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노동 프로젝트/2020 성노동 프로젝트 제 3회 성노동X교차성

[2020 성노동 프로젝트 제 3회] 데파코트 : 창녀 페미니즘 선언문, 성노동자들에게 빵과 장미를

성노동자해방행동 주홍빛연대 차차 2020. 3. 11. 20:26

미리보기 : 성폭력이 일어난 공간에 성폭력 피해자가 가지 말아야 한다는 발언은 성폭력의 책임을 그 공간에 존재한 피해자에게 묻는 것이며, 피해자의 삶과 생활반경, 생계수단을 박탈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모든 여성주의적 윤리가 적용되지 않는 존재들이 있다. 바로 성노동자들이다. 성노동자는 여성인권을 떨어뜨리는 존재들이기 때문에 성폭력을 당해도 되고, 그들이 성노동자라는 이유만으로 성폭력 가해를 행하기도 한다. 여성주의적 윤리와 피해자중심주의는 비성노동자 여성이라는 특정한 계층에만 적용되는 계급적인 특권인 것이다. 이것은 단일한 범주로 여겨지는 여성들 안에서도 계급이 존재함을 반증한다.
데파코트 : 논바이너리 트랜스젠더퀴어 성노동자.  창녀 페미니즘과 트랜스 페미니즘을  생각하고 고민합니다. 흩어지고 부유하는,  횡단하는 몸의 역사를 증언합니다.

 

창녀 페미니즘 선언문 

성노동자들에게 빵과 장미를

데파코트

“성노동창녀들 심리 남자랑 존나 부비면서 돈도 벌 수 있고 계속 일하고 싶은데 몸 파는 년 소리 들으면 자존심 상하니까 어떻게든 더러운 일처럼 안 보이게 대단한 것처럼 6페미9하고 6성노동9으로 바꾸려고 하는 거 아님? 알바도 빡세게 일하면 200 정도 벌 수 있는데 그러기 싫으니까 몸 파는 거 아닌지”
“나는 성매매하는 여자들도 별창들도 포르노 배우도 다 사라졌으면 좋겠음 위에는 조폭이 관리하고 밑에서는 배 나오고 씻지도 않은 남자랑 섹스하는 인생 살 생각이면 정신 차려라 같은 맥락으로 트젠도 사라져라” 
“성매매 전도하는 년들은 한남고추 흡입으로 좀 혼쭐을 내줘야 함 니들 때문에 머가리 필터 완성도 떨어지는 한녀들이 성매매한다고ㅠㅜ” 
“야이 미친년아 어떻게 성노동잔데 페미냐 정신승리 작작해”
“??? 창녀가 사람임??? 창녀는 코로나 걸려서 뒤져도 됨”

 

1. 성노동자 권리 운동이란?

 성노동자 권리 운동은 위와 같은 성노동자에 대한 사회적인 낙인과 차별에 맞서, 성노동자도 존중받아야 할 존엄한 인간이며, 인간의 기본권인 노동권, 주거권, 이동권, 건강권, 직업 선택의 자유, 재판청구권, 사회적으로 차별당하지 않을 권리, 가족 구성권 등을 보장받아야 한다는 인권운동이다. 성노동자의 눈으로 바라본 세상에는 성노동자에 대한 차별과 혐오, 폭력이 난무했다. 내 몸을 강탈하고 침범하는 것은 단지 성구매자의 손만이 아니었다. 성노동자를 향한 낙인과 증오의 말들은 동의 없이 올려진 성구매자의 손처럼 내 몸 위에 얹혀졌다. 성매매를 삶의 이력으로 가진 나는 페미니스트가 될 수 없는 것인지, 나의 존재 자체가 여성혐오이고 여성인권을 낮추는 일이 것인지, 성매매를 한 이력이 있다는 이유로 사회운동의 참여를 금지당해야 하는 것인지, 나는 존엄한 존재가 아니라서 죽어도 되는 존재인지 이 세상에 내가 존재해도 되는 자리는 어디에도 없는 것 같았다. 나를 폭행하는 것은 성구매자가 행하는 물리적인 폭력뿐만이 아니라, 이 사회가 끊임없이 쏟아내고 재생산하는 차별, 혐오발언들이 성구매자와 더불어 내 몸을 폭행했다. 혐오는 존재를 죽음에 이르게 한다. 다른 성노동자들은 저러한 낙인과 혐오, 차별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견뎌내는 것인지 궁금했지만, 주위를 둘러봐도 그들의 말과 생각은 쉽사리 찾아볼 수 없었다. 

 성매매에 대해서 가장 먼저 찾을 수 있는 언어는 성노동 이론과 반성매매 이론의 언어였다. 반성매매 이론은 성매매가 여성에 대한 폭력이고 성착취이기 때문에 성매매가 없어져야 한다는 이론이고, 성노동 이론은 성노동이 다른 노동과 마찬가지로 돈을 받고 성적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성노동도 노동이라는 이론이었다. 사회적 낙인이 강하게 작동하는 계급들은 자신의 목소리로 자신이 당한 폭력을 말할 수 없다. 그들이 당하는 차별과 폭력이 차별과 폭력으로 사회에 받아들여지지 않기 때문이다. 차별과 혐오당하는 이들은 자신의 존재를 부정당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존재를 설명할 수 있는 언어조차 금지당한다. 성노동자들의 언어는 담론과 이론의 언어에 식민화당해있었다. 성노동 이론의 언어도, 반성매매 운동의 언어도 내가 겪는 현실과 현장을 제대로 포착해내지 못했다. 그 언어들이 성노동자들의 목소리에 참고문헌이 될지언정, 내 몸이 겪어내고 있는 시간들을 빗나가고 비껴갔다. 식민 통치자들의 언어로는 나의 삶을 왜곡 없이 설명할 수 없고 담아낼 수 없었다. 언어의 부재가 때로는 존재의 부재처럼 여겨지는 세상에서 나의 경험과 고통을 명명할 언어가 부재하다는 것은 외롭고 쓸쓸했다. 그건 마치 나의 경험과 고통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성노동자의 시간을 살아내는 것은 통증의 시간이었던 것과 동시에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언어를 발굴하고 발음하는 시간이었다. 

