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꺼이 불법이 된 몸들에게
박정원
원고를 써야겠다고 생각한 건, 언젠가는 내 안에서 용주골에서의 일들을 정리해야겠다고 생각해서였다. 용주골의 투쟁이 마무리 아닌 마무리가 된 지 몇 개월의 시간이 흘렀고, 그동안 ‘연대인’이었던 나의 몸도 용주골로부터 차츰, 분명히 멀어졌다. 그 ‘마무리’는 결코 후련하지도, 마음을 편하게 하지도 않는 것이었고, 고작 한 편의 글로 매듭지을 수 없을 것이 분명하며, 어쩌면 그 어떤 것도 정리해 낼 수 없을 것이다. 그래도 이 글을 쓰는 이유는, 그 지난한 폭력과 고통의 시간 속에서 아주 작은 몇 개의 기억의 조각들을 꺼내 보고, 그 조각이 가진 반짝임을 아주 조금이나마 연장해 보기 위해서다. 김경일의, 파주시청의, 재개발의, 법의, 국가의, 자본주의와 가부장제의 폭력이 여전히 연장되고 있다면, 그것의 맞은편에 꿋꿋이 존재했던 우리들의 연대도 있는 힘껏 연장될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그 어느 곳에서도, 어떤 방법으로도.

용주골이 ‘지역의 집값을 떨어뜨리는’ 원인으로 지목되자, 파주시는 시 차원에서 용주골을 폐쇄하고자 시동을 걸었다. 그와 동시에 파주시가 성노동자들에게 제시한 ‘대책’은, 용주골의 전체 성노동자의 절반 남짓 되는 인원에게 계도에 동의하는 조건으로 터무니없이 적은 생계급여를 지원하겠다는 것이었다. 중복수혜조차 안 되는 이 생계급여마저 대상이 되지 못한 성노동자들은 그대로 삶의 기반을 잃거나, 노동 환경이 더욱 열악한 곳으로 밀려나게 될지도 몰랐다. 하루아침에 쫓겨날 위기에 처한 성노동자들은 대화를 요구했다. 예고 없는 폐쇄를 철회하고, 일을 하며 삶을 정비할 시간을 달라는 것. 대책 없이 집결지를 부수지 말고, 용주골 다음의 삶을 준비할 시간과 지원을 보장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파주시는 아랑곳하지 않고 용주골의 가게들을 부수기 시작했다. 그렇게 용주골에 무력을 동원한 행정대집행이 매일같이 들이닥쳤다. 하천 쪽에 세워져 있던 가림막을 철거하고, 가게 내부가 훤히 들여다보이는 곳에 CCTV를 설치해 용주골을 감시했다.
그러나 파주시가 CCTV로 감시하려는 것, 집행으로 부수려고 하는 것은 ‘성매매 산업’이 아니었다. 여성들의 삶이었다. 생업이고, 일상이고, 가정이고, 더 나은 미래이기도 했다. ‘그러게 왜 성매매를 선택했냐’라는 말로, 국가가 행한 강제 철거는 성노동자 개개인의 잘못으로 순식간에 내재화되었다. 하지만 용주골의 여성들이 맞닥뜨리고 있는 것은 분명 극단의 상태에서 최후의 자원인 신체를 통한 성노동을 선택하도록 강요하는 사회였다. 국가는 경제적 자원을 위해 성매매 집결지를 발전시켰고, 몇십 년 후 개발 이익을 위해 여성들로부터 하루아침에 집과 일터를 앗아갔다. 용주골의 누군가가 우리들의 삶을 왜 앗아가느냐고 외친다면, 국가는 그들을 ‘불법’이라고 호명해버리면 되었다. 당신들은 ‘불법’이기 때문에 존재할 수 없다고. 존재하지 않아도 된다고.
