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시대에 일하고 관극하는 사람
적성
처음 성노동 프로젝트 참가 권유를 받고 코로나 시대의 성노동자라는 주제를 보았을 때 나는 참가 여부를 심히 고민했다. 나는 본격적인 코로나 시대가 시작된 후부터는 (사실 그 전부터도) 내가 한참 성노동을 하던 때보다 현저히 적게 성노동을 하고 있다. 심지어 지금은 거의 탈성노동에 가까운 상태로 다른 직업에 종사하고 있다. 때문에, 성노동자라는 당사자성을 내세워 뭔가 발언하기엔 스스로 부족하고 찜찜하게 느껴질 때도 있다. 그래서 나는 이 글에서 오직 ‘성노동자’로서 말하기보단 현재 코로나 시대의 ‘노동자’이자 관극이라는 취미를 즐기고 살아가는 나로서 이때까지 경험하고 생각했던 것들을 말하려 한다.
사실 나는 이전에도 늘 관극하는 성노동자라는 주제에 대해 말해왔는데, 나를 설명하는 데 빼놓을 수 없는 두 가지 속성-연뮤덕 그리고 성노동자-은 내가 나인 이상 절대 완전히 분리될 수 없고 긴밀하게 얽혀 서로를 구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성노동자로서 살아야 했던 나는, 연뮤덕이 아니었다면 말 그대로 지금까지 살아있지 못했을 것이다. 또한 내가 성노동으로 돈을 벌지 못했다면 나는 연뮤덕의 필수 조건인 관극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소위 말하는 탈덕을 했을지 모른다. 뿐만 아니라 내가 성노동자라는 것, 내가 성노동을 하고 성노동자 정체성을 가지며 겪었던 여러 경험과 생각들은 내가 연극 뮤지컬 작품을 선택하고 독해하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또 성노동자임을 밝히지 않고 연극 뮤지컬 이야기만 하는 SNS 계정에서 연뮤덕으로서만 활동할 때도 나의 생각과 말과 행동은 내가 성노동자라는 사실과 결코 분리될 수 없다. 그런데 성노동자가 아닌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 주변에 성노동자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 사실에 대해 처음으로 너무나 깊은 절망을 느꼈을 때가 바로 이번 코로나 사태 때였다. 처음은 멜섭왹비님이 겪고 계신 지난한 사이버불링이 시작되었던 올해 초(아마 2~3월쯤) 성매매 업계의 불황에 대한 트윗과 잇따른 공격들. 성노동 계정에서 그 공격들을 보기만 해도 지쳐 연뮤 계정에 들어갔을 때 내가 팔로우하던 사람들이 멜섭님을 비난하는 트윗을 알티한 모습을 보았을 때였다. 별다른 말을 덧붙이지도 않고 그냥 알티뿐이었지만, 나는 내가 속한 두 세계의 어떤 간극을 느낀 기분이었다. 그 후 강남 성매매 업소에서 코로나 확진자가 나왔을 때 나는 두 계정 어디에서도 말을 하지 못했다. 연뮤덕들은 공연장은 폐쇄되는데 유흥업소는 확진자가 나올 때까지 영업했다는 사실에 분노하며 유흥업소의 전면 폐쇄를 주장했다. 그러나 이 시국에 성매매하는 남성들을 향한 그들의 분노와 경멸에는 그곳에 나와 있던 성노동자에 대한 비난이 숨겨져 있을 수밖에 없었다. 장미계의 트친들은 그 비난에 맞서 얘기했다. 이 시국에 성노동자들이 성노동을 하지 못해 일어나는 수많은 문제를, 성노동으로 일상을 지탱했던 사람들의 일상이 파괴되어가는 과정을 장미계 트위터에서 읽을 수 있었다.
난 두 계정을 통해 만난 모든 사람을 사랑한다. 나는 기대했던 공연이 취소되어서 슬퍼하는 연뮤덕 지인의 트윗에 그 극을 마찬가지로 기다렸던 연뮤덕의 입장에서 공감했지만, 강화된 업소 단속으로 더 위험한 업종에 내몰리거나 아예 성노동을 하지 못해 생계가 어려워진 지인의 트윗에 원래 일하던 오피스텔로 돌아가지 못해 조건만남이라는 불안정한 수입원에 의지하게 된 성노동자의 입장에서 공감했다. 창녀들은 코로나 걸려 죽어도 싸다고 말하는 사람들과 장미계 계정으로 키배를 뜨다 연뮤 계정으로 들어가보면, 내 연뮤덕 트친은 방금까지 나를 인신 공격 하던 사람들에 동조하는 트윗을 알티하고 있었다. 그 트윗을 알티한 그 사람도 코로나 때문에 일자리를 구하기 힘들어 좋아하던 공연도 못 볼 것 같다고 슬퍼했다. 이런 일의 반복이었다. 코로나라는 재앙 앞에선 모두가 피해자였고 나는 두 세계에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존재가 된 느낌이었다.