 

2. 우리의 존재는 허가제도, 신고제도 아니다 

 사회에서 승인하는 성매매 경험 당사자는 단 두 가지 종류밖에 없다. 비자발적으로 성매매에 유입된 감금 및 인신매매 피해 여성. 아니면 죽은 성노동자. 사회가 성폭력 피해자를 끊임없이 ‘순수한 진짜 피해자’와 ‘꽃뱀’으로 나누듯이 성매매 경험 당사자를 ‘비자발적 피해자’와 ‘자발적 성노동자’로 나누어 성매매 경험 당사자들을 서열화하고 재단한다. 이성애적 성관계 그 자체를 여성에 대한 폭력으로 규정하는 반성매매/탈성매매 이론은 성매매 당사자의 경험을 고정적이고 근원적인 무엇으로 본질화한다. 그러나 범주가 경전이나 종교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한 단선적이고, 단편적인 사유의 방식은 정형화된 특정한 틀 안으로 포획되지 않는 성매매 경험 당사자의 삶을 타자화하고 지운다. 성매매 피해자는 구제받아야 할 피해자로 승인되지만, 자발적 성노동자는 법으로 처벌받아야 하는 죄인, 범죄자로 규정된다. 성노동자를 성녀와 창녀로 서열화하는 이러한 이분법적 시각은 성매매 특별법이라는 법제도에 고스란히 녹아 스며들어있다. 성매매특별법에 의하면, 비자발적 피해자가 아닌 자발적으로 성매매를 한 사람은 1년 이하의 징역이나 300만 원 이하의 벌금·구류 또는 과료(科料)에 처한다. 이처럼 성노동자를 법적으로 처벌하는 것은 다른 직종으로의 이직은 힘들게 만드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성매매를 한 사람이라는 전과기록이 강력한 낙인으로 그의 삶에 찍힌다. 법적 처벌과 벌금은 여성단체가 지향하는 탈성매매를 더욱 요원하게 만드는 요인이기도 하다. 실제로 처벌금을 내기 위해 더욱이 성매매를 다시 해야 했다던 성노동자들의 증언은 여러 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 친 이들이, 더 나은 환경과 삶에 닿고자 부단히 노력한 이들이 왜 처벌당해야 하는지, 왜 범죄자가 되는 구조는 부정의하다. 왜 빈곤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빈곤한 삶을 단속하고 처벌하려고 하는가. 탈성매매를 해야만 당사자들의 인권을 조건부로 인정하는 행태는 인간 존재의 권리를 인질로 두고 벌이는 인질극이다. 성매매 경험 당사자들이 처한 사회경제적 환경과 빈곤에 대한 사유 없이 표면적인 행정조치인 단속과 처벌, 탈성매매만을 기계적으로 논하는 것은 무의미하며, 어떠한 대안도 될 수 없다. 탈성매매만을 성노동자의 유일한 미래로 제시하는 비성노동자 페미니스트들은 인권을 분할하는 분할통치, 분단의 정치를 반성하고 멈춰야 할 것이다.  

 

3. 존재의 집인, 언어를 찾아서

 나는 잠재적 범죄자이다. 삶을 지속하기 위해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원으로 통용되는 몸‘자원’을 팔았다는 이유로 언제든지 범죄 전과자가 될 수 있다. 성매매특별법은 참 이상하고 모순적인 법이다. ‘성매매피해자’ 의료지원을 통해 내가 산부인과 진료를 받을 수 있게 해 주면서도 동시에 나를 범법자로 만들기도 한다. 성매매피해자지원센터에서 의료지원을 받으려면 앞으로 성매매를 하지 않을 것 항목에 체크를 하고 서명해야 했다. 그 서명란이 서늘하게 다가온 것은 현장에서 계속 노동할 수밖에 있는 성노동자들은 의료적 지원이나 주거 지원으로부터 배제된다는 것을 은연중에 감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목에 무언가가 걸린 같은 갑갑한 기분에 상근자에게 ‘그럼 성매매하고 있는 사람들은 지원을 못 받는 거네요?’라는 말을 툭 건넸었다. 상근자는 당황하여 우물쭈물하며 꼭 그렇지마는 안다고 말 끝을 흐렸으나, 탈성매매한 자만을 지원의 대상으로 규정하는 성매매 피해자 지원제도, 생계를 포기하고 단념해야 비로소 지원체계 안으로 들어올 수 있는 피해자 지원제도는 실재하는 성노동자들의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게 했다. 성매매 경험 당사자를 성착취의 피해자로 규정하는 것을 운동의 전략으로 설정했다면 피해자에 대해 조건부 지원이 아닌, 포괄적이고 전면적인 지원을 실시했어야 한다. 반성매매 운동이 규정한 피해자상에 부합하는 피해자들만 선별적으로 조건부 지원하는 것은 피해자의 틀에서 벗어난 성노동자들을 지원제도로부터 배제하며 탈락시키는 것이다. 