처음 용주골에 방문했던 건 2023년 봄이었다. 이날 파주시와 여성단체가 용주골에서 진행했던 것은 ‘여행길’이라는 이름의 행진이었다. 인간의 삶을 구경거리로 삼는 이 역겨운 행사가 진행되던 날, 여행길 동선이 끝나는 곳에서 성노동자들은 길 위에서 무릎을 꿇고 행렬을 기다렸다. 여행길 참여자들은 성노동자들 바로 앞에서 유턴하여 왔던 길로 도망치듯 줄지어 사라졌다. 그따위 혐오 세력들이 혐오를 넘어서 존재하는 당사자들을 마주 볼 깡도 자격도 없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때부터 경험했던 용주골은 늘상 폭력과 돌봄의 순간이 교차했다. 이후에도 연대인들은 예고도 없이 행정대집행이 들어왔다는 소식을 듣고 수차례 용주골을 오갔다. 행정대집행이 들어올 때마다 수십, 수백 명의 철거 용역들, 채증을 위해 카메라를 들고 서 있는 경찰들, 더럽게 말이 안 통하는 주무관들과 하루가 멀다 하고 대치해야 했다. 그들은 성노동자들을 밀치고, 때리고, 욕을 하고, 방관하다가, 우리가 조금이라도 지치면 그 틈을 비집고 포크레인을 진입시켰다. 정말이지 집요한 폭력이었다. 어느 날 우리는 비워진 홀박스에 농성장을 차리고, 새벽까지 상자를 잘라 다 같이 피켓을 만들었다. 한 피켓에는 만화 『원피스』의 캐릭터 샹디의 얼굴 그림과 함께 “어이… 여성분이 싫다고 하시잖아”라는 글씨가 적혀 있었다. 농담 가득한 글씨처럼, 용주골의 사람들이 농성장에서 나눠 가진 것은 웃는 얼굴로 태연하게 가부장제와 국가 폭력을 전복하는 힘이었다.
또 언젠가는 ‘여성의 날’과 ‘성노동자의 날’을 기념하기 위해 용주골 골목을 돌며 종사자분들께 장미꽃을 나눠 드렸다. 연달아 들이닥치던 행정대집행이 없던 날이었다. 장미꽃을 받은 종사자분들은 연대인들에게 환히 웃어 보이며 간식과 빵을 한 아름 챙겨 주셨다. 함께 챙겨 주신 카드에는 함께해 주셔서 감사하다는 글씨가 쓰여 있었다.
용역들이 건물 벽을 뜯어 가면, 우리는 그 위에 피켓을 덕지덕지 붙여 막았다. 어떻게든 용역이 들어올 진입로를 막기 위해 우산과 끈을 엮어서 골목에 바리케이드를 쌓았다. 그들이 부수고 있는 건물 안에서 “여기 사람이 있다”라고 소리 지르며 벽을 두드리고 있을 때, 한 성노동자분은 손을 다치면 안 된다며 두꺼운 통굽 구두를 손에 쥐여 주셨다. 그리고 서로의 얼굴과 손에 약을 발라 주었다. 그들이 가림막을 뜯고 CCTV를 설치하러 몰려왔을 때, 성노동자들은 맨몸으로 전봇대 꼭대기에 올라가 고공 농성을 했다. 집행이 들어오기 전날 미리 모인 사람들은 농성장에서 새벽까지 성노동자들이 나오는 영화와 다큐멘터리를 보았다. 성노동자분들이 만들어 주신 김국과 두부 부침으로 밥을 먹었다. 우리의 목소리를 외면하는 사람들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여행길’, ‘올빼미’ 행렬을 가로막기 위해 맨 아스팔트 바닥에 기꺼이 무릎을 꿇었다.
혐오의 순간은 한 사람의 삶의 표면에 묻을지언정, 스며들 수는 없다. 하지만 이러한 연대의 순간은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에 깊이 침투하고 스며든다. 용주골을 파괴하러 온 자들이 공유할 수 있는 것은 고작 삶을 파괴하고 난 혐오의 잔여물에 불과하며, 그 잔여물은 결코 연결과 돌봄을 만들 수 없다. 그들의 혐오는 파괴를 향해 있고, 파괴와 함께 끝날 것이기 때문에, 적당히 반복될지언정, 지속 가능하지 않다. 반면 우리의 돌봄은 삶을 향해 있기에 영원함의 가능성을 가지며 지속될 수 있다. 우리는 삶에서 결코 잊을 수도, 떨쳐낼 수도 없는 돌봄의 감각을 잇고 또 이어 나갈 것이기 때문이다.


