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차 활동 소식

[독서모임] 1월•2월 활동가 독서모임

성노동자해방행동 주홍빛연대 차차 2021. 4. 1. 11:51

아서 프랭크, 아픈 몸을 살다

1월 26일 차차 활동가들은 아서 프랭크『아픈 몸을 살다』를 읽고 도란도란 온라인으로 모여 독서 모임을 가졌어요. 📚 질병을 겪는 몸이란 어떤 것인지 고민해 보고, 각자의 질병 경험을 나누며 아픈 몸을 가지고 살아왔던 삶에 대해 이야기 나눴습니다. 2월 독서 모임에서 차차 활동가들은 김초엽, 김원영『사이보그가 되다』를 읽고 돌아오겠습니다. 다음에 다시 만나요, 안녕!


안녕하세요, 여러분~ 벌써 벚꽃이 피는 3월이 다가오고 있어요! 그간 잘 지내셨나요?🌸 차차 활동가들은 김초엽, 김원영『사이보그가 되다』📚를 읽고 2월 차차 독서모임에서 두런두런 이야기 나눴어요. '앞으로 독서모임에서 독후감도 작성해 사람들과 우리의 생각을 나누면 어떨까?'라는 의견을 주고받고, 2월부터는 머리를 맞대며 독후감을 슥삭슥삭 써 내려가기로 다짐했답니다. 차차 독서모임의 첫 독후감✨은 유자님께서 작성한 독후감입니다. 함께 읽어봐주시면 감사해요☺ 3월 독서모임에서는 과연 어떤 책을 읽게 될까요?! 좋은 책 왕왕 읽고 돌아올게요~ 우리 또 만나요!


정상성을 되찾는 정성

주홍빛연대 차차 활동가 유자
 


정상성을 되찾는 정성 -1


팔, 다리 어디 하나 빠짐없이 똑바로 움직여야 하고, 시력은 안경으로 교정할 수 있을 만큼 나쁘거나 좋아야 하고, 소리 또한 원만하게 들을 수 있어야 한다. 갓 만든 빵 냄새를 맡는 행운을 잊으면 안 된다. 그 빵을 떼어먹는 쾌락도 놓칠 수는 없다. 그 외 눈에 띄지 않는 질환이 있더라도 그 고통이 일상을 침범하지 않도록 조절할 수 있어야 한다. 뚱뚱하지 않으면 더 좋다. 여드름이나 흉터가 없다면 더더욱 완벽하다. 이게 우리의 정상성. 우리의 건강이다. 우리는 응당 건강해야 한다. 그래야 건강한 삶을 누릴 수 있으니까! 


빵 냄새를 맡는 행운, 빵을 떼어먹는 쾌락이 없는 삶은 암울하다고 여겨진다. 건강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누릴 수 있는 것들을 놓쳤기 때문이다. 암울한 삶을 살아가는 이들은 수술을 받거나, 재활에 힘쓰거나, 하다못해 거금을 들여 보조기구를 구매해야만 한다. 절대 지금의 몸이 마음에 든다거나, 이대로 있고 싶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그래야 건강한 사람들의 세계에 끼어들 수 있기 때문이다. 장애인과 상호작용하지 못하는 비장애인 중심의 세계가 그릇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노력은 장애인의 몫이다. 비장애인은 이미 감히 우리의 세계에 끼어들 수 있는 행운을 하사했기 때문이다. 정상성을 가진 이들은 오만하기 마련이다. 우리는 그들 사이에 끼어들기 위한 정성을 보여야만 한다.
 


정상성을 되찾는 정성 -2


성노동자에게 부여되는 서사 또한 별반 다르지 않다. 성노동자는 천박하고, 우울하고, 파괴적인 성매매 현장에서 빠져나와 비(非)성노동자와 함께 올바른 삶을 살아나기 위해 노력해야만 한다. 재활에 참여해서 그간의 삶을 반성해야 하고, 주변인에게 떳떳할 수 있는 직업을 가져야 하고, 자신이 얼마나 괴로웠는지 구구절절 설명하며 동정을 받아야 한다. ‘창녀’ 프레임에 갇힌 이상, 자신은 천박한 ‘창녀’, ‘남창’이 아니었으며 착취에 괴로워하며 하루하루 마지막 잎새가 떨어질 날만 기다렸던 피해자였다고 말해야 한다. 그러지 않고 성노동이 즐거웠거나, 성노동의 대가로 받은 돈을 요긴하게 썼다고 말하거나, 성노동이 부끄럽지 않은 것이라 말한다면 그 괘씸함에 두 번 다시는 정상의 세계에 합류할 수 없다. 그뿐만이 아니라, ‘창녀’라는 프레임이 그 괘씸함에 평생 따라다닐 것이다. 장애인이 대중교통을 이용하지 못하거나, 공공장소에서 눈초리를 받거나 하는 모든 일들은 정상의 세계에 부합하지 못하기에 벌어진다. 성노동자가 직업을 숨기거나, 그들이 당한 폭력이 정당화되거나 하는 모든 일들은 정상의 세계에 부합하지 못하기에 벌어진다. 장애인과 성노동자가 덩그러니 닫힌 정상의 문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이유는 딱 한 가지이다. 그들이 정상이 아니라서가 아니라, 정상성이 허상이기 때문이다. 성적 서비스를 제공하는 이들은 불결하고, 사회와 상호작용하지 못하는 몸은 내쳐지는 세계 따위 허상이 아닐 리 없다. 우리보고 정상성을 향한 갈망과 정상이 되기 위한 정성을 증명하라고 하는 세계 따위.


사이보그가 되다


도구를 사용하는 장애인과 사이보그는 닮았다. 아니, 의수나 휠체어와 같은 보조기구를 사용하는 장애인은 이미 사이보그의 범주에 들어갈지도 모른다. 장애인이 이미 사이보그라면, 의문이 하나 든다. 인류는 사이보그를 두려워하지만, 도구를 사용하는 장애인은 두려워하지 않는다. 사이보그의 무언가가 두렵다면, 기계와 살아가는 장애인은 왜 두렵지 않은가. 이 두려움의 간격을 살펴본다면 사실 우리가 두려움을 느꼈던 요소는 비장애인이 통솔하는 세상에 장애인이 끼어든다는 이질감일지도 모른다. 고작 그런 것이다. 정상성에 기반해 안전함을 느끼는 삶이란.


성노동을 거부하는 사회 또한 별 거 없다. 지금까지 더럽다고 치부해왔던, 폭력을 외면해왔던 후폭풍을 감내하지 못하기에 치졸하게 ‘창녀’ 프레임을 재생산하며 도망치고만 있는 것이다. 우리가 맞서고 있는 세계는 사실 별 게 아니다. 그저 치졸함의 결정체일 뿐이다. 그런 세계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딱 하나이다. 사이보그가 되든, 더러운 창녀가 되든, 그딴 프레임은 우리가 잘못 태어났다는, 잘못 살아왔다는 방증이 아니다. 우리가 계단을 오르지 못하든, 밥을 짓지 못하든, 성노동을 하고 돈이나 건물을 받든 그건 우리가 비난받을 이유가 되지 못한다. 우리는 흘러간 대로 살아왔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