 

“성매매 공간을 벗어나야 한다는 절대목표를 향해 여성들의 이야기를 짜깁기할 때, 성판매 여성의 권리는 성매매공간을 벗어났을 때에만 보장되는 권리이다. 그러나 성매매 공간에 있는 여성들의 삶 속에는 그곳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는 욕구와 더불어 지금 당장 착취받지 않고 안전하게 살고자 하는 현실적 필요가 존재한다.”

 

 성매매피해자지원센터에 가면 내가 겪은 시간을 해석할 수 있을까 싶어, 그곳에 방문했지만 돌아온 것은 있는 가정폭력 2차 가해, 인신공격이었다. 경제적으로 힘든 상황이었기 때문에 지원을 받지 못할까 봐 ‘가정폭력을 저지른 아빠도 피해자고 용서하고 이해해줘야 한다’ ‘그런 일 하고 친구들에게 부끄럽지 않냐’ ‘당당하면 다른 사람들에게 숨기지 말고 말해라’라는 상담원의 말에 문제제기를 하지 못했다. 가정폭력 2 차가 해와 인신공격을 견뎌서 겨우 의료비 지원과 심리상담 지원을 얻었다. 그리고 그것들로는 성산업 현장에서 빠져나갈 수 없었다. 성매매 경험 당사자가 지나온 시간은 단지 ‘부끄러운 것’으로 단순하게 일축될 수 없었다. 나는 부끄럽지 않았다. 성폭력 생존자가 피해자 다움을 강요받는 것처럼 부끄러움을 강요당했을 뿐이다. 사회에는 성노동 하는 것을 부끄럽고 수치스럽게 여겨야 한다는 주류적인 성도덕, 비주류적인 섹슈얼리티에 대한 금기가 보편화되어 있었다. 사회에서 문란함, 음란함, 헤픔, 몸을 막 굴린다 등으로 명명되는 불온함이 비도덕적이라는 주류 도덕에 동의할 수 없었다. 여성 편력이 많은 남자는 사회에서 능력 있는 남자로 취급되는 반면, 성경험이 많은 여성은 ‘걸레, 잘 대주는 년’ 등으로 멸시당한다. 왜 도덕이나 윤리관 같은 사회관습이 모두에게 평등하게 적용되지 않는가. 많은 남성과 잔 여성은 비도덕이고, 질 나쁜, 더러운 여성인가? 그런 보수적이고 성엄숙주의적인 시선이야말로 여성을 억압하고, 여성 혐오를 가능하게 하는 토대를 만든다. 정조관념과 순결 이데올로기는 성경험의 유무로 여성의 몸을 서열화하고 억압한다. 성매매 경험 당사자는 자신의 경험과 삶을 부끄러워해야 하는가? 나는 그런 사람이 성매매 피해자지원센터에서 일할 수 있고, 성매매 피해자들을 만나고 상담하는 상담원이라는 사실이 절망스러웠다. 그곳에서 얻은 나의 경험에 대한 해석은 성매매 경험당사자는 스스로를 부끄럽고 수치스럽게 여겨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한 관점은 나의 경험을 조금도 해독하지 못했다. 나의 미래에 관한 유일한 청사진으로 탈성매매만을 강압적으로 제시하는 자기 계발 프로젝트는 나의 삶의 역사를 존중하지 않고, 지우고 삭제하려고만 했다. 나의 존재를 부정하는 제도 권력에 나를 의탁해야 최소한의 지원이 승인되는 것은 비참한 일이었다. 

