는데.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하는 욱하는 마음이 든다. 내가 억지로 업소에 끌려와서 빚을 지고, 가게에 묶여서 성착취 당하는 그런 창녀가 아니었으니까 자발적으로 일하게 된 거라고 해야 하는 건가? 다른 노동이었어도 자발과 비자발로 따져서 노동자가 노동하면서 겪는 낙인, 혐오로 인한 폭력, 노동자 권리침해의 문제를 노동자 탓 할 것인가? 이들이 권리를 박탈당해도 마땅하다고 말할 수 있나? 그게 정당한가? 이게 정당하지 않다면 성노동자를 향한 잣대도 정당하지 않다.
 
나는 비창녀들의 입맛대로 ‘불쌍한 성매매 피해자’도 되었다가, ‘몸 팔아서 쉽게 돈 버는 더러운 창녀’도 된다. 성노동자를 향한 이러한 타자화와 혐오가 성노동자가 죽었을 때도 고스란히 들러붙는다. 성노동자가 죽었을 때,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한 성매매 피해자로 피해자화되거나, 혹은 죽음조차 무시되고 묵인된다. 성노동자의 죽음은 원래 없었던 일인 것처럼 조용히 사라진다.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사람들은 일상을 보낸다. 나는 이런 세상을 원하지 않는다. 창녀가 죽었다고 조용한 세상을, 성노동자의 죽음을 접하고 잘 죽었다고 말하며 성노동자를 죽어 마땅한 사람으로 여기는 세상을, 성노동자의 삶이 존중받지 못하고 죽음마저 타자화되는 세상을 원하지 않는다. 창녀라는 이유로 많은 성노동자의 죽음은 제대로 추모받지 못하고 조각조각 흩어지고 잊혀져 왔다. 이제 흩어진 조각들을 모아 우리의 애도할 권리와 성노동자가 추모받을 권리를 말하고 싶다. 우리에게 애도할 권리를, 성노동자에게 추모받을 권리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