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노동 프로젝트/2020 성노동 프로젝트 제 4회 코로나 시대의 성노동

[2020 성노동 프로젝트 제 4회] 멜섭왹비 : 표착될 수 없는 지표

성노동자해방행동 주홍빛연대 차차 2020. 10. 1. 14:29

표착될 수 없는 지표, 멜섭왹비

 

표착될 수 없는 지표

 

멜섭왹비

 

이 글은 성폭력 묘사를 포함하고 있어 주의가 필요합니다.

 

 저는 테이블 아가씨로 방에 들어갔는데, 얼마 뒤에 갑자기 손님이 바지를 탈의하더니 자신의 성기를 빨라고 시켰습니다. "오빠 저는 테이블 아가씨라 이런 건 부끄러워요"라고 말하며 술이나 먹자고 했습니다. 손님은 자긴 분명 작업 아가씨를 불렀다면서 그럼 네가 왜 온 거냐고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고, 사장을 불러오라고 시켰습니다. 바깥에 있는 사장에게 손님 이야기를 하니, “너 작업 아가씨 아니야?”라고 물었습니다. 사장은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실장과 전화하더니, 한숨을 푹 쉬었어요. 알고 보니 서로 커뮤니케이션이 꼬여 실장은 절 테이블 아가씨로, 사장은 작업 아가씨로 착각하고 방에 넣어준 거였습니다. 작업이란 게 뭔지 몰랐지만, 아까 손님의 행동을 보아하니 대충 짐작이 갔습니다. 대기실에 들어가 실장에게 문자로 작업은 어떻게 하는 건지, 얼마를 받아야 하는 건지 물어봤어요. 작업은 10만 원을 받으면 된다고, 쉽게 말해 룸떡이라 생각하면 된다고 했습니다. 실장은 저에게 하기 싫으면 안 해도 되니 무리하지 말라 했지만, 어차피 테이블로는 얼마 못 벌던 찰나라 작업을 하겠다고 했습니다. 실장과 대화를 끝내고 가게 사장에게 저 손님과 작업을 하겠다고 하니 어두웠던 사장의 낯빛이 밝아졌습니다. 콘돔이 없다고 말하니 사장이 건네줬고, 파우치에 콘돔을 넣고 문 앞에서 노크했습니다.

 방에 들어가 손님과 맥주 몇 잔을 더 마셨습니다. 손님은 너 간 거 아니었냐고 물었고, 저는 원래 테이블만 보는데, 오빠가 좋아서 오빠랑만 놀려고 다시 들어왔다고 했습니다. 우리 둘은 탈의를 했고, 손님은 저를 눕혔어요. 오빠는 제가 가져온 콘돔을 뜯더니 마이크에 씌웠고 그 마이크를 그대로 저에게 삽입했습니다. 제 표정을 살피며 “좋아? 좋아?” 연신 질문을 했지만 답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어떤 행동을 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지금 문을 박차고 나가도 되는 건지, 아님 원래 작업은 다 이런 건가 생각했습니다. 오빠가 만족할 때까지 아파도 가만히 있었습니다. 오빠는 그 모습에 흥분했는지, 저를 룸 안에 있는 화장실로 데려가 제 머리를 붙잡고 목 깊숙이 자신의 성기를 처넣었습니다. 헛구역질이 나서 고개를 뒤로 빼고 몸을 움직였지만, 그럴수록 손으로 더 세게 머리를 눌렀어요. 룸에선 노래가 흘러나와 제가 발버둥 치고 고통스러워하는 소리가 묻혔고, 룸 안 화장실은 밀폐된 공간이라 저항하는 게 소용없다 느껴져서 온순하게 따랐습니다. 눈물 콧물이 다 나서 화장이 번졌고, 머리는 엉망으로 흐트러진 상태에서 기침을 하니 손님이 "너 목 끝까지 넣는 거 못해?"라고 했습니다. 시간이 언제 끝나는지 귀를 쫑긋 세우고 있었지만 좀처럼 시간이 끝났다는 노래가 흘러나오지 않아 시간이 멈춘 것 같았어요. 손님은 제 머리를 놔주고 일으켜 세워서 손을 삽입했습니다. 자기 손에 피가 묻어나니 "피나네? 이거 나 때문이야?"라고 말했습니다. 룸 안에는 정적이 흘렀습니다. 제가 계속 대답이 없자, 손님은 손에 묻은 피를 보면서 미안하다고 말하며 다른 아가씨를 불러야겠다고 했습니다. 방에서 나왔는데 무언가 밑에서 계속 흐르는 느낌이 나서 화장실에 가보니 팬티에 피가 묻어 나오고 있었어요. 처음엔 아픈지 몰랐는데 피를 보고 나서야 아프다는 감각이 생겼습니다. 대충 휴지를 팬티 안에 넣고 차에 타서 화장을 다시 고쳤어요. 실장이 첫 작업은 어땠냐고, 손님은 괜찮았냐고 물어서 별일 없었다고, 앞으로 방 한 개만 더 보고 퇴근하겠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다음 방에서 작업을 하려 했을 때, 손님은 흐르는 피를 보고 혀를 차면서 섹스를 못할 거 같다며 아가씨를 바꿔달라고 했습니다. 저는 초이스를 보러 다니다 겨우 테이블 하나 더 보고서야 택시를 불러 집에 갔습니다.