 성노동 이론도 성노동자의 경험을 단일화하거나, 성노동자들이 처한 현실적 조건들을 무시하는 언설들이 이론으로 제시되기도 했다. 성노동을 타자화의 방식 중 하나인 낭만화, 신성화를 통해 책의 소재, 재료로 소비했다. 성노동이 쾌락 생산이고, 예술이라는 주장은 현장의 성노동자들의 현실을 왜곡하고 낭만화하는 비윤리적인 해석 방식이다. 그 노동을 예술적인 일이라고 낭만화할 수 있는 사람은 그 현장에서 일해본 적 없는 사람밖에 없을 것이다. 동양을 신비로운 무언가로 상정하고 타자화하는 서양의 오리엔탈리즘 같았다. 그건 성노동자들의 현실과 너무나 괴리되어 있었다. 성노동을 하면서 성구매자로부터 내 몸을 침범당하고 약탈당하는 것은 전혀 예술이 아니었고, 쾌락도 아니었다. 성산업 현장에서 약속한 ‘성적 서비스’만을 선별적으로 팔 수 없다. 모든 종류의 자본주의 산업 안에서 노동자의 주체성, 자율성은 오롯히 보장될 수 없다. 업종별로 정해진 성적서비스 이외에도 그 수위를 넘어 내 몸에 대한 권리와 결정권을 침범당하고 약탈하는 일이 아주 쉽게 벌어졌다. 성폭력을 거부하면 창녀 주제에 비싸게 군다고 캔슬을 당해서 돈을 벌 수 없었다. 성폭력을 거절하면 임금이 주어지지 않는 열악한 노동환경 속에서 성적 자기 결정권은 주체적으로 행사하거나, 지킬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포기하고 단념해야 하는 것이었다. 성차별적이고 불평등한 성노동 현장에서 성적자기결정권은 행사될 수 없는 것이거나, 더 심한 성폭력을 방어하는 방식으로 극히 제한적으로 행사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런 현실 위에서 성노동이 예술이고 쾌락을 생산한다는 주장은 나의 노동에 대한 굉장히 질 나쁜 농담 혹은 조롱에 지나지 않았다. 그 이론은 성노동자의 현실에 대해 무지하거나, 외면해야 가능한 이론이었다. 성노동은 단 한 번도 나에게 쾌락을 생산한 적이 없다. 성노동뿐만이 아니라 모든 노동에 쾌락이나 즐거움, 보람이 담보되는 경우는 극소수일 것이다. 성노동은 두려움과 긴장의 연속이었다. 혹시나 아는 남자 지인이나 남성 친척, 남성 친권자가 손님으로 와서 내가 성노동자라는 것이 주변인들에게 유포되면 어떡하지 라는 두려움이 늘 마음 한구석에 자리하고 있었다. 아무리 섹스를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해도 나에게 무해하고 안전한 인간임이 검증되지 않은, 낯선 상대와의 섹스에서 쾌락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여성 애자인 내가 화폐 거래를 전제로 남성과 섹스하는 것은 쾌락과는 굉장히 멀리 떨어져 있는 행위이다. 

 성구매자들 또한 쾌락을 사기보다 타인의 신체를 내가 소유할 수 있다는 권력과 지배 욕구나, 여성의 몸을 단합의 도구로 이용하여 남성연대의 강화를 사는 것처럼 보였다. 성희롱, 성추행, 강간, 불법 촬영의 위험 속에서 이루어지는 노동을 예술적 행위라고 낭만화하는 것은 그 현장에 대한 무지와 외면만을 드러낼 뿐이다. 물론 모든 이론이 모든 이들에게 똑같이 적용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론을 생산할 수 있는 담론 생산 권력을 가진 이들이 타자의 생존을 연성의 도구나 소재로 소비하며 그들의 삶을 왜곡하거나 비틀어버리는 행동은 하지 말아야 한다. 나의 삶을 불쌍한 피해자라는 식으로 피해자 화하거나, 예술 노동이고 쾌락 생산노동이라고 낭만화하는 것 어느 쪽이든 당신들이 나를 규정하고 라벨링 하는 태도는 비윤리적이고 나이브하다. 

 이처럼 성매매/성노동에 관한 학자와 반성매매 활동가의 언어에는 접근할 수 있었지만, 정작 내가 정말로 만나고 싶고 마주하고 싶던 당사자들의 언어는 좀처럼 찾기 어려웠다. 왜 학자와 활동가의 언어만 있고, 당사자의 언어는 존재하지 않은 걸까? 2013년 안녕들하십니까 대자보 운동에 성판매 당사자의 <성판매 여성 안녕들 하십니까> 대자보와, 음란물 공유 금지 커뮤니티 규정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비공개 처리 되었던 성판매 당사자들이 자신의 경험을 말하는 페이스북 페이지 <성판매 여성들 안녕들 하십니까>, 여성문화이론연구소에서 나온 성판매 당사자의 목소리를 담은 <나도 말할 수 있는 사람이다>, 성노동자들의 인권과 존엄을 외치는 성노동자권리모임지지, 민주성노동자연대와 같은 성노동자권리운동 단체들의 활동들, 성매매에 유입되어 20년간 살아온 삶의 시간을 담대하고 용기 있게 쓴 <길 하나 건너면 벼랑 끝>, 용산집결지에서 성매매 경험 당사자들의 이웃이자, 집으로 함께 동행한 ‘막달레나의 집’에서 그들의 목소리를 담아낸 <경계의차이사이틈새>, <붉은 벨벳앨범 속의 여인들>, <판도라 사진 프로젝트>. 성노동자를 향한 낙인을 지워나가는 주홍빛연대 차차에서 진행하는 ‘성노동자 프로젝트’ 같은 당사자가 자신의 몸과 삶으로 써내려간 글들에서 비로소 나의 경험과 이어지고 만나는 언어들을 만날 수 있었다. 나를 이론이라는 고정된 틀에 끼워 넣어 납작하게 재단하고 단정하지 않는 말들, 수단이나 사례로서가 아닌 나의 경험을 명명하고 호명하는 말이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을 알았을 때 눈물이 나왔다. 

 

4. 성적 폭력, 성적학대를 당해도 되는 여성들, 존재들

 

“사회적 낙인에 의해 자신의 경험을 드러낼 수 없는 조건은 여성의 탈성매매를 어렵게 할 뿐 아니라 업주나 성산업에서의 착취적 관계에서조차 의존성을 높이는 조건으로 작동한다.”

