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는 괜찮습니다,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샘물
당신의 안부를 묻고 싶습니다.
그대는 괜찮으신가요, 정말로 괜찮으신가요.
저는 괜찮습니다. 아니, 괜찮지 않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술을 따르는 성노동자고, 그리스도인이며, 성소수자이자, 신학생이고, 우울과 불안에 약을 챙겨 먹고, 그렇습니다. 이외로도 다들 그렇듯이 너무나 많은 정체성이 겹쳐 있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제가 일하는 가게는 모던바, 그러니까 토킹바라고도 불리는 곳입니다. 99% 이상은 남성 패싱인 사람들과 술을 마시고, 이야기를 듣고 주도하며, 양주와 맥주를 팔고, 오빠들에게 술을 따라주며 맞춰줍니다. 저는 원래, 아니 지금도 사회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노동권 관련 활동을, 주거권 관련 활동을, 성소수자 인권 운동을, 개신교 내 이런저런 활동을.
그런 저에게 가장 어려웠던 것은,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는 것도, 비위를 맞추는 것도, 술을 작업하는 것도, 손님들의 성희롱도 아니었습니다. 함께 일하는 언니들의 ‘페미’ 혐오, ‘성소수자’ 혐오가 그랬습니다. 그곳에 저는 없습니다. 그냥 그렇다고요.
죄와 벌은 무엇일까요, 괜히 생각을 한 번 더 해봅니다. 성서에서 죄는 ‘과녁을 벗어난’의 의미를 가집니다. 나의 삶은, 이 글을 읽는 그대의 삶은 과녁에서 얼마나 벗어나 있나요? 저는 감히 말합니다. 그 과녁이 무엇이냐고, 우리의 삶은 과녁으로 정의될 것이 아니라고.
가끔은 악몽이라 할 수 있는 꿈을 꿉니다. 그럴 리도 없고, 현실에서 일어나지 않을 일인데요. 일을 하다가 갑자기 모르는 사람의 밴으로 끌려가 어딘가에 내려져 강간을 당하고, 섹스를 하고 지쳐있는 상태로 깨어납니다. 제가 있는 가게는 2차가 없는 곳인데도 말이에요.
이것이 나에게는 벌인가, 가끔 생각해 봅니다. 벌은 무엇인가, 또 한 번 생각해 봅니다. 함께 일하는 언니들은 정말 좋은 사람들입니다. 이곳이 첫 가게라서, 아무것도 모를 때 따뜻하게 맞아 주었고, 일을 가르쳐 주었고, 일을 조금 못해도 그냥 넘어가 주었고, 술을 잘 뺀다고 칭찬해 주었습니다.
맞습니다. 사실 이건 제게 벌이 아니었어요. 내게 주어진 벌은 사회와 사람들이었습니다. 제가 머무르고 있는 공동체, 그러니까 신학교라는 곳과 사회 운동판, 그리고 그리스도교 커뮤니티가 그렇습니다. 물론 그 누가 밖에서 나는 밤일을 한다고 말을 쉽게 꺼낼 수 있겠냐마는, 폐쇄적이고 폭력적인 이 집단들, 정의와 평화를 이야기하는 판에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젠더 디스포리아와, 꾸밈노동에 지쳐갈 때쯤이 되면 어느새 괜찮은 손님이 오기도 합니다. 사실, 괜찮은 손님은 없습니다. 비교적 나이스한 손님이 오면, 가끔은 제게 행복하게 살라고 응원을 보냅니다. 신학생이고, 성소수자이며, 성노동자인 제가 지은 죄는 무엇일까요. 내가 받아야 하는 벌은 무엇이었을까요.
저는 일을 하며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사람들을 잘 대하는 방법, 대화를 끊기지 않게 잘 주도하는 방법, 속마음을 살짝 들여다볼 수 있게 하는 기술.
성노동 비범죄화는 사람을 살릴 수 있습니다. 물론 그 과정과 이후에도 수많은 토론이 필요하겠지요. 그러나 당신들이 준 죄와 벌에 목숨을 끊은 동료들을 보면 그러한 논의조차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현실이 아프기만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쉽사리 당사자성을 내세울 수도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무슨 벌이 우리를 또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겠거든요.
