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노동 프로젝트/2021 성노동 프로젝트 제 5회 우리가 그리는 미래

[2021 성노동 프로젝트 제 5회] 유자 : 0 or 100

성노동자해방행동 주홍빛연대 차차 2021. 9. 25. 10:11

[2021 성노동 프로젝트 제 5회] 유자 : 0 or 100 "어떤 여성들은 자신의 욕망을 인지하고, 음미한다. 어떤 여성들은 자신의 욕망을 거부하고, 내쫓는다. "

 

0 or 100

유자

 

여성의 도의가 아들을 많이 낳는 것이었던 시절, ‘여성미’의 상징은 풍요와 다산을 가져다줄 넉넉한 골반과 유방이었다. 여성의 넉넉한 몸은 아들을, 성(sex)을, 노동력을 남성들에게 선사함으로써 여성들은 그 넉넉한 몸으로 스스로를 지킬 수 있었다. 인간으로서 설계된 그대로 먹고 풍만해지기만 한다면, 운이 좋아 남자아이를 낳을 수 있다면. 그러나 19세기 낭만주의 운동 등장 이후로 ‘미’는 본격적으로 여성들을 옥죄기 시작했다. 야위고 창백한 피부가 높게 평가받기 시작하였으며, 마른 몸이 추앙받기 시작하였다. 더는 넉넉한 몸만으로는 부족했다. 풍만하기만 한 몸이 내쳐진다는 것은, 이제 여성에게 생식능력 이상의 능력을 갖춘 몸이 필요해졌다는 의미였다. 다시 말해, 여성들은 풍만한 몸이 지니고 있던 넓은 골반과 큰 유방과 더불어 야윈 몸의 얄쌍한 허리 모두를 갖춘 몸의 소유자가 되어야만 했다.

아들을, 성(sex)을, 노동력을 바치는 것으로도 모자라 여성들은 더 치밀한 몸까지 지녀야 했다. 여성의 자연스러운 ‘넉넉한 곡선’은 그 자리를 빼앗겼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을 수치스럽게 느껴야만 했다. 잘록해야 했고, 아주 매끄러워야 했으며, 털이 자라나서는 안 됐고, 분홍빛을 띠면 금상첨화였다. 완벽한 ‘S’를 그리는 것이 여성의 존재 의의가 되었다. 그러니 지나치게 넉넉한, 잘록하지 못한, 털이 자라나는 갈색빛의 여성들은 완벽하지 못한 자신의 몸을 증오하기 시작한 것은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여성의 몸은 완벽해야만 했다. 여성들이 ‘S’를 증오하기 시작한 것 또한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스스로의 몸이 완벽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던 여성들은 ‘S’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브래지어를 벗어 던지고, 머리를 자르고, 자신의 뱃살을 드러내고, 제멋대로 자라나는 털을 내버려 두었다. 그저 그대로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여성의 몸은 정치적 선언이 되었으며, 저항의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영민한 여성들은 어떻게 해야 더 큰 파장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지, 무엇을 해야 더 큰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는지 알고 있었다. 깃발을 들었고, 길거리로 나섰고, 구호를 외치며 그들의 적을 물색하기 시작했다. 적은 적나라하게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적은 외부에도 존재했으나, 내부에도 존재했다.  

‘S’를 갈망하는 여성들. 마른 몸을 갈망하고, 피부의 결점이 가려지길 원하고, 풍성한 속눈썹을 가지길 원하는 여성들. 여성해방과는 다른 길을 가는 여성들, 자신에 대한 가치판단을 타인에게 맡기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여성들, ‘진짜 여성을 은폐한다고 여겨지는 여성들이 ‘진짜를 외치는 여성들 사이에서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남성들이 그들을 칭송한다는 점에서 그랬으며, 그들이 자신의 진짜 가치를 찾지 못하고 있는 존재로 비친다는 점에서 그랬다. 그래서 메이크업을 하느라 시간을 허비하고, 작은 옷사이즈에 자신을 맞추고, 진짜 자신의 본질을 드러내지 않으려는 여성들, 그런 ‘가짜’ 여성들 중에서도 가장 ‘가짜’인 여성들, 그래서 ‘진짜’ 여성들이 구원과 계몽을 하고자 했던 여성들이 바로 창녀들이었다.