 

 성노동자를 힘들고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들은 다양하다. 성노동자의 노동에 대한 정당한 대가가 돌아오지 않는 높은 중계수수료와 착취적인 노동환경, 사업장에서 발생하는 성폭력으로부터 제대로 보호받지 못하는 산업현장 외에도 ‘창녀는 범죄자이기 때문에 질병에 걸려도 치료받아서는 안 되고, 병에 걸려 죽어도 된다’고 말하는 등 성매매 경험 당사자에 대한 사회적 낙인과 혐오는 성매매 경험 당사자들을 죽음으로 내몰고 있다. 직장 내에서 성폭력을 당했을 때 성폭력 피해자에게 네가 직장에서 성폭력을 겪었으니 그 폭력의 공간에서 네가 퇴사해야 한다!라고 말하는 것은 반여성주의적이며, 성폭력 2차 가해가 될 수 있다. 성폭력이 일어난 공간에 성폭력 피해자가 가지 말아야 한다는 발언은 성폭력의 책임을 그 공간에 존재한 피해자에게 묻는 것이며, 피해자의 삶과 생활 반경, 생계수단을 박탈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모든 여성주의적 윤리가 적용되지 않는 존재들이 있다. 바로 성노동자들이다. 성노동자는 여성인권을 떨어뜨리는 존재들이기 때문에 성폭력을 당해도 되고, 그들이 성노동자라는 이유만으로 성폭력 가해를 행하기도 한다. 여성주의적 윤리와 피해자 중심주의는 비성노동자 여성이라는 특정한 계층에만 적용되는 계급적인 특권인 것이다. 이것은 단일한 범주로 여겨지는 여성들 안에서도 계급이 존재함을 반증한다. 비성노동자 여성은 성폭력을 당해서는 안 되고, 담론 안에서 성폭력 피해자로 존중 받을 수 있지만, 성노동자 여성은 여성주의적 윤리와 피해자중심주의 담론에서조차 소외당하고 배제된다. 사회는 비성노동자가 겪은 성폭력과, 성노동자가 겪은 성폭력을 서열화, 계급화하여 차별적으로 대우한다. 성노동자는 강간당해도 싸다, 이 말은 현재 한국사회 성노동자 인권의 현주소이다. 순수하고 무결한 피해자로 상정된 비성노동자 피해자가 겪은 성폭력에는 분노하지만, ‘순수한 피해자’가 아닌 ‘성노동자’가 겪은 성폭력에 대해서는 비웃거나, 잘 당했다고 부추기는 이상하고 분열적인 모습들. 나는 여성이 가진 사회적 계급에 따라 성폭력 피해를 서열화하고, 성폭력을 정당화하는 차별에 반대한다.  

 어떤 고통은 폭력이 행해지는 시간 이후에 시차를 가지고 뒤늦게 오기도 한다. 어떤 경험은 한 존재의 삶을 그 경험 이전과 이후로 나누기도 한다. 성노동을 시작한 이후, 성노동을 시작하기 이전부터 함께 했던 성폭력 생존자 자조모임에 나가는 일이 힘들어졌다. 내가 떳떳하지 못한 피해자가 된 것 같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다른 생존자들의 얼굴을 볼 때마다 나 같이 ‘깨끗하지 못한 더러운 창녀’가 이 자리에 함께 있어도 되는 것인지 죄책감이 들었다. 성노동을 자신의 역사로 가진 사람이 성폭력 생존자 자조모임에 있어서 자조모임의 의미를 훼손하고 다른 생존자들에게 피해를 주는 것은 아닌지 죄스럽고 미안했다. 창녀는 성폭력 피해자가 될 수 없고, 페미니스트가 될 수 없고, 권리 운동의 정치적 주체가 될 수 없다는 사회적 편견을 스스로 내면화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단지 나 개인 혼자만이 겪는 감정적 격랑과 파동일까. 나는 내 안에 고이고 응어리진 깊이와 앙금들을 증언해야 했다. 나의 경험이 제3자에 의해 일방적으로 규정되거나, 부끄럽고 수치스러워해야 할 일로 치부되는 것이 아닌, 나의 목소리로 말하고 싶었다. 사람들은 성노동자도 말할 줄 알고, 생각할 줄 아는 나와 동등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너무 쉬이 망각한다. 누군가 자신을 성노동자라고 밝히면 낯선 그에게 동의를 구하지 않고 함부로 말을 걸어도 되고, 허락을 구하지 않고 맨스 플레인을 해도 되는 자격이 생기는 것처럼 군다. 내가 성노동자 당사자로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자, 그 위로 노골적인 혐오와 반감이 쏟아졌다. 그것은 마치 흡사 내가 성폭력 생존자로 처음 말하기 시작했을 때 쏟아졌던 세상의 반응과 똑같았다. 내가 겪은 성산업 현장에 대해 증언했을 뿐인데 성구매자나 성산업을 옹호한다거나, 다른 여성을 성산업으로 끌어들인다고 매도당했다. 그 말은 성폭력을 증언했을 때 남녀 갈등을 부추기고 남성 혐오를 조장한다고 들었던 터무니없는 비난과 너무나 유사했다. 성폭력을 증언하는 것이 어떻게 갈등을 부추기며, 혐오를 조장하는 행위가 되는가? 이는 성폭력 생존자의 목소리를 사회에서 지우고 은폐함으로써 이익을 얻는 특정 이익집단의 이해일뿐이다. 성매매 경험 당사자가 자신의 겪는 삶과 현장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증언하는 것을 어떻게 성산업에 대한 옹호라고 매도할 수 있는가? 이는 성매매 경험 당사자들의 목소리를 사회와 분리시키고 추방시킴으로써 이익을 얻는 이익집단의 편현한 이해일뿐이다. 당장 성산업 현장에서 벗어날 수 없는 성노동자들이 건강권과 안전을 위해 질병예방법과 피임도구 정보들을 공유하자, 그것을 성매매를 부추기는 행위라고 비난하며, 성노동자들의 존재와 목소리를 지우고 은폐하는 데에만 급급했다. 