투쟁 이후 몇 차례의 재판이 이어졌다. 활동가들과 종사자들이 성노동을 감시하는 행렬을 막은 것, 김경일에게 면담을 요청하기 위해 무릎을 꿇은 것, 성노동을 하다 단속에 걸린 것, 그런 것들이 그 대단한 ‘불법’이라는 잣대에 걸려든 이유였다. 서로를 지키기 위해, 혐오를 저지하기 위해, 먹고 살기 위해 한 모든 일들이 순식간에 ‘불법’이라는 단어로 수렴되었다. 하지만 용주골 투쟁을 이어온 이들은 합법보다 정의로운 불법이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이었다. 용주골에는 점점 빈 가게들이 늘어 갔다. 성노동자들이 떠난 건물 한편에는 3층짜리 ‘성매매 집결지 폐쇄 거점 시설’이 들어섰다. 분명 새 전광판, 새 현수막인데도, 용주골 골목 전체에서 그곳만 유독 폐허처럼 보였다. 그것을 만든 자들은 부끄러움을 몰랐기 때문이었다. 삶을 내쫓은 자리에서 감히 삶을 말하는 행위의 부끄러움을 도저히 모르는 자들, 그러한 자들이 만들어 낸 폐허였다.
그들의 ‘더 나은 세상’이 가부장제와 정상성의 세상이라면, 그러한 합법의 폐허라면 거부하리라. 참으로 합법적인 그들은 서로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기꺼이 불법이 되기를 선택한 자들을 이길 수 없다. 그 불법적인 존재들에게는 그들이 결코 가지지 못할 용기가 있었다. 용주골에서의 반짝이는 순간들은 다름 아닌 불법인 이들이 만들어 낸 것들이다. 발 딛고 있는 일터가 무너지는 순간에도 옆에 있는 사람에게 구두를 쥐여 주던 손, 받은 꽃보다 훨씬 더 많은 빵과 과자를 나누어주던 손, 피켓에 만화 캐릭터 얼굴을 그리던 손. 성노동자들의 얼굴을 감히 마주 보지도 못하는 자들이 외치는 ‘합법’을 전부 무력화시키는, 잊을 수 없는 순간들. 세상은 결국 그런 힘들에 의해 작동한다. 그 사실을 나는 용주골에서의 시간을 지나오며 배웠고, 앞으로도 영영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그 어느 곳에서도, 어떤 방법으로도.
만화 『지영』에서 성노동자 지영은 어느 휴일, 동네 목욕탕에서 목욕을 하고 나오는 길에 쪼글쪼글한 할머니가 된 자신의 모습을 상상한다. 삶은 영겁과 같이 지겹고, 고통스럽고, 끔찍해서, 온몸에 무사히 주름이 지기까지 걸릴 시간은 무척 지난하리라. 용주골의 몸들이 폐허가 된 용주골에 계속 머물더라도, 혹은 어딘가 또 다른 폐허로 이동하더라도, 그렇게 영영 멀어지더라도, 부디 많이 아프지 않기를 바란다. 오래오래 존재하기를 바란다. 모두가 함께 쪼글쪼글한 할머니가 되는 그날까지.
먼 곳에서 기도를 보낸다. <끝>

작가의 말 : 용주골 성노동자 생존권 투쟁의 연대인으로서, 그동안의 글과 그림을 돌아보며 용주골 투쟁을 정리해 보고 싶었습니다. 용주골을 다녀오고 그리면서, 뜨거운 외침이 가득 담긴 피켓, 따뜻한 빛깔의 장미꽃, 투명한 우산으로 용주골의 공간을 채우게 되었는데, 이러한 이미지들은 용주골이 우리에게 알려준 위로의 방식과 참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위로는 용주골을 파괴하기 위해 몰려든 자들의 눈에는 아주 연약한 것으로 보일지라도, 우리에게는 합법이라는 벼랑 끝에 몰린 상황에서도 멈추지 않고 작동하며 서로를 이어 주는 힘이었습니다. 용주골의 종사자분들이 베풀어 주셨던 따뜻함 속에서 보냈던 여러 밤들을 여전히 기억합니다. 용주골에 분명 불법을 뛰어넘는 따뜻한 용기가 있었음을, 혐오 행정과 강제 철거로 무너뜨릴 수 없는 삶이 있었음을 조금 더 오래 기억하고, 또 전하고 싶었습니다. 용주골의 종사자분들이 그 어디에 있더라도 건강하시기를, 또 잘 살아내시기를 바라는 마음을 글과 그림에 실어 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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