 그 후에 전 사무실에서 작업과 애프터도 같이 보는 아가씨가 됐습니다. 어느 날은 작업이나 애프터 손님이 없어 테이블 아가씨로 손님이 혼자 기다리고 있는 방에 들어갔어요. 앞에 보고 온 방이 술 게임 방이어서 술에 좀 취해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번에 들어간 손님도 저에게 술을 계속 먹였어요. '이 정도면 술에 안 취하겠지' 하고 마셨지만, 이상하게도 유난히 취해서 몸이 나른해졌습니다. 손님은 저를 보더니 힘들면 누워있어도 된다고 했습니다. 속으로 친절한 사람이라 생각하면서 몇 분간 누워 있었는데, 눈을 감고 방을 몇 개 더 봐야 할지 생각하고 있자 손님 쪽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기 시작했어요. 실눈을 떠서 보니 손님은 바지를 벗고 있었습니다. 저에게 조용히 다가오더니 자는 걸 확인하고 몸을 더듬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강간을 했어요. 저는 다 끝날 때까지 자는 척을 했습니다. 손님이 바지를 주섬주섬 입은 후 시간이 끝났단 노래가 나왔을 때 "오빠 나 이제 가볼게" 하고 방을 나서려고 일어섰습니다. 손님은 제 손목을 붙잡고 시간 더 끊어줄 테니 같이 있자고 했어요. 저는 실장님이 밑에서 기다린다고 했지만, 손님은 이렇게 취해서 다른 방을 볼 수 있겠냐, 그냥 오빠랑 같이 있자고 조곤조곤하게 말했습니다. 손님의 손을 뿌리치고 "맞아, 오빠 나 술 취해서 그냥 집에 가서 쉬는 게 낫겠다" 하고 가게를 나왔습니다. 그 어떤 강간보다 수치스러웠고, 죽고 싶었습니다. 집에 와서 먹은 걸 다 토해내고 약을 먹고 잠들었어요. 눈 뜨면 하루 반나절은 이미 다 지나 있었고, 일어나 보면 저녁이었습니다. 다시 또 손에 집히는 만큼 약을 먹고 잤습니다. 며칠을 무언가 먹지 않고 약 먹고 잠자는 것만 반복하니 나중에는 밥을 먹으면 배가 너무 아파서 울었습니다. 그래도 이대로 아무것도 안 먹으면 죽겠다 싶어 억지로 먹고 토했습니다. 더 이상 빈속에 약을 안 먹으려고 그랬던 거였는데, 뭔가 먹긴 했으나 여전히 빈속이나 마찬가지인 상태였습니다. 실장은 언제 출근하냐고 연락을 했습니다. 다시 몸을 일으켜서 돈 벌러 가야 했지만, 일어날 수 없었어요. 씻을 힘도, 밥 먹을 힘도 없어서 연락을 씹었습니다. 실장은 제가 지금까지 만나 본 사람 중에서도 정말 친절하고 제게 잘 대해주던 사람이었습니다. 며칠 동안 답이 없으니 무슨 일이 있냐고 전화를 했습니다. 이 연락까지 모조리 무시했을 때, 저와 실장의 관계가 완전히 끝나버렸음을 직감했습니다. 앞으로 사무실을 옮기면 이런 실장을 또 만날 수 있을까, 나는 또 도망쳐버렸다는 생각에 죽고 싶었습니다. 그즈음 다니고 있던 상담이나 정신과에 발길을 끊고, 한동안 또 집 바깥을 나가지 않았습니다.

 이런 상태로 몇 주가 지나자 돈이 없어져 조건만남을 했습니다. 슬슬 가게로 돌아가서 일해야겠단 생각은 했지만, 몸 상태가 좋지 않아 몇 분 걷지도 못하고 집에 돌아와야 했습니다. 가방에 공황약과 물을 항상 가지고 다니며, 공황이 올 거 같으면 중간중간에 먹었어요. 겨우겨우 손님 1명을 만난 뒤 집에 오는 길에 지하철에서 쓰러질 뻔했습니다. 바로 지하철을 타고 집까지 갈 수 없어서, 중간중간에 내려 역 의자에서 쉬다가 지하철을 타고 집에 갔습니다. 노동할 수 없는 몸이 됐지만, 여전히 먹고사는 일은 계속해야 했으므로, 며칠에 한 번씩 손님 한 명 만나는 게 유일한 수입원이었어요. 조건만남이 안정적이었으면 조금 더 오래 했겠지만, 손님과 약속을 잡아 장소에 나가면 장난을 쳐서 허탕을 칠 때도 몇 번 있었고, 혹시 경찰일까 봐 늘 불안 불안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하나 싶을 때, 술은 별로 안 먹고 연애 위주로 하는 룸이 있다는 광고를 봤어요. 커뮤니티에 이런 룸이 있냐고, 변종 룸이냐 물으니 그런 룸은 잘 모르겠다, 룸떡 아니냐, 이런 댓글이 달렸습니다. 작업이면 해본 적 있으니 나쁘지 않다고 판단했어요. 알바 공고를 보고 연락을 했고, 실장을 차 안에서 만났습니다. 하지만 그는 실장이 아니라 미아리 집결지 업주였고, 당장 오늘부터 일해보자며 같이 미아리로 가자 했습니다. 저는 그날 밤 미아리라는 곳에 처음 가보게 됐습니다.

