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노동 프로젝트/2019 성노동 프로젝트 제 1회 성노동 글쓰기

[2019 성노동 프로젝트 제 1회] 유자 : 구조님, 선생님을 팰 테니까 안에서 잠시 나와주시겠습니까?

성노동자해방행동 주홍빛연대 차차 2019. 9. 9. 18:02

구조님, 선생님을 팰 테니까 안에서 잠시 나와주시겠습니까? 

유자

 

 

사람들이 종종 잊어버리는 사실이 있다.

 

인류는 아직도 생존을 위해 목숨을 걸어야 하며, 민주주의 국가의 복지가 누구에게나 제공되지는 않는 동시에 모두에게 충분하지도 않다는 사실은 쉽게 부정당한다. 우리가 생존을 위해 나뭇가지를 비벼 불을 때거나 열매 채집을 하지는 않더라도 우리 모두는 자본주의 아래에서 생존하려 발버둥 치고 있다. 우리는 배부르게 밥을 먹고, 적당한 온도에서 잠에 들 수 있으며, 품위를 유지할 수 있는 옷을 공급받을 수 있는 환경을 갖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한다. 이 글을 읽는 당신에게 한 가지 당부를 하고자 한다. 이 글의 주체 혹은 객체에 당신을 대입하지 말라. 당신이 만약 하루 세 끼를 당연하게 먹든, 여름옷과 겨울옷이 옷장에 걸려있다고 한들 이것을 남들에게 기대하지 말라. 당신의 그 작은 착각은 내 글을 아주 쉽게 오독할 수 있게 만든다.


안타깝지만, 세상에는 하늘을 나는 빗자루도, 숨겨진 마법능력도, 나를 이 현실에서 도망치게 해 줄 특별한 세계도 없다. 세상은 판타지가 아니다. 우리는 밥을 벌어먹고 살기 위해 돈을 벌어야 한다. 물을 끓여 줄 마법지팡이가 없으니 전기포트를 사용하기 위해 전기세를 내야 할 것 아닌가. 우리는 돈이 필요하다. 돈을 벌어야만 한다. 편의점 알바를 하든, 남을 가르치든, 돈을 쌤쳐서든. 하지만 우리가 정말 굶어 뒤지는 한이 있더라도 하면 안 되는 일이 하나 있다. 바로 몸을 파는 짓, 그러니까 창녀 짓은 죽어도 하면 안 된다고들 한다. 더럽고, 사회악이고,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하면 안 되는 짓이니까. 심지어 그 짓거리는 여성들의 권리를 낮추는 ‘페이강간’이 아닌가. 나는 당신이 이 앞 문장에서 무언가 이상함을 느끼길 바란다. 아무리 성노동자의 노동에 대해 모른다고 해도 ‘여성의 행동’ 이 ‘여성의 권리’를 낮추는 ‘더러운 일’ 이라는 단어의 조합에서 이상함을 느끼길 바란다. 어떻게 여성이 여성의 권리를 낮출 수 있겠는가. 이 조합은 자연스럽게 느껴질 수 있지만 본질적으로 여성인권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성매매 산업은 여성이 성적 서비스 공급자로, 남성이 성적 서비스 수요자로 형성되어 있으며, 성적 서비스를 제공받은 대가로 금전 거래가 이루어진다. 이 과정에서 남녀 불평등의 권력관계가 그대로 답습됨을 부정하지는 않겠다. 고급 콜걸, 노래방 도우미, 원조교제, 조건 만남, 하다못해 아이돌까지 모든 섹슈얼리티를 제공하는 산업 종사자들은 다른 분야의 노동자들보다 노골적인 정신적, 경제적 이중 착취에 노출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성노동자들은 성노동에 종사하는가. 당연히 생존을 위해서다. 모든 여성의 목적이 그렇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지만 대부분의 목적이 ‘돈’임은 당연한 사실이다. ‘돈’은 우리를 생존할 수 있도록 만든다. 돈이 필요하면 편의점 알바를 하면 되지! 당신은 그래도 되겠지. 내 당부를 잊지 말라. 이 글의 주체 혹은 객체에 당신을 대입하지 말라. 누구에게나 편의점 알바의 기회가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장애인이 그렇고, 청소년이 그렇고, 성소수자가 그렇다. 보통의 사람들은 성노동자를 성매매 산업에서 꺼내어서 그들의 삶을 구원하고 싶어한다. 하지만 그들은 성매매 산업에서 나온 이후의 삶을 책임지지는 않는다. 그들의 월세를 책임지지 않고, 그들의 삼시세끼를 책임지지 않는다. 여기서 다시 묻겠다. 당신은 성노동자의 생존에 대해 생각해본 적 있는가?