코로나 사태가 장기화될수록 내가 성노동을 하는 횟수는 점점 줄어갔다. 예전의 빈도와 비교하면 탈성노동에 가깝다고 생각될 정도였다. 반대로 내가 트윗을 하게 될수록 날 성노동자 당사자 운동가처럼 생각하며 관심을 두는 사람은 늘어갔고 한번은 사이버불링의 표적이 된 일도 있었다. 내가 청소년 성노동자였던 시절, 금전적 어려움으로 내게 성노동에 관해 상담했던 청소년 지인들에게 질문에 답을 해주고 당장 필요한 생활비를 지원해주며 내가 할 수 있는 한 생활을 도와줄테니 웬만하면 성노동은 하지 말라고 했던 이야기를 트위터에 썼었다. 나를 불링한 사람들은 애초에 내가 성노동자임을 밝힌 것이 청소년에게 성노동이란 행위의 존재를 알리고 권유하는 포주같은 행위이며, 내가 덕질을 하는 것도 같은 장르를 파는 청소년들을 성매매에 끌어들이기 위한 음모라고 의심했다. 내가 연뮤덕이라는 사실마저 몇몇 불리들에게 조롱의 대상이 되었다. ‘연뮤덕님들아. 이 사람 좀 구원해주세요.’라고 말했던 누군가가 기억이 난다. 다른 심한 욕보다도 이 트윗이 기억에 남는다. 대체 어느 연뮤덕이 성노동자를 구원하려 한다는 말인가?
나는 그때 이미 몇몇 연뮤덕이 나의 신상을 유추하고 주변인에게 나의 연뮤계정과 장미계가 동일인임을 알린, 말하자면 성노동자 아웃팅 범죄를 저질렀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신상 유추는 오프라인에서 얼굴을 마주치는 연극 뮤지컬 장르의 특성 덕분에 가능했고 그 특성은 나에 대한 적극적인 가해로 이어지기 아주 쉽다는 사실도 알았다. 나의 어떤 소속도, 어떤 정체성도 나에게 더 이상 안정을 주지 못했다. 나는 계속 공연을 보고 성노동 이야기를 했지만 더 이상 연뮤덕이라고 불리는 집단에게 애착을 가지지 못했고 주 수입을 지탱할 새로운 직장을 구한 뒤로는 성노동자라는 정체성도 희미해졌다고 느꼈다.
새로운 직장은 행사나 교육 진행을 다루는 곳이다. 이곳은 내가 여태까지 일했던 곳들 중 (성노동을 포함해서) 가장 번듯하고 평범한 직장이고, 이곳에서 업무를 하며 나는 성노동을 할때와는 다른 접근 방식으로 코로나의 여파를 실감할 수 있었다. 코로나 때문에 행사장 대관이나 참가자 모집이 어려워 다들 진땀을 뺐다. 만약 내가 올 초부터 이곳에서 일했다면, 최근에 동료가 나에게 ‘왜 이런 시국에 클럽을 가냐’고 욕하고 내가 고개를 끄덕였던 상황과 유사하게, ‘왜 이런 시국에 성매매를 하냐’는 욕에 내가 고개를 끄덕여야 하는 상황이 될 수 있었다는 걸 생각했다. 나의 성노동자라는 정체성은 내가 성노동이 아닌 다른 노동(나와 사회가 별로 성노동으로 여기지 않는 노동)을 중점적으로 하게 된 순간 흔들린다는 것을 그때 진심으로 깨달았다. 내가 아무리 부업으로 아직 조건만남을 한다고 해도 나는 내가 성노동자가 아니라고 말하게 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다 결국 ‘마우스피스’라는 극을 본 후로 내 안의 눌러놓았던 혼란과 죄책감이 터져 나왔다. 나의 약자성(학대, 폭력 생존자, 정신질환 투병자)을 셀링하는 식으로 발언해왔던 나. 그러나 중산층 부모 밑에서 교육을 지원받고 어설프게나마 언어와 교양을 익힐 기회가 있던 나. 성노동으로 번 돈으로 약자들을 지원해줄 수 있었던 나. 그러나 그 아이들의 인생 이야기를 마치 나의 이야기 한 조각인 것처럼 함부로 트위터에서 꺼냈다가 그들을 불리들에게 갈기갈기 물어뜯기게 만들었다는 자책이 머릿속을 휘감았다. 나는 언어를 가진 ‘데클란’이 아니라 ‘데클란’과 섹스하고 미쳐버린 ‘리비’에 가깝다고 생각했다. 