 청소년 출입 금지 구역. 골목에 가게가 따닥따닥 붙어 있었고, 새로운 얼굴이 나타나니 이모들이 절 쳐다봤습니다. 눈치를 보며 업주를 따라 가게에 들어갔어요. 업주는 새로 일하게 된 저를 언니들과 이모에게 소개했습니다. 빨간 조명과 가게에 비치된 하얀 드레스 홀복들을 마주했을 때 제가 정말 집결지에 와있단 게 실감이 났습니다. 가게 안에 있는 홀복으로 갈아입고 1층 좌식의자에 앉자 옆에 있던 언니가 말을 걸어왔습니다. 어디서 일했는지 묻고, 대답을 하자 언니도 원래 저와 같은 곳에서 일했는데 , 돈이 되지 않아 미아리로 오게 됐다고 했습니다. 언니는 가게에 대해 설명해주고, 일은 어떻게 하는지, 이런 손님이 오면 어떤 식으로 대처해야 하는지, 며칠 지켜보면 금방 배울 거라고 저를 다독였습니다. 업주는 제 얼굴을 보더니 붙임머리를 해라, 화장을 이렇게 해라, 홀복은 이걸 입어라, 얼굴은 여길 고쳐라 등의 이야기를 했고, 돈이 부족하면 빌려주겠다고 했습니다. 업주는 자기 말을 따라야 네가 초이스가 잘 돼서 돈을 많이 번다고 했습니다. 제가 고민하는 표정을 짓자, 업주는 마이킹 그런 건 아니고, 이자도 없으니 편히 말하라고 사람 좋은 미소를 보였습니다. 언니는 그 모습을 지켜보다 나중에 우리끼리 남았을 때 옆으로 와서 “그냥 적당히 듣고 넘겨”라고 말했습니다.

 가게에서 일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됐을 때, 한 손님이 저를 초이스했습니다. 그 손님은 원래 다른 언니의 지명 손님이었는데, 마담 이모가 새로운 애 들어왔으니 걔랑 좀 놀아주라고 해서 저를 고른 거였어요. 그런데 그 손님은 방에 들어가서 멍이 들 만큼 가슴을 세게 움켜쥐고, 힘으로 제압하면서 제대로 좀 해보라고, 너 때문에 안 선다고 짜증을 냈습니다. 저는 방을 보고 내려와 언니한테 저 손님 좀 이상하다고 말했어요. 그러자 언니는 자기도 처음 미아리에 왔을 때 저 손님이 폭력적으로 굴었다고 했습니다. 알고 보니 저 손님은 가게에 처음 일하는 아가씨들에게 이런 식으로 신고식을 치르게 하던 손님이었습니다. 이모는 이 사실을 알면서 그 손님을 나에게 넣어줬던 건지, 아니면 몰랐던 건지 생각하며 거울을 보는데 가슴에 멍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건 일종의 태움 문화 비슷한 게 아니었을까, 처음 일하는 아가씨들 군기를 잡으려고 이모가 일부러 넣어줬던 손님은 아닌가란 생각이 듭니다.

 손님이 많은 날이었습니다. 방 하나가 끝나면 화장을 고칠 시간도 없이 바로 초이스를 봐야 했어요. 손님과 같이 방에 들어가서 옷을 벗고 있으라고 말한 뒤, 복도로 나와 미니 칠판에 붙어 있는 타이머를 맞췄습니다. 종이컵에 각각 얼음과 가글을 담고 물티슈를 챙겨 방에 들어갔어요. 아무것도 안 했는데 손님의 성기가 단단히 발기되어 있었습니다. 언니는 손님이 화장실에 갔다 왔거나, 아무것도 안 했는데 발기되어 있으면 약 복용을 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했던 게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앞에 있는 손님이 그래 보였어요. 아니, 섹스 한번 하는 게 뭐라고 집결지에 오는데 약까지 먹고 오나란 생각이 들면서, 집결지에 가기 전 가성비를 뽑기 위해 자위를 하고 가라는 팁을 나누던 남초 커뮤니티가 생각났습니다. 그렇게 하루에 손님을 10명 정도 받았을 때쯤, 그때 처음으로 손님과 섹스를 하는 게 아니라 강간당한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하기 싫고 아팠지만, 여기서 자리를 박차고 나갈 수는 없는 노릇이어서 끝날 때까지 통증을 참았어요. 손님이 나간 뒤 이불 정리를 하고 1층으로 내려가야 했는데, 침대에 풀썩 누워서 몇 분 동안 눈 감고 있었습니다. 앞으로 이런 생활이 계속되는 건가,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는 건 좋았지만, 이런 몸과 정신 상태로 일을 지속해야 한다는 게 싫었습니다.

