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노동 프로젝트/2020 성노동 프로젝트 제 4회 코로나 시대의 성노동

[2020 성노동 프로젝트 제 4회] 데파코트 : 보이지 않는 노동 속의 노동

성노동자해방행동 주홍빛연대 차차 2020. 9. 25. 12:55

보이지 않는 노동 속의 노동, 데파코트

 

보이지 않는 노동 속의 노동

데파코트

 

로맨스 진상, 그들은 누구인가?

 성판매 여성의 인권과 노동권을 이야기하는 책에서 한 남성 필자가 ‘성구매를 하면 성노동자와 진짜 연애로 발전된 가능성도 있다’고 말한 것을 읽고 뜨악한 적이 있다. 1시간에 15~20만 원의 임금을 받고 노동을 제공하는 성노동자에게 일적으로 만나는 것이 아니라 (공짜로) 자신과 섹스 파트너를 하자고 요구한다. 자신보다 10~20살가량 나이 차이가 나는 성노동자에게 ‘네가 이런 위험한 일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네가 나 이외에 다른 남자들과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와 결혼하자’고 한다. 업장에서 노동하는 성노동자에게 ‘술집 말고 밖에서 만나면 안 되냐’고 묻고, 외부 노동에 대한 임금을 지급해줄 것인지 물어보면 ‘왜 우리 관계를 돈으로 바라보냐. 너는 왜 그렇게 계산적이고 돈밖에 모르냐’고 말한다. 성노동자는 임금을 받기 때문에 손님과 대면하는 것인데, 노동에 대한 임금을 주지 않을 때 노동자가 그들을 만나야 할 의무는 어디에도 없다.

 서비스직에 종사하는 여성이 손님을 미소로 친절하게 응대해야 한다는 근로 지침에 따랐을 뿐인데 남성 손님은 노동자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터무니없는 착각에 빠져 ‘너와 결혼까지 생각’한다. 우리 사회는 어떻게 이런 몰상식하고 몰염치한 한국 남성들을 집단적으로 배출하는 것일까. 노동자에게 성구매자인 자신과 사귀어 달라거나, 아무런 대가 없이 업소 바깥에 만나 자신과 데이트를 해달라는 등 성구매자가 지불한 화폐 이상의 혹은 무상 노동을 요구하거나 그 이상의 관계를 요구하는 몰지각한 구매자를 성노동자들은 ‘로맨스 진상’, 일명 ‘로진’이라고 부른다. 성노동자를 잠재적 연애 상대로 여기는 행위는 성노동자를 노동자로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가능한 행동이다.

 예를 들어 여성 노동자가 있는 커피숍에서 자주 커피를 사는 남성 손님이 있다고 가정해보자. 어느 날 이 남성 손님이 커피숍 알바노동자에게 사귀자고 고백하며 일을 마친 후에 함께 데이트를 할 수 있는지 물어본다. 그러나 커피숍의 알바노동자는 그 손님을 연애 상대가 아닌 손님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남성의 고백을 거절한다. 그러자 고백을 거절당한 남성은 ‘내가 여기서 커피를 얼마나 많이 사 먹었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냐. 이럴 거면 왜 나랑 대화할 때 웃어주었냐’면서 역정을 낸다. 이 말을 들은 커피숍 알바노동자의 심경이 이해가 가는가? 그가 커피숍에서 일하는 것은 연애 상대를 찾기 위해서가 아니라 생계를 위한 임금노동으로서 커피를 내리고, 카운터에서 계산을 한 것이다. 그런데 이 남성은 내가 이렇게 커피를 많이 사주었는데 왜 나와 만나주지 않냐며 윽박지르고 있다. 커피숍의 노동자는 매우 당혹스럽겠지만, 이 손님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아도 임금을 받는 데는 지장이 없다. 그렇다면 성노동자가 성구매자의 요청을 거부한다면 어떻게 될까? 아니, 성노동자가 성구매자의 성적 요구를 거절할 수 있는 노동 환경이 조성되어 있을까?