내가 지은 죄라면, 뭐가 있을까요. 생활비와 필요한 돈을 벌려고 일을 하는 것? 성소수자로 존재하는 것? 제가 신학을 공부하며 배우는 것은 다름 아닌 사람들의 신앙입니다. 모든 신학은 누군가의 삶의 관점에서 시작되었고, 서구 백인 시스젠더 헤테로 남성 중심의 신학이 전통적으로 전개되어 왔던 만큼, 우리의 이야기는 들어갈 자리가 없었습니다.
그 자리는 투쟁과 희생으로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저는 이 글로 거기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존재는 잘못되지 않았습니다. 성노동자인 우리의 몸은 죄가 없습니다. 누구든 있는 그대로 사랑받고 존중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성서에서 돌아온 탕자의 이야기라 불리는 본문(눅 15)을 읽을 때면, 이렇게 해석하고 싶어집니다.
우리의 관점에서, 그 둘째 아들은 아마 돈을 잘 주고 가끔은 팁도 주는 손님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다 어느 날 보이지 않았겠죠. 그는 어딘가에서 쥐엄나무 열매를 주워 먹으며 살아가고 있었을 테니까요. 그러다 ‘팁’은 요새 뭐 하고 살지, 다른 가게에 갔나 하고는 점점 잊었겠지요. 혹은 그가 성격이 더러워서, 돈으로 우리를 매번 통제하려는 손님은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어쩌면 맨날 만취해서 욕하고 과하게 스킨쉽하는 진상이었을 수도 있겠다고요.
이러한 성서 해석은 누구에게 참 이상하다고 여겨지겠지요. 하지만 우리의 존재가 잘못되지 않은 것처럼, 또한 당연히 필요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우리의 삶이 조금 더 이야기되고, 차별과 혐오에, 정부의 잘못된 시행으로, 돈을 못 받아서 죽는 동료들이 없어질 세상을 기원합니다. 조금 더 바라보자면,
하느님 나라는 성노동자들이 너무 힘든 일을 하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을 날이 올 때에야 살짝 엿보일 것입니다. 다시 한번 당신의 안부를 묻습니다. 우리는 괜찮습니다. 그런 세상이 올 날을 기다리며, 나의 존재 역시 드러내 봅니다. 괜찮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평안을 빕니다. 고맙습니다.
새벽에 퇴근하고, 감리교신학대학교에서 샘물 드림.
작가의 말: 원래 차차의 활동에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꽤나 쌀쌀했던 어느 저녁, 용주골에서 진행되었던 후원 파티에 참여했던 기억도 납니다. 그러던 중 시간이 흘러 어느 바에서 일을 시작하게 되었고, 특별히 제가 가지고 있는 다양한 정체성들과 함께 이러한 경험을 기록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직 낙인과 차별이 가득한 한국에서는 성노동 담론이 한참 모자랄 수밖에 없지만, 여기에는 누구의 이야기라도 더 많이 덧붙여지고 이어져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특별히 당사자의 이야기가요. 그래서 부족하지만, 나도 기록을 남기고 싶다는 욕심에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글에서 언급했듯, 저는 기독교 신학생이고, 성노동자이며, 성소수자로 자신을 정체화합니다. 이렇게 교차하는 정체성들을 드러내는 것은, 제게도 그랬듯 누군가의 삶을 지속하게 하는 힘이 됩니다. 혹시 누군가에게 연결될 수 있다면, 또는 제가 알지 못하는 누군가에게 힘이 된다면. 다들 그렇겠지만 사실은 저에게도 제 자신을 드러내는 일이 막연하고도 위험하다고 느껴집니다. 특히 신학교라는 폐쇄적인 공동체와 각자가 생각하는 윤리를 엄격한 잣대로 들이대는 집단에 속해 있다는 점에서요. 그러나 사실은 그저, 우리가 혼자가 아니라는 점을 새삼 느낄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언젠가 우리 모두 그냥 그렇게 별 탈 없이 잘 살아갈 수 있는 날을 기다리면서요.
(사족. 그것이 하느님 나라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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