 이모는 장부를 적고 저에게 40만 원을 건네줬습니다. 성노동을 하며 하루에 가장 많이 번 돈이었어요. 다음 날 출근해서 초이스를 보고 손님을 접대하러 2층에 올라가려고 일어섰는데, 눈앞이 깜깜해져 주저앉았습니다. 식은땀이 흐르고 열이 나는 것 같았어요. 벽을 짚고 일어나 쟁반에 맥주와 컵, 안주를 담아 2층에 올라갔습니다. 노래방 기계가 있는 룸에서 손님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자기는 공무원이라고, 세상 사는 게 힘들어서 술을 많이 마시고 왔다고 했습니다. 저는 어떻게든 오빠의 기를 살려줄 수 있게 대화의 흐름을 이어가다, 이제 일어나서 가자고 했어요. 손님은 여기서 하고 싶다고 앉으라고 했습니다. 저는 이 방에선 못한다고, 일한 지 얼마 안 되어서 이모한테 혼나니까 방에 가자고 설득했습니다. 손님은 저를 강제로 눕혔고 애무를 하기 시작했어요. 저는 발버둥 치다, 이내 가만히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이모를 불러도 되는 건지, 아니면 혼자 해결해야 하는 건지 생각하며 방을 둘러봤습니다. 여기는 2층이고, 문이 닫혀 있고, 1층까지 거리가 있어서 소리를 질러도 어차피 안 들리겠구나. 손님이 바지를 벗으려고 할 때, 밀치고 일어나서 방으로 가자고 했어요. 손님은 투덜대며 방으로 따라왔습니다. 그렇게 손님 몇 명을 더 받고 1층에 앉아 있는데 시야가 계속 흐려졌습니다.  퇴근하고 집에 오니 몸 이곳저곳이 아파 눈물이 났어요. 갑자기 이유를 알 수 없는 통증 때문에 잠도 제대로 잘 수 없었고, 무슨 약을 먹어야 하는지도 감이 안 잡혔습니다. 일단 진통제와 정신과에서 처방받은 약을 급하게 먹고 잠들기 위해 노력했어요. 저녁이 되면 또 일하러 가야 했습니다. 하지만 통증이 사라지지 않아서 계속 한 알 한 알 늘려 먹었고, 마지막엔 1일 최대량까지 먹고 나서야 겨우 잠에 들었습니다. 출근하려고 오후 5시쯤 일어났는데 정신이 몽롱하고 몸이 무거웠습니다. 더 자고 싶었지만, 지각을 하면 이모에게 혼나니까 화장실로 갔습니다. 약과 잠에 취해 칫솔질하다 얼마 안 가 어지럽고 눈앞이 깜깜해져서 넘어졌어요. 넘어진 채로 몇십 분 있다가, 그 자세 그대로 방까지 기어 나왔습니다. 이대로는 일을 못할 것 같아 잠자리에 누워 더 잤습니다. 그리고 그날 지각해서 이모에게 혼났습니다.

 술에 엄청 취한 손님이 문을 열고 들어왔습니다. 그날은 손님이 너무 없어 술에 취한 손님도 초이스를 봐야 했어요. 딴청을 피우며 '제발 나는 고르지 말아라'라고 생각했지만, 그런 손님은 바람과는 다르게 초이스를 합니다. 손님은 역시 저를 골랐고, 2층에 올라가는 저에게 언니가 맥주를 챙겨주며 잘하고 내려오라고 말했습니다. 손님에게 대충 술을 먹이고 작업방으로 데려가 한 타임을 보냈습니다. 손님은 제가 마음에 들었는지, 한 타임 더 끊을 테니 잠시만 기다리라고 말한 뒤 화장실에 갔습니다. 마침 손님이 없어 그냥 받자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손님이 화장실에서 돌아오더니 소리를 꽥 질렀습니다. 야이 씨발년아, 이 좆같은 년아, 쌍욕을 하면서 여기 뒀던 자기 돈이 어디 갔냐고 물었어요. 저는 건드린 적이 없다고, 오빠 돈 안 꺼내놨잖냐고 말하니, 이 미친년들 다 죽여버리겠다며 사장을 불러오라고 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게 없어 보였어요. 우선 침착하게 "오빠, 제가 그럼 이모 모셔올 테니 조금만 기다리세요"라고 말한 뒤 1층으로 내려가 이모를 찾았습니다. 언니가 무슨 일이냐고 안색을 살폈어요. 저는 자초지종을 설명하며, 손님 맛이 갔다고, 다 죽여버리겠다고 난리 치고 있다고 했습니다. 언니는 이모에게 전화를 했고, 이모와 함께 2층으로 올라갔어요. 손님은 이모를 보더니 자기 돈을 내놓으라 소리 질렀고, 이모는 야 이놈아, 네 돈을 나한테 왜 찾아?! 하고 화를 냈습니다. 그렇게 몇십 분 실랑이 끝에, 손님이 그토록 찾던 돈은 손님의 바지 주머니에서 나왔어요. 이모는 "야 이 새끼야, 네가 찾던 돈 여깄잖아. 너 왜 애 겁먹게 소리를 지르고 그래? 이 새끼야. 너는 이래서 술을 처먹으면 안 돼." 하고 쯧쯧 혀를 차더니, 한 타임 더 끊을 거지? 하며 돈을 가져갔습니다. 이모는 저에게 잠깐 바깥으로 나오라고 했어요. 저 손님 이번 타임만 하고 내보내라고, 다시는 안 받을 거니까 적당히 하고 나오라 했습니다. 저는 경황이 없어서 네, 네, 네만 반복했어요. 손님을 보내고 나서 1층에 내려오니 업주가 와 있었습니다. 업주는 여러 가지 업소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오늘은 어쩌다 한번 우리 가게에 들리는 날이었습니다. 이모에게 손님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업주는 우리 ○○이 겁먹었어? 하하하, 하고 웃었습니다. 옆에 있던 언니도 제가 겁먹는 게 귀여웠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내가 너무 초짜 같이 겁먹었나 하고 부끄러워서 따라 웃었습니다. 그래, 계속 일하려면 이런 일은 익숙해져야지, 일하다 보면 더 이상한 일도 많을 거라 생각하며 따라 웃다 보니 그냥 하나의 해프닝 같았습니다.