 

5. 집결지 강제철거는 성노동자의 생존을 철거하는 국가폭력이다

 

 성매매특별법을 제정할 당시 성매매특별법제정 반대 집회를 벌이며 저항하던 성노동자들의 행동에 주류 여성계는 당혹감, 혼란스러움, 그를 넘어선 분노 비슷한 감정을 표했다. ‘우린 당신들의 인권 향상을 위한 법을 제정하려고 노력한 것인데 왜 그것을 반대하는 거지?’ ‘성매매경험 당사자들이 포주들의 조종을 당해서 동원된 것이다’ 이러한 발화들을 통해 비성노동자 여성주의자들이 성노동자를 ‘계몽해야 할 무지하고 어리석은 대중’으로 규정하는 시선을 엿볼 수 있었다. 여성들이 성매매로 유입되는 커다란 요인 중 하나는 빈곤이다. 여성들이 겪는 고용 불안정과 성별 임금격차, 경력단절, 유리천장 등 여성을 구조적, 제도적으로 빈곤으로 내모는 근본적인 원인들을 되돌아보고 수정하지 않고서는 성매매 문제는 해결될 수 없다. 명품백을 사기 위해 성매매를 한다는 대다수 한국 남성의 여성 혐오적 편견과는 달리 성산업 현장에서 만난 많은 언니들은 가족을 홀로 부양하는 가장이거나 가정폭력, 성폭력의 피해자들이었다. 한부모 가족의 가장으로 돌봄 노동과 가사노동, 일터 노동이라는 이중의 노동을 혼자 수행해야 하는 여성에게 사회는 충분한 지원과 일자리를 제공해주었는가? 가정폭력 피해자들에게 폭력을 행하는 가해자들을 제대로 처벌하고, 가해자와 피해자를 분리 조치하여 머무를 수 있는 주거지원과 법적 보호자 없이도 생계를 꾸릴 수 있는 경제적 지원이 충분히 제공되고 있는가? 공공사회복지가 사회적 약자, 폭력 피해자들을 보호하지 않는다면 이들의 삶은 점점 더 막다른 사각지대로 내몰릴 수밖에 없다.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법을 지키며 합법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다. 법 자체가 권력을 가진 이들을 중심으로 구획되었기 때문이다. 돈이 있는 사람은 생필품을 굳이 훔치지 않아도 돈을 주고 구매할 수 있다. 돈이 있어야 자원에 접근할 수 있는 사회구조는 어떤 이들을 불법 인간으로 만들까. 합법적인 삶은 지배계급에게나 허락된 것이다. 이성애자들에게 동성혼 법제화는 절실하고 절박한 의제가 아니다. 그렇듯 성매매경험 당사자를 범죄화하는 성매매특별법은 비성노동자 여성주의자들의 삶에 아무런 생계의 위협이나 지장을 초래하지 않는다. 그러나 성노동자 계급에 속한 여성들에게 성매매특별법은 생존권, 노동권, 주거권 등 인간이 지닌 보편 인권에 대한 중대한 침해이다. 성특법으로 인해 성노동자들의 생계, 생존, 삶, 존재는 불법의 영역 속에 존재한다. 법적인 문제가 삶에서 발생했을 때 법적 지식과 법률적 지원을 해줄 수 있는 전문 인력에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접근할 수 있을까? 왜 성매매를 하는지 묻기 이전에 왜 누군가의 생존이 불법인지 먼저 질문해야 하지 않는지. 왜 성노동자의 존재는 악이고, 죄라고 선결적으로 규정되는가. 성매매 경험 당사자를 범죄자로 규정한 법제도는 여성에 대한 폭력이자, 빈곤한 이들에 대한 폭력이다. 성매매 경험 당사자를 범죄자로 규정하는 법은 인간이라면 마땅히 받아야 할 가장 기본적인 기본권조차 박탈시킨다. 

 인천시 도시기획위원회는 도시환경정비를 명목으로 성매매 집결지 옐로 하우스 철거를 결정했다. 이에 옐로우하우스의 성노동자들은 강제철거에 맞서 천막농성투쟁을 진행하였다. 2020년 2월 14일 법원은 불법 명도소송에 관해 ‘(성노동자들의) 실질적인 임대차 생활은 인정하나, 성매매특별법에 따라 피고인들이 '성매매'에 가담해 임대차법은 무효이다’라는 판결을 내렸다. 이 같은 판결은 현행법제도의 모순과 한계를 명확히 보여준다. 공장에서 산재가 발생했다고 사업주만 처벌하는 것이 아니라 산재를 입은 노동자까지 함께 처벌하는 꼴이다. 법의 원래 취지대로라면 현 성산업 체제의 수혜자인 성구매자들와 성산업 자본가, 성착취자들을 처벌해야 할 법 제도가 도리어 그들에게 착취당하는 노동자를 처벌하고 성노동자에 대한 낙인을 강화하고 징벌하는 도구로 이용되고 있다. 옐로우 하우스는 성노동자들이 오랫동안 생활해온 생업의 공간이자, 삶의 터전이었으나 그들의 직업이 성노동자라는 이유로 주거권과 생존권, 노동권을 ‘합법적으로’ 박탈했다. 이 같은 부당한 폭력을 당해도 성노동자는 범죄자의 신분이기 때문에 법의 보호를 받을 수 없으며, 오히려 법의 차별과 처벌의 대상이 된다. 그들에게 죄가 있다면 그것은 살아온 죄, 존재해온 죄, 삶을 위해 하루하루 고군분투해온 죄밖에 없다. 여성, 빈곤한 이들의 생존을 불법화하는 악법이 하루빨리 개정되었으면 좋겠다. 