 성노동자에게 가해지는 부당한 노동 착취에 대해 이해하려면 먼저 성노동이 가지는 특수한 노동의 형태에 대한 이해가 수반되어야 한다. 성노동은 일용직 노동으로, 대체로 그날 번 돈을 그날 지급받는다. 또한 성과급제이기 때문에 받은 손님의 수만큼 임금을 지불받는다. 룸 업종을 예로 들자면, 초이스되어 손님이 있는 방에 들어가 방을 봐야지만 임금을 받을 수 있다. 초이스가 되지 않아 손님의 방에 들어가지 못하고 대기하고 있는 시간에 대한 임금은 주어지지 않는다. 8시간을 근무했다고 하더라도  초이스가 되지 못하면 돈을 받을 수 없다. 성과급제 속에서 성노동자에게는 지명손님 유치와 관리라는 보이지 않는 노동이 요구된다. 지명이란 업소에 방문했던 손님이 또다시 같은 성노동자를 지명하여 고용하는, 말하자면 단골 손님과 같은 것이다. 업소는 성구매자의 재방문을 유도하기 위해 지명손님을 받는 성노동자에게 보너스 금액을 준다. 일정한 임금이 보장되지 않는 불규칙하고 불안정한 노동조건 속에서, 초이스를 보지 않고도 방에 들어가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은 큰 이점이다. 때문에 성노동자는 영업 사원이 되어 손님들에게 연락하며 그들이 지명손님이 되도록 관리한다. 임금이 책정되지 않는 것은 손님들과 연락하는 노동만이 아니다. 업소의 코드에 맞는 화장과 의복을 갖추어야 하는 꾸밈노동에서부터 ‘애인 모드’ 또는 ‘연애 모드’와 같은 극한의 감정노동을 생존 전략으로 취하기도 한다. ‘애인 모드’는 성구매자가 성노동자에게 기대하고 요구하는 고도의 감정노동으로, 성노동자가 마치 자신의 여자친구처럼 느껴지게끔 상냥하고 살갑게 대하여 연애하는 기분을 느끼게 해주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성구매자가 기대하는 ‘애인 모드’ 속에는 자신의 성적 요구, 성적 접근에 대해서 거부하지 않을 것이 포함되어 있기도 하다. 성노동자에게 ‘애인 모드’는 가면을 쓴 일종의 연극적 행위로, 손님에게 성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 싫지만 좋은 것처럼 행동하는 것, 성적 접촉이 싫지만 쾌감을 느끼는 것처럼 오르가즘을 연기하는 것 등이 있다.

 성구매자들은 성구매자 네트워크를 구축하여 ‘후기’를 공유하면서 성노동자의 외모와 신체, 성서비스에 대해 품평하는데, ‘애인 모드’를 수행하지 않는 성노동자에 대해서 악평을 남긴다. ‘애인 모드’나 외모 등에 대한 악평을 받은 성노동자는 손님들이 찾지 않기 때문에, 성노동자들은 생계를 지키기 위해 자신이 세운 성적 경계를 타협하게 된다. 또한, 성구매자의 후기 시스템은 성노동자를 협박하는 빌미가 되기도 한다. 성구매자들은 성관계가 없는 비관계 업종 업소에 찾아가 성노동자들에게 ‘나와 섹스를 해주지 않으면 사이트에 후기를 나쁘게 적겠다. 섹스해주면 좋게 후기를 적어줄 것인데 너도 좋고 나도 좋은 것 아니냐’는 식의 회유와 협박을 통해 성노동자의 성적 자기 결정권을 축소하고 침해한다. 이러한 메커니즘은 성노동자의 몸에 ‘애인 모드’를 장착할 것을 요구한다. 이와 같은 노동 환경 속에서 성노동자는 손님에 대한 자신의 생각이나 의사와는 무관하게, 때로는 정반대로 영업용 ‘애인 모드’를 수행하게 된다. 그것을 모르지 않으면서 성노동자에게 사귀자고 요구하는 이중성은 어디서 오는가?

 서비스직 종사자가 고객이 욕설을 퍼부어도 존댓말로 친절히 응대해야 하듯, 성노동자들 역시 고객의 폭력이나 터무니없는 요구사항을 참고 인내해야 한다. 성구매자로부터 외모 평가나 욕설, 모욕, 음담패설 등의 언어폭력을 당해도, 구매자가 임금을 지불하는 고용주와 유사한 위치에 있기 때문에 저항하거나 문제 제기하기가 어렵다. 나를 해고할 수 있는 인사권을 쥐고 있거나 불이익을 줄 수 있는 권력을 가진 이에게 해고당할 것을 감수하고 부당 행위에 대해 문제 제기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이러한 권력의 작동뿐만 아니라, 성노동을 불법화하는 사법폭력은 성산업 내외부에 존재하는 폭력에 대해 문제 제기할 수 있는 노동환경의 조성을 가로막고 있다. 성구매자와 성노동자 간의 불평등한 권력 관계를 제재하는 장치가 부재하는 현실 속에서, 성노동자는 구매자에게 폭행이나 강간을 당해도 신고를 꺼린다. 특히 ‘2차’가 있는 관계업종의 경우, 폭행이나 성폭력을 경찰에 신고하면 피해자인 성노동자도 ‘성매매한 자’가 되어 성매매특별법에 의해 처벌받기 때문에 신고라는 선택지 자체가 원천 봉쇄되어 있다. 성매매에 관한 법이 존재하지만, 그 법이 성노동자의 인권이나 성폭력으로부터 안전할 권리를 지켜주지 않는다. 이러한 허점을 잘 알고 있는 성구매자들은 성노동자는 법의 보호를 받을 수 없는 존재라는 인식하에 성노동자들을 때리거나 성폭행한다. 성노동자가 자신과 사귀어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성매매특별법을 근거로 경찰에 신고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경찰은 어떨까? ’#경찰이라니_가해자인줄’ 해시태그에서 살펴볼 수 있듯이, 성매매 단속에서 빼주겠다는 조건으로 경찰이 업소에 금품과 성상납을 요구하기도 한다. 경찰이라는 점을 이용해 성구매를 한 뒤에도 성노동자의 서비스에 대한 임금을 지불하지 않기도 한다.