 태풍 오던 날에도 업주는 출근하라고 했습니다. 출근해도 손님은 있을지, 아니 그전에 가게에 가다가 날아가는 건 아닌지 걱정을 하며 외출 준비를 했습니다. 태풍이 와도 손님이 많아 가게 초입에는 줄을 서 있다고 이모가 말했어요. 이모는 너희도 옆 가게처럼 잘해봐라, ○○은 손님 발가락까지 쪽쪽 빨아준다고, 아가씨들이 자기 돈으로 건강음료 같은 걸 사서 손님에게 주더라, 하고 말했습니다. 그 말에 저는 그냥 웃었고, 같이 일하던 언니는 "이모~ 걔네는 걔네잖아요." 하고 넘겼습니다. 며칠 후 산부인과에서 성병 검사 결과 문자가 날아왔어요. 바이러스 이름이 너무 많았는데 마지막 바이러스 이름에만 '+'가 붙어 있었습니다. 산부인과에 전화해서 '+'만 양성이란 거죠? 물으니 메시지에 쓰여 있는 7개 바이러스 모두 양성이 떴으니 내원해서 치료받으라고 했습니다. 허탈했어요. 이 수많은 성병을 치료받으려면 또 돈이 필요해서 가게에 나가야 했습니다. 그즈음 한 지인이 요즘 어떻게 지내냐고 물었고, 어쩌다 보니 업종을 옮겨 집결지에서 일하고 있다 했습니다. 지인은 거기 괜찮으면 자기도 데려가라고 했어요. 저는 갑자기 웃음이 나왔습니다. 집결지에서 일한다고 말하면 사람들은 저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했거든요. 같이 일하자는 그 말이, 제가 이 공간에 어떤 사람으로 존재하든 괜찮다는 메시지를 주는 것 같았습니다. 그렇지만 지인을 집결지로 데려갈 생각은 없었습니다. 여기가 어떤 곳인지 알고 있으니까요. 그냥 그런 말을 해준 것만으로 무척 위로되고 기분이 좋았습니다. 다음에 밥이나 한번 같이 먹자고 이야기를 마무리 지었습니다. 엄마는 가끔 잘 지내냐고 문자를 했습니다. 저는 새로운 일자리를 구해 잘 살고 있다고, 더는 저에게 신경을 안 써도 되니까 이제 저에게 조금씩 보내주던 돈을 엄마 혼자 다 쓰라고 했습니다. 그래도 엄마는 걱정됐는지, 아니면 그동안 저에게 못해줬던 게 눈에 아른거렸는지, 혹시나 무슨 일이 생기진 않았는지 신경이 쓰여 연락하는 거 같았습니다. 엄마나, 제가 성노동을 한단 사실을 모르는 친구들에게 전화가 오면 불안했어요. 어디선가 내가 몸 팔고 있단 이야기를 전해 들어 확인차 전화하는 것 같았습니다. 전화 내용은 시시콜콜한, 일상 안부를 묻는 내용이었지만 저는 전화를 받을 때마다 긴장했고, 제가 비도덕적인 사람이라 느꼈습니다. 결국 죄책감과 자기혐오에 못 이겨 주변 사람들의 연락을 피하기 시작했습니다.