 

6. 노동자에게 빵과 장미를 

 

“우리로서는 외치면 외칠수록 더 고통이야. 겉으로 막 근절하니 어쩌니 그러지만 근절이 되냐고. 경찰이 와서 뭔가를 하지만 그때부터 우리는 지하실로 밖으로, 한 시간 동안 일 못하고 숨어 있다가 낮에 그 한 시간을 더 일해야 돼. 우리만 더 이중 삼중으로 고통받잖아. 도움을 줄 거면 현실적인 것부터 해달라는 거지. 쉼터라도 (성매매를) 꼭 끝내고 와서 사는 게 아니고, 끝내기 전이라도 왔다 갔다 할 수 있는 이런 집이 있다든가.. 무조건 그만두고 와서 살아라, 하는 건 너무 단순한 거지.”

 

 노동자들을 탄압하고 노동운동을 탄압하는 것으로는 착취적인 산업구조를 바꿀 수 없다. 도대체 그 어떤 사회운동이 착취적인 산업을 해체하고자 그 산업에서 착취당하는 노동자들을 인격적으로 모독하고 인신공격하는가? 이는 공장을 없애고자 공장 노동자들을 욕하고 비난하는 것과 다름없다. 사회적으로 멸시받고 천대당하는 직업들이 빈곤한 사람들로 채워지는 현상에 대해 빈곤한 사람들을 모욕하고 비난하는 행위에는 그들이 혐오당했다는 것 외에는 아무런 변화도 가져오지 못한다. 성노동자 개개인이 지닌 삶의 맥락과 환경은 모조리 무시한 채 성매매 근절이라는 저 높은 구름 위의 이상에 대해서 이론적으로 늘어놓는 것은 생존을 포기하라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우리의 생존과 존엄을 지키고자 노동한다. 성매매 근절을 논하기 전에 먼저 우리가 보지를 팔지 않아도 생존과 존엄을 지킬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 달라. 성노동자를 박살 낼 것이 아니라, 거리에서 자다가 돈 안 받고 강간당하는 것보다 차라리 돈 받고 강간당하는 게 낫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세상을 박살 내달라. 인신매매, 감금의 피해자가 아닌 성노동자가 원하는 것은 성매매로부터의 구원, 탈주가 아니라 안전하고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존중을 받을 수 있는 노동환경이다. 방에 들어가는 시간 외에도 출근해서 대기하는 대기시간 또한 엄연한 노동의 시간이며 이러한 노동시간에 대한 정당한 노동의 대가가 책정되어야 한다. 꾸밈 노동에 소요되는 화장품 값, 업장의 유니폼인 홀복 값을 사업장에서 지원해주어야 한다. 업장의 노동을 하는 과정에서 사용되는 비품에 대해서 노동자에게 사용비를 부과하는 것은 엄연한 착취이다. 지각비, 생리/임신 중단 수술/질병으로 인한 결근비를 폐지하고 노동으로 인해 오는 신체적, 정신적 상해를 산재로 인정하고 보상하라. 성노동자의 세입자로서의 권리를 인정하라. 업주나 손님으로부터 성희롱과 성폭력을 당했을 때 산재처리를 할 수 있기를 원한다. 성폭력을 당했을 때 꽃뱀 취급당하지 않고, 성폭력 2차가해를 당하지 않고 법적 절차를 밟을 수 있기를 원한다. 포괄적인 차별금지법에 성노동자에 대한 차별의 금지도 명시해달라. 원치 않는 성적 언동, 원치 않는 신체접촉을 거부할 수 있는 권리가 성노동자들에게도 주어지기를 간절히 원한다. 

 

7. 우리는 자격 없는 존재들과 세상을 바꾼다 

 