성노동은 노동이고 생존을 위한 생계수단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지금껏 성매매는 성욕을 주체하지 못한 남성들과 편하게 돈 벌어서 사치하려 하는 나태한 여성들, 혹은 ‘성’을 빼앗긴 가련한 여성 간의 비도덕적인 조합으로 여겨져 왔다. 만약 정말로 그렇다면 남성들을 억압하는 것으로 성매매는 충분히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전세계적으로 그런 시도가 이뤄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실패하고 있는 현실은 우리가 더 멀리 봐야함을 시사하고 있다. 성매매라는 산업이 계속해서 유지되고 작동할 수 있도록 하는 경제적 메커니즘의 정체는 무엇인가? 역시나 ‘생존’이다. 우리에게 쉽게 잊혀지는 존재들, 그러니까 맞고 살아가는 어린이들, 가정폭력에서 도망친 여성들, 고립된 성소수자들, 생존수단이 결여된 장애인들이 어떻게 살아갈 수 있는지 생각해보라. 아주 잠깐의 동정을 받은 뒤 우리에게서 지워지는 그들은 그 어떠한 도움도 받을 수 없다. 그들이 다른 이들과 동등한 삶을 살아갈 수 있으리란 나이브한 착각은 하지 않길 바란다. 이들은 모두 사회구조에서 배제된 존재들이다. 이들은 편의점 알바를 할 수 없고, 국가의 복지혜택을 받을 수 없고, 남들도 이정도는 산다는 착각에 의해 잠깐의 동정을 받고서는 금새 고립되는 존재들이다. 편의점알바로 생계를 이어나갈 수 있다는, 그 돈으로 가끔은 영화를 보고 외식을 할 수 있는, 아주 미약한 최저선조차 없는 이들은 어떻게 살아야 옳을까, 또 어떻게 잘 살아갈 수 있을까? 이들의 삶은 현실이고, 고립된 자들이 모두 그렇듯 생존을 위한 마지막 수단을 선택하기 마련일 것이다. 성매매는 결국 고립된 자들-그러니까 최저선이 저 밑바닥인 사람들-에게 남은 유일한 생존수단이다. 성매매에 대한 억압은 이들의 삶을 다시 깎아들어간다. 사치스러운 삶을 살아가며 게을러서 최소한의 노동만 하고 싶어할 것이라는 프레임은 이들이 수많은 폭력에 노출되어 살아가는 현실을 지운다. 그들이 바랄 수 있는 연대는 여성들의 권리를 깎아내린다는 주장에 의해 사라지고 있다. 성매매 산업에서의 여성착취는 성노동자를 대하는 사회구조의 모순과 억압과 성노동자에 대한 프레임의 재생산 때문이지 성노동자 자체가 원인이 될 수 없다. 여성에 대한 억압의 이유가 여성에 대한 사회구조의 억압과 이에 따른 프레임 생산인 것과 다름이 없다.


당신은 이 글이 감정에 호소하고 있으며 성매매가 여성의 성 상품화에 일조하고 있다는 현실을 외면하고 있다고 느낄지도 모른다. 여성의 성 상품화 또한 여성에 대한 프레임-여성이 원하며, 여성은 실제로 그렇다는 착각과 여성의 신체 섹슈얼화-이 원인이다. 그러나 이 프레임에 의해 가장 먼저 고통받는 존재들 또한 성노동자들이다. 이 프레임에 의해 성노동자는 수많은 강간과 살해 위협에 노출되어 왔다. 실제로 이루어지는 이 폭력들은 사회주도적으로 지워지고 있다. 결국 성노동자의 생존은 이렇게 지워진다. 성노동자를 둘러싼 수많은 프레임은 우리가 그들을 외면하도록 만든다. 당신은 아직도 성매매를 금지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가? 그렇다면 성매매를 금지하고서도 성노동자의 생존을 보장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인가? 아니면 성노동자의 생존은 필요없다고 생각하는 것인가? 전자라면 제발 그 방법 좀 알려달라. 만약 후자라면, 최소한 성매매를 금지하자는 무책임한 말이라도 그만두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