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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공유] 동두천 기지촌 마을 시리즈

성노동자해방행동 주홍빛연대 차차 2023. 4. 19. 02:49

📌 동두천 기지촌 마을 시리즈 #1

턱거리마을 주민 대부분은 미군을 상대로 일을 했다. 일거리는 많았지만 일자리의 종류는 많지 않았다. 여성들은 미군 부대 안 빨래공장에 취직해 군복을 빨고 다렸고, 기지촌 성매매 여성들의 청소와 빨래, 육아를 대신하며 돈을 벌었다. 식당이나 가게를 운영하거나 성매매업소에서 일하는 여성들도 있었다. 마을의 모든 것이 미군부대로부터 형성됐고, 주민들은 미군부대로 인해 생존했다.

돈과 음악과 유흥이 넘쳐나고 마을은 번성했지만, 이곳 여성들의 삶은 언제나 아슬아슬했다. 매일 밤 사람들의 고성과 비명이 들려왔고, 살인, 강간, 폭력, 방화 같은 강력범죄가 끊이질 않았다. 1964년에는 기지촌 성노동자 김옥희(28) 씨가 집에서 변사체로 발견됐다. 얼굴에는 상처가 있고 목 졸린 흔적도 있었다. 살인을 저지른 이는 김 씨에게 월 5달러를 주고 동거를 해 왔던 미군이었다. 그는 평소에도 다른 여성들의 목을 조르는 버릇이 있던 것으로 밝혀졌다. 같은 해, 세 명의 미군이 택시 기사를 칼로 찌르고 현금 2천원을 강탈해가는 사건도 있었다.

알려지지 않은 사건들은 무궁무진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성노동 여성의 시신을 실은 꽃상여가 마을을 빠져나갔다. 턱거리마을 주민 최희순 씨는 “무서울 정도로 살인 사건이 많이 일어났다”며 “기지촌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친정에 돈을 보내기 위해 생활전선으로 뛰어든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이 여기서 많이 죽었다”고 회상했다. 서태순 씨는 “아침에 일어나면 창문이 깨져 있기도 했고, 사고가 나도 범인을 잡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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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세상 :: 쇠락한 기지촌 마을, 배제된 사람들의 기록

그 모든 것들이 사라진 골목에는, 아직 과거를 지우지 못한 흔적들이 빈 허물처럼 남아 있다. 그리고 골목 뒤편 언덕가의 허름한 집들에도 아직 사람의 흔적이 있다. 미군부대와 발전소로 둘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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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두천 기지촌 마을 시리즈 #2

그들은 돈이 필요했다. 그리고 마을에서 돈이 나오는 곳은 미군부대가 유일했다. 미군부대에서 빨래를 하는 여성들은 부대 식당에서 커피나 소시지, 고기 같은 식료품을 사서 공장 안에 숨겨 두었다. 그리곤 퇴근 무렵엔 그것들을 한복 치마춤에 감추거나, 망태기에 담아 부대 담벼락 밖으로 던지곤 했다. 부대에서 사들인 식료품들을 되팔면 꽤 쏠쏠한 돈이 됐다. 물론 매번 부대 정문을 무사히 통과한 건 아니었다. 검문소를 지나다 적발되는 날이면 그들은 부대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그곳에서 식료품을 빼돌린 또 다른 동료들의 이름을 대라고 추궁을 받았다. 동료들은 그들을 빼내기 위해 돈을 모았다. 동료 언니들이 잡혀갈 때면, 최 씨도 수 개월 치의 월급을 마련해 그들의 석방을 도왔다. 하루아침에 목돈이 허망하게 날아갔지만, 그저 자신의 이름을 순순히 대지 않은 언니들이 고마울 따름이었다.

열일곱 살부터 서른다섯 살이 되던 해까지, 최 씨는 18년간 매일 빨래 공장에서 일을 했다. 멋모르고 시작했던 일이 힘에 부칠 때쯤, 그도 적지 않은 나이가 돼 있었다. 아등바등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모이라는 돈은 안 모이고 이런저런 골병만 쌓였다. 최 씨는 이유를 알 수 없는 무력감에 시달렸다. 그때는 그런 시절이었다. 부당한 일을 겪어도 그것이 부당한 것인지 알 수 없었고, 하소연을 하고 싶어도 하소연을 할 곳이 없었다. 미군부대로 인해 형성된 마을이었고, 마을이 곧 미군부대였다. 미군이 많이 들락거리는 ‘홀’(유흥업소)을 운영하는 사람이 곧 마을의 지주가 됐다. 그들의 눈 밖에 나면 마을에서 더는 살기가 어려워졌다. 종종 간밤에 끔찍한 사건이나 소란이 일어났지만, 누구도 마을사람들을 보호하지 않았다.