 여느 때와 같이 퇴근해서 자고 일어났더니, 꼭 누구에게 두들겨 맞은 것처럼 몸이 아팠습니다. 엉엉 울면서 진통제와 리보트릴을 찾았습니다. 빈 갑만 나뒹굴고 있었습니다. 출근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고, 업주는 오늘 가게에 늦지 말라고 연락해왔습니다. 아파서 쉬어야 할 거 같다고 말하기가 어려워 한동안 업주의 번호를 켜놓고 전화를 걸까 말까 고민했습니다. 예전에 아파서 쉬겠다고 했을 때도 꾀병은 아니냐고 물었던 게 떠올라 이번에도 한 소리 들을 거 같았어요. 멈추지 않는 통증, 불안이 올라와 가빠진 숨, 홧김에 이제 일을 그만하겠다고 말한 뒤 가게 사람들 번호를 차단했습니다. 마이킹은 없으니까, 우리 집이 어딘지도 모르니까, 찾아올 리 없겠지, 스스로를 달래면서 핸드폰을 뒤집어 놓고 잤습니다. 그동안 일하면서 모아둔 돈으로 몇 달을 보냈습니다. 일하고 나면 피곤해 쓸 생각도 못했던 돈을 들고 옷가게로 갔습니다. 10만 원짜리 후드 집업을 사서 집에 왔어요. 친구를 만나서 밥도 사주고, 커피도 사줬습니다. 병원에 가서 진통제를 받아왔습니다. 의사는 꾸준히 치료받으러 나오라고, 6개월은 병원에 와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치료비용이 비보험 처리가 된다고 해서, 알겠다고 했지만, 간간이 아플 때만 진통제를 받으러 가야겠다고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수중에 돈이 사라져 가서 출장 마사지로 업종을 옮겼습니다. 실장은 강압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첫 만남부터 자기가 건달들과 알고 있다, 사무실에서 손님과 연애하다 도망간 언니를 찾아내 싸대기를 몇십 대 때렸다고 자랑처럼 말했습니다. 그건 무언의 압박이었습니다. 내 심기를 거스르지 말아라, 그렇지 않으면 다음에 이 자리에서 맞는 건 네가 될지도 모른다 같은 이야기였지요. 옵션은 뭐를 할 거냐 물어봤습니다. 노콘, 질싸가 있는데 보통 우리 사무실 언니들은 노콘까지 한다. 콘필로 잡아줄 수는 있는데, 콜이 없을 거라면서 저의 눈을 쳐다봤습니다. 그럼 노콘까지는 할게요. 질내 사정은 임신할지도 모르니까 무섭다고 했습니다. 출근해서 실장이 하라는 대로 손님에게 열심히 서비스했습니다. 모텔에 들어가 여느 때처럼 손님과 섹스를 하고 있는데, 손님이 질 안에 사정했어요. 오빠, 바깥에 싸기로 했잖아요, 하고 당황한 목소리로 말하니, 손님은 실장이 너 질내 사정도 해준다고 해서 부른 거라 했습니다. 저는 실장에게 그런 얘기를 들은 적이 없었습니다. 나를 속였구나. 나에게는 거짓말을 하고, 손님과 실장 둘끼리만 합의를 보고 방에 넣은 거구나. 몸이 차가워지는 느낌이었습니다. 손님에게 그럼 사후 피임약이라도 먹게 5만 원이라도 달라고 했습니다. 손님이 쥐여 준 5만 원을 가지고 차에 올라탔습니다. 그렇게 실장은 종종 질싸 옵션을 받더니, 나중에는 아예 노콘 질싸 옵션 콜만 저에게 보냈습니다. 퇴근 때마다 사후 피임약을 복용해봤자 소용이 없었습니다. 생리주기에 맞춰 1년에 한두 번 먹는 사후 피임약을, 매번 먹을 수 없는 노릇이었으니까요. 그렇다고 사전 피임약으로 피임을 하기엔 이미 걷잡을 수 없었습니다. 처음엔 임신할까 두려웠습니다. 퇴근하고 집에 오면 손가락을 목구멍에 집어넣어 억지로 토했습니다. 저 자신이 불결하게 느껴졌어요. 이런 상황이 두렵고, 화가 났습니다. 집에 있는 물건을 집어 던졌고, 행거에 걸린 옷을 다 쓰러뜨렸습니다. 그리고 다시 정리했다가 어지럽히기를 반복했습니다. 이런 행동을 하는 이유를 알 수 없었습니다. 뭐라도 해서 감정을 표출하고 싶었으나, 어떤 것도 이 상황을 바꿀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 조금씩 제가 처한 상황에 순응해갔습니다. 나중에는 임신에 대한 공포도 무뎌졌습니다. 한 달에 한 번씩 임신 테스트기를 해서 버리고, 캘린더에 결과를 기록했습니다.

 자주 보던 출장 기사는 저에게 잘해주던 사람이었습니다. 처음 만났던 출장 기사는 저에게 씨발년이라고 욕하고, 정신 안 차리냐고 혼냈습니다. 출장 기사는 다 이런 건가 싶어서 참았습니다. 두 번째 만났던 기사는 저와 친해지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었고, 오히려 저의 몸 상태를 신경 써주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루는 굳은 얼굴로 차에 탄 저에게 기사는 왜 표정이 안 좋냐고, 무슨 일 있냐고 물어봤습니다. 한 손님이 관계 도중 목을 졸랐던 날이었습니다. 얼굴이 빨개지고 숨이 막혔지만, 손님은 그런 건 신경 쓰지 않고 자신이 사정하고서야 손을 놨습니다. 기사에게 사실 손님이 이러이러한 행동을 했다고 하니, 그런 건 오빠에게 말해줘야 한다고, 네 몸 상해가면서 일할 필요는 없다 했습니다. 기사는 음료수를 건네며 수고했다고 했습니다. 첫 번째 만났던 기사와는 다른 사람이구나, 좋은 사람이구나. 음료수를 마시면서 경직된 몸을 풀었습니다. 퇴근할 때 실장과 매번 통화하는데, 어느 날은 새로 온 출장 기사가 언니 돈을 가지고 튀었다며 이래서 믿을 수 없는 출장기사는 쓰면 안 된다고 하소연을 했습니다. 이 하소연에서 출장 기사는 아가씨가 위험할 때 구해주러 올 수 있는 유일한 동료이며, 살아남으려면 기사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는 사실을 찾아냈습니다. 일이 끝나면 기사에게 기름값이라도 하라고 몇만 원씩 쥐여줬습니다. 출장 기사와 저는 몇 개월 동안 부쩍 친해졌습니다. 친해지면서부터 스스럼없이 장난을 치며 놀았고, 그때부터 기사는 제 몸을 만지거나 성희롱을 했습니다. 저는 장난식으로 하지 말라고 말했지만, 오빠는 너랑 하고 싶다, 너희 집에 초대해달라 같은 이야기가 돌아왔습니다. 기사를 바꾸려면 바꿀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호의가 필요했습니다. 기사가 바뀌면 다시 이런 호의를 건네줄 사람을 만날 수 있을지 판단이 안 서 기사를 바꾸지 않았습니다. 

