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노동 프로젝트/2020 성노동 프로젝트 제 4회 코로나 시대의 성노동

[2020 성노동 프로젝트 제 4회] 쟁뉴 : 왜 성노동자에게는 그렇게 말하는가

성노동자해방행동 주홍빛연대 차차 2020. 9. 26. 15:35

왜 성노동자에게는 그렇게 말하는가, 쟁뉴

왜 성노동자에게는 그렇게 말하는가

쟁뉴

 

1. 특수화, 이중잣대

 

 특수화하는 것은 무언가를 부정하는데 아주 손쉬운 접근법이다. 여자는 특수해. 남자와 달라. 여자는 이러이러한 존재야. 너는 유별나고 특이한 존재이며, “정상”이 아니야. 그리고 그 기술(記述)은 곧장 모순에 부딪힌다.

-여성은 흔히 머리가 비어 있고 남자에게 들러붙어 명품 타령을 하는 존재이지만, 경쟁 상대가 되는 순간 꼼꼼하고 독한 최악의 상대다. 

-여자는 순결을 지켜야 하지만 나에게는 다리를 벌려줘야 한다. 

-여자는 나의 섹스 상대지만 내 딸은 외박조차 하면 안 된다. 

-여자들은 밥보다 비싼 커피에 돈을 쏟아붓는 멍청한 존재지만 밥은 내가 사고 여자는 고작 커피나 사는 것은 수지가 맞지 않는다. 

-트랜스젠더는 감쪽같이 여자화장실에 들어가 여자를 강간하는 존재이지만 동시에 딱 봐도 티가 나고, 털이 부숭부숭 나 있으며, 고추가 툭 튀어나와 있다. 그렇게까지 티가 나는데 대체 어디가 감쪽같았을까? 

-게이는 여자 같고 끼 부리는 변태 같은 남자지만 동시에 게이는 모든 남자를 강간하는 힘세고 강력한 존재다.

 이뿐만이 아니다. 여성은 흔히 고통에 더 민감하고 남성은 상대적으로 무디다고 여겨진다. 때문에 의학에서 여성의 고통은 집중할 ‘필요 없는’ 것, ‘엄살’로 치부되고 남성의 고통은 ‘유념해야 하는’, ‘중요한’ 것으로 치부된다. 그 과묵한 남성이 얼마나 아프면 고통을 호소하겠는가? 결과적으로 고통을 호소하는 여성에게는 진통제가 덜 처방된다. 어차피 엄살일 테니까.

 인종 이슈로 가볼까? 흑인은 다른 인종보다 고통에 더 무디고 강한 신체를 가졌다는 선입견이 있다. 그런데 흑인에게도 진통제를 덜 처방한다. 고통에 무딘 존재에게 진통제를 덜 처방한다는 논리라면 남성에게는 왜 진통제를 그렇게 잘 주는 것일까? 왜 동일한 이유로 정반대의 진단을 받는 걸까?깊게 생각하지 않고 원하는 대로 배열한 원하는 단면들. 그 성의 없는 전시에도 사람들은 따라오고, 피해자들이 해명하는 데는 수도 없는 근거가 요구된다. 그렇게 소수자가 묘사되는 과정에서 많은 이중잣대가 가해진다. 이런 특수화와 이중잣대는 성노동자를 묘사하는 데 어떤 영향을 미칠까?

 

2. “성노동은 노동이 아니다.” 그 근거는… 

 

(1) “성노동자는 게으르다.” 성노동자들은 노력에 비해 돈을 과도하게 벌고 다른 “보통” 노동을 할 생각은 않고 쉽게 돈을 번다고 추정하여 게으르다는 말이 나오는 것 같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력에 비해 돈을 과도하게 버는 것은 미덕이 아니었나? 건물주가 꿈이라는 농담과 주식 대박, 수년 전 생각 없이 사둔 비트코인으로 인한 부의 축적, 복권 당첨에 대한 욕망이 긍정되는 세상에서 어째서 이것이 비난 대상인지 모르겠다. 뿐만 아니라  “성노동은 사람을 피폐하게 한다”는 식의 기술은 게으르고 쉬운 직업이라는 이미지와 모순된다.

(2) 성노동이 얼마나 피폐하고 악랄한 것인지에 대한 “걱정”이 있다. 자살률 운운부터 모든 성노동을 강간으로 묘사하는 것, 성노동을 착취라고 부르는 것 등등. 자살률이 가장 높은 직업 순위에서 절대 빠지지 않는 직업이 있다. 의사다(Doctors' Suicide Rate Highest of Any Profession, Pauline Anderson, WebMD, 2018). 하지만 의사에게는 자살률이 높기 때문에 이들의 노동을 직업이 아니라고 하지 않는다. 

(3) 감정노동이 과하다는 말은 각종 서비스직에도 적용된다.