여성을 억압하는 ‘S’와 ‘S’를 욕망하는 여성들. ‘S’는 그렇게 창녀를 전유했다. ‘S’가 있기에 창녀가 존재했고, ‘S’를 갖췄기에 창녀가 될 수 있었다. 그렇게 창녀는 구원해야 하는, 계몽 받아야 하는 존재가 되었고, ‘진짜 여성이 될 수 없었다. 그런데 우리는 여성들로 하여금 욕망에 충실 하라고 말해왔다. 욕망을 가지고, 그 욕망을 위해 달려가라고. 그 욕망이 금지되는 영역의 것이라면? 물론 ‘진짜’ 여성들은 자신들이 말하는 욕망은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여성들의 어떤 욕망들, 예컨대 위로 올라가고자 하는 욕망이나 털을 자르지 않으려는 욕망 또한 과거에는 더러운 것이라 여겨져 왔다. 변해가는 세상 속에서 우리는 여성들에게 어느 욕망을 선사해야 하는가? 그 욕망의 기준은 어떤 여성에게 있는가? ‘진짜’ 여성? ‘가짜’ 여성? 이제 우리는 우리의 욕망마저도 ‘진짜’와 ‘가짜’로 나누어야 하는가?

마른 몸을 가지고 싶다는 욕망. 아프고, 기괴하고, 어딘가 망가진 욕망. 그 욕망을 가진 여성들. 창녀로 대표되는 여성들을 구원하고자, 계몽하고자 한다면, 그래서 그 여성들이 구원받고 계몽된다면, 그 욕망 또한 구원받고 계몽되어서 ‘진짜’ 욕망으로 진화하는가? 애초에 욕망이란 진화하는 종류의 것인가? 창녀의 마른 몸과 창녀의 마른 몸이 되고 싶다는 욕망, 창녀의 분칠한 얼굴과 예쁜 얼굴이 되고 싶다는 욕망. 마른 몸이 되도록 억압받는 여성과 내 몸을 미워하지 않겠다는 욕망, 예쁜 얼굴이 되도록 억압받는 여성과 내 얼굴을 사랑하지 않겠다는 욕망. 가짜 욕망과 진짜 욕망, 가짜 여성과 진짜 여성.

여성들의 삶은 항상 ‘0’ 아니면 ‘100’이었다. ‘늘씬한 몸’과 ‘다산의 몸’, ‘얄쌍한 허리’와 ‘통통한 허리’ 그리고 창녀 성녀라는 꼬리표. 창녀는 100을 가진 여성이다. 가짜 욕구를 가득 채운 100의 존재. 그들은 0으로 흘러가야만 한다. 진짜 욕망을 갖춰야만 하고, 진짜 여성이 되어야만 한다. 모든 여성들이 더 가벼울 수 있도록. 그러나 우리의 존재는 평균값이 아니다. 0과 100이 합쳐서 50이 되는 것이 아니라 0과 100이 각개의 것으로 존재한다. 우리가 보편적인 경험을 할지언정 우리의 삶은 다르게 흘러간다. 우리가 가진 욕망도 그렇다. 더럽고 치사한 욕망이 존재하는가 하면, 고귀하고 우아한 욕망이 우리의 몸을 흐른다. 그리고 이 욕망은 우리의 몸과 정신을 구성한다. 어떤 여성의 존재는 욕망의 결과물이고, 어떤 욕망의 존재는 여성이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이 욕망과 우리의 관계 속에서 우리는 서로의 존재를 구별 지을 수 없다. 어떤 종류의 존재를 비난하게 된다면, 어떤 종류의 욕망 또한 비난해야만 한다. 그러나 욕망은 흘러간다. 우리는 그것을 붙잡을 수 없고, 볼 수 없으며, 명확히 이해할 수 없다. 유일하게 우리에게 보이는 것은 욕망을 음미하는 여성들이다. 손에 붙잡힌다는 이유만으로 그 여성들을 비난하는 것은 가장 쉽지만 가장 쓸모없는 일이다. 성매매와 관련된 모든 역사와 맥락을 배제한 채 창녀를 더럽다고 말하는 것이 가장 쉽고 무가치한 일인 것처럼.

어떤 여성들은 자신의 욕망을 인지하고, 음미한다. 어떤 여성들은 자신의 욕망을 거부하고, 내쫓는다. 여성들이 자신의 욕망을 받아들이는 방식은 무수하고, 그 방식이 어쩌면 기괴할지라도 그 여성들의 존재를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 어떤 종류의 몸이 받아들여질 수 있다면 다른 종류의 몸도 받아들여질 수 있어야 하고, 어떤 종류의 정신이 받아들여질 수 있다면 다른 종류의 정신도 받아들여질 수 있어야 한다. 기괴한 몸이라고 거부당할 이유 없듯, 기괴한 정신이라고 거부당해야만 할 이유 없다는 것이다. S, 그 완벽하고 기괴한 곡선 안에 담긴 여성들의 욕망을 읽어낼 수 있는가? 그 욕망이 기괴하고 추악하다고 말하고 싶은가? 어디, 그 S의 몸을 가진 여성과 눈을 맞추며 기괴하다고 말할 수 있다면 말해도 좋다. 

 


 

작가 소개글 : 차차에서 활동하고 있는 유자입니다. -어느날 내 인생에서 꿘이 자랐다-를 줄인 어내자라는 활동명으로 살아갈 뻔 하였으나 유자로 살아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