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당연하고 간단하지만 누군가는 의도적으로 무시하는 사실
익명
안녕하세요. 저는 페미니스트고, 그간 트위터의 상황을 지켜보며 할 이야기가 많았는데 이렇게 저의 생각을 표현할 자리가 생겨서 기쁩니다. 성노동자 당사자가 아니기 때문에 편협하거나 부족한 글이 될까 다소 염려스럽습니다. 부족한 부분이 있더라도 모쪼록 너그러이 읽어주시기를 바랍니다.
며칠 전 한 타투 노동자의 트윗을 읽었습니다. 타투 상담을 하는 오픈채팅방에 한남이 들어와서 성적 요구를 하는 것에 불만을 표하는 내용이었습니다. 글쓴이는 타래로 ‘타투 합법화가 되어야 이런 사람들을 신고하고 처벌받게 할 수 있을 것’이라며 ‘작업자들의 안전을 위해 타투 합법화가 되길 바란다’는 내용을 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공감하며 그 트윗을 인용했습니다. 아무도 “타투는 불법 노동이니까 타투이스트를 그만둬라”라거나 “이렇게 타투가 사람을 좀먹게 한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습니다.
이 트윗 위에 어떤 일이 겹쳐 보였습니다. 저는 한 성노동자가 일터에서 원치 않는 성적 행위를 당해서 힘듦을 토로하는 트윗을 본 적 있습니다. 수많은 이들이 그에게 모욕적인 인용 리트윗을 달았고, 그 중 다수는 스스로 페미니스트라고 말하고 다니는 계정이었습니다. “성노동이 이렇게 사람을 갉아먹는다”라거나 “성매매 자체가 불법이니까 불법행위를 한 글쓴이도 잘못이다”라는 내용의 게시물도 있었습니다. 원색적인 조롱과 비난과 인신공격과 모욕이 쏟아졌습니다. 그가 스스로를 성노동자로 정체화하고 있다는, 단 하나의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사이버불링은 집단적으로, 그리고 지속적으로 이어졌으나 가해 집단은 오히려 이런 행위를 당당히 내보이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비슷한 일을 겪은 타투이스트와 성노동자에게 이토록 다른 반응을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타투이스트는 노동 중 성희롱을 당하면 안 되는 사람이고 성노동자는 원치 않는 성적 행위를 겪어도 단죄받아야 하는 사람입니까? 우리는 모두 원치 않는 성적 행위를 당하지 않을 권리가 있는, 존엄하고 고유한 인간이 아닙니까. 노동자는 노동 현장에서 폭력을 겪지 않고, 사람답게 일할 권리를 누려야 합니다. 그 노동이 법 테두리 안의 영역이든 아니든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이 자리를 빌려 아주 당연하고 간단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의도적으로 무시하고 있는 사실 하나를 말하겠습니다. 성노동자는 사람입니다.
성노동자는 사람입니다. 사과는 과일이라는 것만큼 간단하고 명료한 명제입니다. 성노동자는 사람이기 때문에 인간으로서 존엄과 가치를 지니며,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보장받아 마땅합니다. 성노동자라서 비난당하거나, 조롱당하거나, 인신공격을 당하거나, 모욕당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은 마땅히 존중받아야 하고 성노동자 역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성노동과 성산업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다룰 때도 항상 사람을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유독 성노동에 대한 담론은 ‘어떻게 성산업의 규모를 줄이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지’만 논의되는 것 같습니다. 저기요, 그 안에 일자리와 생계가 달린 사람들이 있는데요. 성노동 집결지를 없애자는 주장은 있는데 그 사람들이 어디로 가야 하는지 뾰족한 대책은 내놓지 않습니다. ‘성산업 규모를 줄이는 데는 노르딕 모델이 효과적’이라면서 정작 그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주목하지 않습니다.
저는 사실 특정 모델을 적극적으로 지지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어떤 모델을 시행하든 성노동자가 제일 우선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할 뿐입니다. 우리는 성산업의 축소를 우선순위에 두는 것이 아니라 어떤 제도가 성노동자에게 제일 이로울지를 고민해야 합니다.