 당시에 저는 성노동자 동료 상담을 하면서 노동 착취를 당하고 있거나 위험한 상황에 있는 성노동자들에게 이런저런 조언을 해주고 있었습니다. 그런 가게가 아니어도 언니에게 잘해줄 업소는 많다, 돈 떼어먹는 가게는 옮겨도 된다, 실장이 그런 행동을 하면 이런 말을 해보라고 말해주면서, 한편으로는 그게 성매매 현장에서 얼마나 실행에 옮기기 어려운지 저부터 알고 있었기에 무력감과 허무함을 느꼈습니다. 하지만 언니들이 이런 대우를 받는 건 부당하다고, 상황을 바꿀 수 있는 여지는 있다는 걸 반복해서 말했습니다. 그건 저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습니다. 사무실을 옮겨야 하는데, 옮길 수 있는데, 나는 그런 사람인데, 내가 경험하고 있는 건 폭력인데.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사무실을 바꾸지 않고 일했습니다. 위험한 상황을 벗어나라고 조언하는 제가 정작 학습된 무기력에 짓눌려 아무것도 못하는 모습이 부끄러웠습니다. 숨기고 싶었습니다. 누군가 이 사실을 알면 질타할 것 같았습니다. 왜 그런 곳에 계속 있냐고, 노콘 하다 자궁 들어내서 수술하고 싶은 거냐고, 결국 사이즈가 안 좋으니 그런 곳에서 일하는 게 아니냐는 조롱을 받을 거 같아 어디에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점점 어떠한 글도 쓸 수 없는 상태가 되어가고, 이러다 저를 잃어버리는 건 아닐까 안절부절못하는 마음만 커져갔습니다. 실수로 사람들한테 이상해진 모습을 보일까 불안했어요. 사람들이 변조되어가는 저를 읽어낼 수 없도록 행동했습니다. 약에 취해서 말하는 게 어눌해지거나, 기억이 통째로 사라져서 기억을 못 하는 모습, 통증 때문에 기능할 수 없게 된 몸으로 제가 맡은 그 어느 것도 할 수 없게 된 모습을 필사적으로 숨겼습니다. 사람들이 기대하는 저를 연기하기 위해선 드러낼 모습과 숨겨야 하는 모습을 분류하고 선을 그어 행동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어쨌든 사람들은 어눌하지 않고, 글을 읽고 쓸 수 있는, 공론장에서 생각을 가다듬어 말하는 저를 좋아하니까. 무엇보다 이곳에서 제가 해야 하는 역할도, 여태껏 쌓아 올려 온 것들도 그런 것이라고 생각했으니까. 이 공간에서 존재할 수 있었던 이유들이 사라지게 되고, 동료들과 더는 함께할 면목이 없어질 때, 저에게 부여된 역할을 수행할 수 없어지면 그런 사람은 사라지는 게 순리니까.

 언젠가는 모두가 나를 잊고, 이 공백 속에 버려두고 떠날 거 같았어요. 사랑하는 사람들마저도요. 시간이 흐를수록 두려움은 커져갔습니다. 저의 삶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아무런 가치도 의미도 없으니까. 제가 갑자기 비관주의에 빠져서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니라요, 정말로 그렇거든요. 성노동자의 삶은 기록으로도, 기억으로도, 어느 것 하나로도 포착되어 남겨지지 않아요. 기록되고 기억되는 일마저도 기득권의 전유물 같은 거예요. 기득권이 될 수 없는, 저 같은 사람들은 서서히 잊히고 말아요. 제가 어떤 걸 기록으로 남기려고 해도요, 사람들은 제가 성매매를 전시한다고 생각하거나, 어린 여성들을 성매매로 유입시키는 포주라고 공격합니다. 말도 안 되는 논리로 입에 담을 수 없는 말들을 해요. 성폭력 피해 사실을 말하면, 네가 강간을 당했기 때문에 성노동은 노동이 아니고, 너와 네 친구들이 하고 있는 운동은 잘못됐다고 합니다. 자살하라는 이야기는 너무 많이 들어서 몇 번 들었는지 셀 가치도 없어졌습니다. 저는 어떤 세계를 어떤 방식으로 기록할지 정할 수 있는 권한이 없습니다. 개입되고, 손상되고, 훼손되고, 가공된 저의 서사만이 프로파간다의 코드가 되어 남아버리죠. 그래, 나는 감히, 스스로 감각했던 세계를 나의 언어로 남기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아. 