 N번방 피해자들 중에는 스폰을 매칭해주겠다는 제안에 응해 본인의 사진이나 은행 계좌를 가해자에게 전송한 이들이 있다. 그렇다면 이들은 성착취와 성폭력을 당했어도 ‘그렇게 살았으니까, 성폭력을 당할 만한 위험한 행동을 했으니까, 사회적으로 떳떳하지 못한, 불법적인 일을 하려고 했으니까 그런 일을 당하는 것이다’라는 말을 들어도 괜찮은가? 성노동자들은 성매매 업소에서 일했으니까, 조건만남을 구해 성구매자와 모텔방에 들어갔으니까, 불법으로 규정된 일을 하니까 맞아도 되고, 성폭력을 당해도 싼 존재들인가? 성노동자가 당하는 성폭력을 당연시하고 정당화하는 가부장제 남성중심주의의 각본과 문법을, 성구매자뿐만 아니라 페미니스트들까지 계승하고 구사하고 있다. 이런 사회 속에서 ‘성폭력으로부터 보호받아야 할 여성’과 ‘성폭력을 당해도 되는 여성’의 이분법은 재생산되고 강화되고 있다. 과거에 사회 제도는 여자는 성적으로 깨끗해야 한다는 순결 이데올로기에 기반하여 밤늦게 돌아다닌 여성, ‘처녀’가 아닌 여성, 짧은 치마를 입은 여성은 성폭력을 당할 만한 여성, 성폭력을 당해도 되는 여성으로 규정하였다. 반성폭력 운동이 지향해온 것이 그러한 이분법과 순결 이데올로기를 부수고 여성의 성에 대한 가부장제의 분할 통치와 억압에 저항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성노동자 배제적 페미니스트들이 순수하고 무결한 피해자와 ‘성폭력의 일정 부분 책임이 있는’ 피해자를 재단하는 반동적인 양상이 포착된다.

 이 사회에서 성노동은 천한 직업이고, 성노동자는 함부로 대해도 되는, 인권이 없는 존재라는 인식이 기저에 깔려 있기 때문에 성노동자의 노동권과 처우 개선에 대한 요구들은 쉽게 묵살되거나 조롱당한다. 또 한편으로 성노동자는 ‘성을 파는 성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얼마든지 성폭력을 당해도 되는’ 존재로 상정된다. 그래서 많은 성구매자들이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은 성적 행동을 성노동자에게 시도하고 ‘좋았는지’, ‘느꼈는지’ 묻는다. 이와 유사하게 성노동자 배제적 페미니스트들 또한 성노동자는 성산업에 종사하기 때문에 성폭력을 당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주장한다. 성구매자와 성노동자 배제적 페미니스트들이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면 그것은 ‘현직 창녀도 인간 대우를 해줘야 하느냐’는 것일 것이다. 이러한 사회의 부정적인 인식 속에서 성노동자는 자신이 노동 현장에서 당하는 부당한 노동 착취와 성폭력에 대해 말할 수 없게 되고 침묵을 강요당한다. 성노동자의 증언을 탄압하고 은폐하는 것이 착취의 해결책이 될 수는 없다. 분명한 것은 억압이 존재하는 현실 속에서 피억압자의 말하기를 중단시키고, 피억압자의 행동반경과 삶의 양식을 교정하고 단속하는 방식으로 종식되는 착취는 착취의 종식이 아닐 거라는 사실이다. 그것은 착취의 비가시화, 착취의 자연화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작가 소개글 : 안녕하세요. 데파코트라고 합니다. 성노동을 하면서 겪는 정신건강의 문제나 힘겨움, 주변의 혐오와 낙인에 대해 성노동자가 자신의 목소리로 자신이 겪는 경험을 말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말할 때 세상이 바뀐다고 믿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