최 씨는 일주일간 무단결근을 한 뒤, 공장을 나왔다. 미군부대를 나온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일자리라고 해봐야 주로 기지촌 여성들의 옷을 빨고, 그들이 낳은 아이를 돌보고, 청소를 하는 일 뿐이었다. 그리고 그 즈음, 미군부대 내 위락시설이 설치되고 캠프 호비와 케이시 사이에 연결 통로가 생기면서 마을 상권이 쇠락해가고 있었다. 최 씨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생활전선에 뛰어드는 것을 멈췄다. 대신 동생이 낳은 조카를 키우며 가사노동을 전담했다. 그리고 마흔 살이 되던 해, 미군부대에서 통역사로 일하던 남성과 혼인을 했다. 그와 같이 일을 했던 동료들도 진즉에 결혼과 동시에 공장을 떠난 터였다. 공장을 떠나 가정에 정착한 여성 노동자들은, 빨랫감을 한 무더기씩 들고 나와 마을 개천에서 또 다시 빨래를 두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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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세상 :: 기지촌 마을, 빨래하는 여성들

턱거리마을에 사는 여성들은 빨래를 했다. 미군의 군복과 속옷을 빨았고, 기지촌 여성들의 옷을 빨았으며, 가족들의 옷을 빨았다. 미군부대에 들어가 빨래를 했고, 마을을 가로지르는 동두천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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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두천 기지촌 마을 시리즈 #3

미군들에게 인기가 있는 기지촌 여성은 가사노동비를 집주인에게 지불할 만큼 돈을 벌었다. 그래서 돈이 필요한 외지의 젊은 여성들이 이곳으로 많이 몰려들었다. 미군을 만나 미국으로 가기 위해 기지촌으로 들어온 학생들도 더러 있었다. 하지만 이들 대부분은 가정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이어서, 벌어들인 돈을 다시 친가로 보내는 경우가 많았다. 돈이 없는 여성들은 종종 집주인에게 돈을 꿨다.

전 집주인에게 돈을 갚아야 하는 여성은 현재 살고 있는 집주인에게 다시 돈을 꿨다. 이 씨의 집에 살던 기지촌 여성들은 쉴 새 없이 일을 했다. 재수가 좋은 날이면 서너 명의 미군을 데려오기도 했다. 미군이 밤새 자고 갈 경우 20불을, 저녁 시간만 머물다 가면 10불을 받았다. 그 돈이 고스란히 그들의 돈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여성들은 미군에게 받은 돈 전부를 포주에게 줘야했다. 포주는 달마다 일정 금액을 제한 후, 여성들의 몫을 지급했다. 포주가 얼마의 돈을 떼어 갈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돈을 주지 않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70~80년대 기지촌의 번화함과는 대조적으로, 기지촌 여성들의 삶은 늘 불안했다. 여러 위협과 폭력에도 노출됐다. 미군이 돈을 주지 않아 실랑이하는 과정에서 살해된 여성도 있었다.

턱거리마을에는 시시때때로 사람이 죽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마을에 살던 사람이 사망하면 기지촌 여성 자치단체인 ‘민들레회’가 ‘꽃상여’를 만들어 장지로 운구했다. 꽃상여에는 흰 종이꽃이 가득 매달려 있었다. 하얀 상복을 입고 꽃상여를 멘 채 캠프 호비 앞을 도는 모습은 장관을 이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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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세상 :: 기지촌 엄마와 마미(mommy)

마을 여성들은 기지촌 여성의 아이들을 돌보며 돈을 벌었다. 아이들은 보모와 같았던 주민들을 잘 따랐다. 그 아이들도 이제 나이를 먹어 쉰을 훌쩍 넘긴 나이가 돼 있을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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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두천 기지촌 마을 시리즈 #4

과거 박정희 정부는 주한미군 주둔을 위해 기지촌 성매매 산업을 활성화시켰다. 기지촌 성노동 여성들을 ‘달러를 벌어들이는 애국자’로 치하하기도 했다. 실제로 동두천 기지촌 미군 전용 클럽에서 한 해 동안 벌어들인 돈은 약 40만 달러에 달했다. 당시 한국의 연간 총 수출액(4천만 달러)의 1%에 달하는 규모였다. 하지만 ‘달러 애국자’라는 애칭이 무색하게도, 정부는 성병 관리를 목적으로 이들을 강압적으로 감금하곤 했다.

기지촌 성노동 여성들이 국가로부터 감금된 곳은 ‘몽키하우스’라 불리던 낙검자 수용소였다. 느닷없이, 그리고 강압적으로 감금된 여성들은 이곳에서 페니실린 주사를 맞았다. 이들은 극심한 통증을 겪었고, 일부는 과민성 쇼크로 사망하기도 했다. 수용소에서 탈출하기 위해 창문에서 뛰어내리는 여성들도 있었다. 수용소 창살에 갇힌 여성들이 마치 동물원 원숭이 같다고, 페니실린 부작용으로 허리가 굽어진 것이 꼭 원숭이 같다고, 그곳은 ‘몽키하우스’라고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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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세상 :: 동두천, 여전히 배제된 여성들의 도시

소요산 주차장 인근에는 버려진 폐허 건물 하나가 숨어있다. 지도상에도 나오지 않는 곳. 굳이 찾으려 애쓰지 않는 한 눈에 띄지 않는 곳. 마치 누가 꽁꽁 숨겨놓기라도 한 듯 잡초와 이끼가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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