(4) 착취적인 구조는 비정규직의 노동구조에서도 이야기할 수 있는 부분이다. 아니, 어지간한 노동에서 다 이야기할 수 있다. 육체노동을 파는 직업은 수없이 많다. 운동선수, 아이돌, 프로게이머 등도 나이를 먹을수록 능력을 인정받지 못하고 물건 취급을 당하며 가치가 떨어지는 직업이다. 특히 프로게이머는 군대만 다녀와도 손이 굳어 은퇴를 권유받는다. 많은 비정규직 노동자는 정규직으로 전환되기보다 다른, 새로운, 저렴한 노동자로 대체되기만 한다. 대기업에 들어가면 5년 동안 뽑아먹고 버린다는 농담이 돌고, 승진 경쟁에서 지면 “유능하고 경험 많은” 그들은 회사를 떠난다. 

(5) ”성구매 경험자는 일상에서도 여성을 보고 ‘쟤는 얼마짜리’라는 식으로 가격을 매기곤 한다.” 그것이 성노동이 노동이 아닐 근거가 되는가? 노동시장에서 노동자가 수치로 취급받는 상황과 별반 다르지 않다. 저임금 노동자가 멸시받는 분위기와 그렇게 다르지 않다. 

(6) 성노동의 자발성을 강조하며 비자발적 성노동은 인정한다는 이들은, 세상 모든 사람들이 꿈과 희망과 원대한 야망을 가지고 직업을 선택한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7) 어느 노동이 업무를 봤을 뿐인데 임신에 이르냐고? 원래 육체노동을 하다 정해둔 안전장치를 벗어던지면 상해를 입고 사망에 이르기도 하는 법이다. 콘돔을 끼지 않은 삽입 섹스는 안전기구를 착용하지 않은 채 공사장에서 일하는 것과 같은 상황이지 않나? 

 

 성노동에 대한 비난을 보다 보면 이 사람들은 어째서 ‘직업’을 가지고 있는지, 혹은 가지고 싶어 하는지 모르겠다. 이들의 비난 지점은 이미 다른 직업에도 적용되며, 이런 부정은 그저 악의와 자기모순만을 담고 있을 뿐이다. 단 하나의 유효한 근거가 없이 모든 것이 이중잣대로 가득 차 있다. 이 이중잣대를 조금만 더 살펴보면, 성노동에 가해지는 잣대들이 사실은 대부분 여성에게 가해지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노력하지 않음에 대한 비난은 가정주부를 “놀고먹으며 애나 보는” 것으로 표현하는 것과 닮았다. 쉬운 인생은 찬양의 대상이지만 여성의 인생은 아니다. 여성의 고통은 항상 무시된다. 여성에게 가해지는 감정노동의 강도가 큰 데 반해 그 모든 감정노동은 경시된다. 감정노동은 여성혐오와 아주 밀접하다.

 비정규직의 비율은 여성(41.5%)이 남성(26.3%) 보다 훨씬 높다(2019 통계로 보는 여성의 삶, 통계청, 2019). 특히, 최근 들어 가시화되는 택배/배달 노동 담론에서 비난 대상은 남성으로 지칭되나(‘택배 보이’, ‘쿠 X친구’로 이름이 바뀐 바 있음에도 ‘쿠 X맨’의 사용을 고집하는 등) 실제로 그런 공격이 더 가혹하게 향하는 곳은 여성일 수밖에 없다. 경험과 능력을 인정받지 못하는 상황은 여성에게 더 빈번하게 나타난다. 임신이 곧 휴직으로 이어지고 유리천장이 공고한 사회에서 여성의 경력은 쉽게 단절되거나 평가절하된다. 배우와 가수 중에서도 나이를 먹었을 때 ‘상품 가치’가 떨어져 연예계에서 이탈하는 것은 남성보다는 여성이 더 많을 것이다.

 대상화하는 존재와 대상화당하는 존재의 구도에서 대상화하는 존재를 탓하기보다 당하는 존재를 검열하는 것은 전형적인 여성혐오의 문법이다. 자발성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또 다른 예로는 강간에 미처 대응하지 못한 여성을 비난하는 것이 있다. 성노동에 대한 혐오는 여성혐오에 다분히 기대고 있다. 애당초 성노동이 혐오받는 근원은 무엇인가? 문란한 여성, 애비 없는 자식을 욕하는 심리, 가부장제의 억압에 순순히 따르지 않는 이에 대한 낙인이 아닌가? 노력을 하지 않는다는 비난 역시, 노력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여성, 나아가 온갖 소수자의 삶을 전혀 상상하지 못하는 태도에 불과하다. 노력하고 공부하면 된다고? 노력할 상황에 처해있지 않은 사람, 노력할 기회를 놓친 사람, 같은 노력에도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은 무조건 버리고, 비난해도 될까? 모르면 듣고, 존중해라. 당신이 모르는 삶은 세상에 존재한다. 