 우리는 창녀 때문에 여성인권이 하락하기 때문에 창녀라는 존재를 이 세상에서 삭제하고 박멸해야 한다는 당신들의 이기적이고 배타적인 이념, 대의의 정물이 아니다. 인간 존재를 앞선 대의는 전체주의 일뿐이다. 나는 순결한 성녀가 되는 일에 관심 없다. 순결함이나 순수함으로 선망받는 그런 성녀 됨의 경쟁대열 속으로 들어가고 싶지 않다. 고작 ‘창녀 취급’ 당하는 것이 싫다는 이유로 여성의 범주에서 ‘창녀’를 삭제하려는 성녀됨의 노력에 동원되고 싶지 않다. 사람들은 순결과 순수함의 대척점의 자리에 거주하는 우리를 범죄자, 더러운 년, 걸레, 육변기라고 부른다. 이때 더러움이란 단순히 물리적인 더러움이 아니라 정치적인 가치판단이 개입된 혐오 도구로서의 선동구호이다. 우리의 존재는 불법이고, 존재만으로 범죄자라고 손가락질받는다. 이러한 혐오에 대해 성노동자 혐오를 하지 말라고 하면, 사람들은 성매매를 옹호한다고 매도한다. 성매매 경험 당사자가 사회적으로 차별받거나 혐오당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 성매매를 옹호한다고 호도된다. 나는 그것이 자신의 혐오 정치를 위한 전략적이고 고의적인 오독이라고 생각한다. 성매매경험 당사자가 동등한 인간으로 존중받아야 한다는 것과 성산업을 옹호하는 것이 다른 층위에 속해있다는 사실을 은연중에 이미 알고 있음에도 성노동자의 존재와 목소리가 사회의 수면 위로 가시화되지 못하도록 그들의 존재의 자리를 지우는 것이다. 평생 성노동을 하지 않아도 되는 ‘깨끗할 수 있는 삶’만 ‘선택’할 수 있었던 그네들은 더럽혀지지 않아도, 더러워지지 않아도 생존할 수 있는 특권 위에서 발화한다. 내가 속할 리 없는, 차별당하는 계급을 한껏 혐오하고 타자화할 수 있는 특권. 성폭력은 여자 잘못도 있다고 말하는 남성처럼, 뇌가 좆물에 푹 절여져서 성매매한다고 말할 수 있는 그 특권적 무지, 특권적인 무지로 행사하는 폭력. 여성이 인간이 열등한 증거로 통용되던 시절처럼, 창녀가 여성이 열등한 증거로 채택되는 혐오의 시대를 우리들은 온몸으로 통과하고 있다. 

 성노동자의 인권이 고려되지 않는 기계적 성매매 근절론은 비성노동자계급 여성들의 이해이다. 우리의 요구는 우리의 생존을 파괴하는 정리해고나 실업이 아니다. 인신매매를 당하지 않은 성노동자는 범죄자로 규정된다. 우리의 자유는 죄가 된다. 우리가 처벌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은 인신매매를 당하는 것 이외에는 방법이 없다. 성노동자의 사회복귀는 탈성매매를 통해서가 아니라, 성노동자에 대한 사회적 차별 철폐, 사회적 인식 변화를 통해서 비로소 이루어질 수 있다. 나는 내가 주류적 섹슈얼리티 체제에 속해있지 않다는 사실이 부끄럽지 않다. 나는 나의 더러움이 자랑스럽다. 나의 더러움에 긍지를 느낀다. 몸에 재와 녹을 묻힌 인간도 인간이다. 우리도 인간이고, 우리도 노동자다. 나는 당신들이 나의 더러움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에 분노하고 격분하기 바란다. 부끄러워해야 할 것은 내가 아니라 당신들인 것 같다. 창녀가 여성의 수치이자, 당신의 존엄에 대한 모욕이라고 여기는, 간절히 성녀이기를 바라는 여성들이 창녀와 성녀의 이분법을 두려워하지 않는 창녀를 보고 분노와 수치를 느끼길 바란다. 당신들의 성녀되기 계급구획의 도구로 성노동자를 동원하지 말라. 성녀와 창녀 이분법은, 내가 창녀라는 사실은 나의 존엄을 지울 수 없다. 

 감히 성노동자가 탈성매매를 하지 않은 채 스스로의 존엄과 프라이드를 외치고 안전함과 존중을 이야기하다니. 사람들은 우리가 탈성매매를 하지 않고서 존엄과 인권을 말하면 경악하며 돌을 들어 던진다. ‘전형적인 피해자의 모습’처럼 선전에 동원할 수 있게 불행하고 비참해야 하는데 피해자답지 못하게 스스로에게 긍지를 느끼는 존재를 잘라내기 위해, 입을 틀어막고 목을 조르고 싶어 한다. 한 래디컬 페미니스트는 탈성매매한 ‘성판매여성’에 한해서만 연대를 한다고 밝힌바 있다. 탈성매매 여부로 피해자와 피해자 아님을 나누는 납작한 태도에 웃음이 나왔다. 성노동을 하지 않아도 되는 자신의 계급적 위치와 지위를 근거로 성노동자에 대한 혐오를 정당화한다면, 성노동을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은 당신의 선택의 결과가 아니라, 당신의 특권과 권력의 결과라는 사실을 인지하기 바란다. 여성의 존재와 행위를 평가하고 점수를 매기는 배제적 운동 전략을 거부하며, 우리는 여성의 존재와 행위를 평가하고 채점하여 여성 간 계급제를 공고히 하는 체제 순응적이고 반동적인 운동에 균열을 가할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112년 전인 1908년 3월 8일, 여성노동자들이 거리로 나와 외쳤다. ‘우리에게 빵과 장미를 달라!’ 이 행렬은 열악한 노동현장에서 발생한 화재로 인해 사망한 섬유공장의 여성노동자를 추모하는 집회였다. 그들이 외친 빵은 생존권을, 장미는 인간답게 살 존엄을 의미한다. 그때로부터 112년이 지난 지금, 여성노동자들의 투쟁정신을 이어받아 선언한다. 성노동자들에게 빵과 장미를, 생계를 영위해나갈 생존권과 인간답게 살아갈 권리를 달라. 성노동자도 존엄한 인간이다. 우리는 자격 없는 존재들과 세상을 바꿀 것이다. #우리는_자격_없는_여성들과_세상을_바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