나의 발화는 결국 기만이고 아무런 의미도 성과도 없으며, 내가 돕는다고 생각했던 모든 사람에게 결국 해만 될 뿐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이유로 한동안 장미계에서 성노동자 당사자로서의 성노동 이야기를 말하길 두려워했고, 멜섭님의 성노동 프로젝트 참가 제안을 수락하고 나서도 한참을 고민했던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다시 말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만든 것은 뮤지컬이다. 뮤지컬 ‘비스티’가 다시 상연된다는 소식에 연뮤덕들은 많은 비판을 했다. 이런 설정과 스토리의 극을 요즘 다시 올린다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라는 말이었다. 그 비판도 분명히 맞는 말이다. 호스트바가 배경인 ‘비스티’의 서사는 남성중심적이고 여성혐오적이다. 그러나 나는 ‘비스티’가 공격받아야 할 점은 여성혐오와 여성 배제적이고 남성중심적인 서사 때문이지 그 배경 설정이 호스트바라는 ‘성매매 업소’라는 점 때문이어선 안된다고 생각한다.
내가 ‘비스티’의 장점이자 존재 의의로 생각하는 것이 바로 성산업 종사자들에게 대한 현실적인 묘사이기 때문이다. ‘비스티’의 인물들은 그간 스테레오 타입에 맞춰 한 명 정도 등장하던 ‘창녀캐’가 아닌 각자의 서사를 가진 성노동자 캐릭터들이었다. ‘비스티’의 가치는 성산업 종사자들을 중점적으로 다룬 극이 흥행을 이뤄냈다는 점이며, ‘비스티’의 한계는 성노동자 캐릭터도 남자여야만 서사를 부여받은 입체적인 인물로 만들어질 수 있었다는 슬픈 사실이다.
그렇기에 ‘비스티’가 더는 오지 않아도 될 때는 입체적인 여성 성노동자 캐릭터들의 이야기를 담은 극이 현재의 ‘비스티’처럼 많은 관객에게 소비될 수 있을 때뿐이다. 지금 ‘비스티’가 사라지면 성노동자들의 이야기를 중점적으로 하는 극이, 성산업과 성노동에 대해 생각해본 적 없는 관객들이 성노동에 대해 어떤 식으로라도 생각해볼 기회가 사라진다. 잔뜩 대상화된 모습이라도 노출되어야 한다. 어떻게든 우리의 존재를 계속 보여주어야 한다. 수많은 말이 오가는 것이 아무 말도 나오지 않는 것보단 낫다. 그런데 나와 같은 말을 하는 사람을 찾기란 너무 힘들다.
그래서 나도 계속 말하기로 마음먹었다. 나는 결국 불완전하고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경계에 서 있는 존재이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반대편을 한 번도 제대로 들여다보지 않은 사람들에게 끼어들어 놀라게 하고 질문을 던질 수 있으니까. 반대편에 가보지 않았거나 가보지 못한 사람들을 대신해 말해볼 수 있으니까. 말하는 사람이 누구든 이런 말을 한다는 것이 중요하니까. 나는 극장 옆자리의 관객이며, 나는 행사장에서 발열 체크를 하는 직원이고, 나는 블락 좌표로 돌았던 성착취 옹호 계정이고, 나는 공연 후 당신에게 김삿갓에서 막걸리를 사주며 연뮤 이야기를 하는 지인이다. 나는 공연에 늦지 않을까 떨리는 마음으로 퇴근 시간을 기다렸으며, 나는 전날 조건만남을 하고 번 돈으로 공연 티켓을 샀다. 나는 관극을 하고 나는 노동을 하고 성노동은 노동이다. 이 모든 것이 나고 난 나에 관해서 얘기한다. 나와 이 글이 연극 뮤지컬을 보는 다른 성노동자들에게 조금이라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기를 빌며 글을 마친다. 우리 대학로에서 만나요.
작가 소개글 : 안녕하세요. 적성이라고 합니다. 맨날 놀면서 관극이나 하는 거의 짭미의 삶 살고 있으나 아직 장미계로 불리는 동안에는 할 수 있는 만큼 성노동말을 하려고 노력 중입니다. 성노동 프로젝트에 참가할 수 있게 되어서 영광이고 잘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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