 

 3. 조금 더 중요한 이야기

 

 성노동은 노동이 아니라는 말은 이렇듯 구멍투성이다. 하지만 이 논쟁은 혐오하는 입장에선 별로 중요하지도 않다. 성노동이 노동이든, 성착취든, ‘페이강간’이든, 그런 라벨링은 멸시와 비난 외에 어떤 의미도 없다. 성노동을 성착취, ‘페이강간’이라고 부르면 갑자기 여성인권이 올라가는가? 이미 성노동에 대한 멸시만이 가득한 세상에서, 성노동이라는 말이 성노동을 사회적으로 용인 가능한 것으로 만들기라도 하는가? 성노동이 그렇게 구구절절 가려야 하는 것이라면, 정작 당사자는 배제한 ‘#나는_창녀다’ 따위의 해시태그는 어째서 흥해도 되었는가? 어째서 스스로의 피해 서사에 창녀를 이용하고 낙인을 강화하며 도구화하는가? 어째서 ‘창녀 취급’을 당하거나 ‘술집 여자 취급’을 당하는 순간에 스스로가 그러하지 않기 때문에만 분노하고, 그 자체가 모욕으로 사용된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분노하지 않는가? 왜 아직도 김치녀, 된장녀, 개똥녀가 아니라고 해명하기에 급급하고 그것을 모욕이랍시고 휘두르는 이들을 비웃지 못하는가?

 당사자에게는 이것이 노동이라고 말하는 선언이, 그 모든 얄팍하고 의미 없는 멸시를 버텨내기 위해 필요하다. 성노동은 강간을 파는 것이라는 말은 성노동자가 긋는 선과 합의를 지워버린다. “격투기 선수가 링에서 맞는 것도 폭력으로 신고가 가능하냐”라고? 글쎄, 링에서 아무리 폭력이 합의되어 있다고 해도 칼로 눈을 찌르거나 살인을 한다면 당연히 신고가 가능하겠지.

 어떤 성범죄 피해자는 비난받아도 되는가? 어떤 성범죄 피해자에게는 “어쩔 수 없다, 네 책임이다”라고 말해도 되는가? 그리고 그렇게 말하고, 퍼뜨리고, 피해자의 증언에 대해 온갖 악의적 편집이 난무하는 데 대한 책임을 단 하나도 지지 않은 채 침묵으로 일관해도 되는가? 그렇게 사과를 요구하는 사람만이 유난히 되는 폭력을, 성폭력을 근절하기 위해 활동하는 단체에서 전략으로 사용해도 되는가?

 나는 성노동을 합법화하자는 주장을 하지 않는다. 당사자의 안위 따위는 안중에도 없이, “구매자/알선자 처벌”이라는 키워드만 납작하게 받아들인 채 ‘노르딕 모델’이라는 다섯 글자로 이 모든 논쟁을 종결지을 수 있다는 태도도 취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성노동을 불법인 채로 놔두자고 할 수 없다는 것을 안다. 그렇게 음지화 해서 생기는 모든 취약점이 성노동자 개개인을 향한다는 사실을 안다. 하지만 성노동이라는 말에 치를 떠는 이들은, ‘불법임에 반대한다’는 말에 반사적으로 “합법화”를 비난한다. 어째서 성노동자와 포주를, 고의적으로라고 밖에 설명할 수 없는 수준으로 혼동할까? 어째서 가해자들은 피해자의 말을 듣지 않고 자기들끼리 모든 것에 합의할까? 성노동자가 처하는 위협을 샅샅이 드러내고 그 대처법을 이야기하는 것에 왜 “어린 여성들을 성노동으로 현혹한다”는 비난을 하는 것일까. 성노동자는 안전수칙조차 공유해서는 안 되는 것일까? 왜 어떤 사람은 안전할 권리조차 겹겹이 박탈당해야 하는가?

 성노동이 여성에 대한 환상을 팔아 여성을 물화하는데 일조하든, 강간 문화를 지탱하든, 그래서 그것이 부당하고 사라져야 할 것이든 “성노동은 노동이 아니다” 따위의 선언은 애당초 논지에서 벗어나 있다. 성노동을 '삭제'하고, '부정'하기 위해서 필요한 전략은 그따위 것이 아니다. 그래, 세상에 없어져야 할 노동, 부당한 노동이라는 것은 존재할 수 있다. 안전이 담보되지 않는 노동이 있고, 종사자의 인권이 없다시피 한 노동도 있다. 다음 등치가 지나치게 납작할 수 있지만 말할 지점은 있다. 노예 제도는 부당한 시스템이었고 아동 노동도 부당했다. 그래서 해체했다. 하지만 그 해체 과정에서, 노예/아동 탓을 하고, 노예/아동을 공격하고, 노예/아동을 모든 것의 원인으로 보았는가? 왜 성노동자는 만악의 근원인가? 어째서 성노동자에게는 그렇게 말하는가?

#진영간_입장차이가_아니라_성폭력_2차가해다 

 


 

작가 소개글 : 트랜스젠더 혐오표현 정리 등, 혐오 양상을 바라보고, 정리하고, 반박하는 글을 계속해서 쓰고 있는 쟁뉴라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