 제가 기록될 방법은 유일하게 하나 있습니다. 여러분이 기억하고 싶어 하는 존재로 남는 거죠. 늘 성노동자가 기억되어오던 방식으로요. 성노동 운동가, 성노동자가 아니라 성매매 피해 여성이나 문란한 창녀로 회자되는 것. 타인의 입을 통해 내 존재가 전유되는 모습에 저항하지 말고 순응할 것. 그렇지만 그런 건 성미에 안 맞습니다. 여태껏 이어져 온 기록의 흐름에 맞춰 고분고분하게 기억될 만한 존재로 남고 싶었으면, 저는 성노동이란 단어를 쓰지 않았겠지요. 성노동 운동가도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저는 가만히 타인들에게 전유되는 존재로 남고 싶지 않고, 제가 바라보는 세계를 저의 언어로 기록하고 싶어서 여기에 있습니다. 성노동자를 승인하지 않던 세계에 주체로 서는 데 모든 걸 걸고 도전하고 싶습니다. 누군가 개입해  입맛대로 가공된 제가 아니라,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제가 저의 경험을 재구성한 세계로 여러분을 이끌고 싶습니다. 제가 발 디딘 이 세계가 성노동자의 존재를 허락하지 않는다면, 저 역시 저의 존재를 허락하지 않았던 세계를 고발하기 위해 글을 쓸 것이니까요. 저의 모든 목소리가 결국 프로파간다로 코드화될지라도, 이게 제가 지켜내야만 하는 최후의 보루란 걸 알고 있으니까요. 

 아마 우리는 늘 그래 왔던 것처럼 주류의 역사에서 지워지겠지요. 많은 소수자의 삶이 그래왔던 것처럼 말입니다. 우린 이미 벗어날 수 없는, 같은 궤도에 올라서 있어요. 성노동자의 삶은 미래에 닿아서야 복원되고 연결되겠죠. 아니, 어쩌면 영영 복원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런 시간이 우리에게는 도착하지 않을 수도, 재구성되는 순간이 허락되지 않을 수 있겠죠. 지금 우리가 무엇 때문에 그토록 지난하게 싸워왔는지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고, 아무런 기록도 이 세계에 남지 않을 거라면, 표착될 수 없는 지표가 결국 우리의 지표가 되는 거라면, 영영 유랑하다 소멸하게 된다면, 회복되지 않고, 실패하고, 이탈한 상태로 살아갈래요. 그래서 오늘은 이런 글을 썼습니다. 회복되지 못하고 아직도 밤을 건너는 사람이 여러분 주변에 있으니까, 곁을 내어달라는 의미에서요. 제가 성매매 경험 당사자로서 말하는 것에 대한 가치가 사라지길 바랍니다. 더 이상 성노동자를 향한 혐오와 폭력이 저의 존재를, 우리의 존재를 털끝 하나도 건드리지 못하길 원해요. 그런 공격 따위로부터 우리의 세계가 흔들리지 않길 희망하며, 튼튼하고 안전한 지지 기반 위에서 모든 성노동자들이 행복하고 평안한 삶을 유지했으면 좋겠습니다. 이 글을 읽고 여러분이 무슨 표정을 지을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 궁금합니다. 누군가 성매매는 역시 인생을 갉아먹고 돈을 못 버는 직업이라 생각할지도, 아니면 복잡한 생각 속에 한숨을 쉬고 있을지도 모르겠죠. 그래도 우리, 증오에 받쳐 타인을 미워하는 거에 질렸으니까, 우는 건 그동안 너무 많이 했으니까, 마지막은 웃으면서 안녕하자. 

 



작가 소개글
: "언니가 말했던 것처럼 우리 삶은 아무 의미도 가치도 없어요. 아무것도 남겨지지 않을 테고, 그렇다면 역시, 즐겁게 살아가고 싶어요." (여자제갈량_김달)

 

이 글을 보고 우울감, 무기력 또는 PTSD를 경험하신다면, 아래 기관에서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1. 한국성폭력상담소  02-338-5801

2. 서울 : 여성인권센터 보다 02-982-0923

서울 : 반성매매인권행동 이룸 02-953-6279

3. 경기 : 두레방  031-841-2609

경기 : 어깨동무 031-222-0122

4. 인천 : 희희낙낙 상담소 032-881-8297

5. 부산 : 여성인권지원센터 살림 051-246-8297

6. 대구 : 대구 여성인권센터 힘내 051-422-8297

7. 광주 : 광주 여성인권지원센터 언니네 상담소 062-431-8297

8. 대전 : 여성인권티움 느티나무 상담소 042-223-3534

9. 울산 : 울산 성매매피해상담소 052-249-8297

10. 충북 : 충북여성인권상담소 늘봄 043-257-8297 

11. 강원 : 강원여성인권지원공동체 춘천 길잡이의 집 033-243-8297

12. 충남 : 천안여성현장상담센터 041-575-1366

13. 전남 : 목포여성인권지원센터 061-276-8297

14. 전북 : 전북여성인권지원센터 063-282-8297

15. 경북 : 포항여성인권지원센터 새날 054-231-8297

16. 경남 : 경남여성인권지원센터 055-246-8297

17. 제주 : 제주여성인권연대 해냄 064-702-8297

18. 여성긴급전화 : 1366

19. 청소년 상담 : 십대여성인권센터 010-7705-13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