가장 분명한 사실은 성노동자가 처벌받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노동은 성폭력이 일어나기 쉬운 노동환경인데, 성노동을 범죄로 규정하고 처벌한다면 성노동자가 자신이 겪은 성폭력을 고발하기 힘들어지고, 성폭력에 더 취약한 상황에 놓이겠지요.
그렇다면 노르딕 모델은 어떻습니까. 노르딕 모델은 성노동자를 제외한 성구매자와 포주만 처벌하는 제도입니다. 노르딕 모델은 성산업 규모 축소와 성구매 수요를 억제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모델이 과연 성노동자의 입장에서 최선인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성노동자의 노동환경을 개선하는 방향보다는 탈성매매에 초점을 맞추는 법 모델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법이든 현재 노동환경을 개선하는게 아닌 탈성매매를 목표로 한다면 성매매 현장에서 벌어지는 노동착취와 인권유린은 없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포주는 비록 성노동자와 착취-피착취의 관계에 있지만 성노동자에게 보호를 제공하는 역할 또한 합니다. 포주를 옹호하는 것이 아니라, 성매매 현장에서 미약한 보호일지라도 아예 없는 것과 있는 것은 천지차이입니다. 조건만남의 경우, 성노동자와 성구매자가 일대일로 만나서 이루어집니다. 조건만남은 어떤 안전망도 없기에 불법촬영이나 성폭력을 당할 가능성이 산업형 성노동보다 높습니다. 성구매자들은 처벌받더라도 성매매를 할 것입니다. 성구매자는 처벌받지 않을 수 있도록 음지로 성노동자를 불러 들일 것이고, 위험한 걸 알면서도 갈 수밖에 없는 성노동자들이 존재할 것입니다. 콘돔이 성매매 증거물로 채택되니 콘돔을 쓰지 않으려는 성구매자는 더 늘어날 것이며, 이는 성노동자의 건강권에 큰 위협이 될 것입니다. 이 때문에 노르딕 모델에서 오히려 성노동자는 사각지대에 놓일 수 있습니다.
그럼 성노동자의 안전한 노동은 누가 보호하나요? 국가가 이를 적극적으로 맡는다면 성노동 법제화가 될 것이고 소극적으로 맡는다면 성노동 비범죄화가 되겠지요. 물론 이러한 모델 역시 수많은 장단점을 무수히 안고 있겠지만 그 장단점의 크기를 재는 저울은 당사자, 즉 성노동자의 시선에서 만들어져야 합니다.
글을 맺으며, 가장 중요하지만 자주 배제되는 사실 한 가지를 다시 한번 말하겠습니다. 성노동자는 사람입니다. 동료시민으로서 존중받아야 하고, 사람으로서 마땅한 대우를 받아야 하고, 노동자로서 노동 현장에서 안전하게 일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성노동을 둘러싼 담론에서 성노동자가 가장 가운데 오는 날을 꿈꿉니다. 그날이 올 때까지 앨라이로서 함께하겠습니다.
작가 소개글 : 세상은 더 나은 곳이 될 수 있을까요? 더 나은 미래에 함께할 우리들을 기대해 봅니다. 그 날을 하루 더 앞당기는 데 작은 보탬이 되고 싶은 물방울입니다.
'성노동 프로젝트 > 2021 성노동 프로젝트 제 5회 우리가 그리는 미래'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21 성노동 프로젝트 제 5회] 왹사리 : 우리는 결코 같은 얼굴을 갖고 있지 않다 (0) | 2021.10.07 |
---|---|
[2021 성노동 프로젝트 제 5회] 보람 : 어쨌든, 각자의 선택 (0) | 2021.09.29 |
[2021 성노동 프로젝트 제 5회] 루비 : 더 나은 세상을 꿈꾼다면 (1) | 2021.09.27 |
[2021 성노동 프로젝트 제 5회] 익명 : 수취인불명의 편지 (0) | 2021.09.26 |
[2021 성노동 프로젝트 제 5회] 유자 : 0 or 100 (0) | 2021.09.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