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히 1953년 주한미군사령부가 용산기지로 이전하면서 용산에서는 미8군의 역사가, 인근의 이태원에서는 기지촌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창녀들의 언덕(hooker hill)”이라 불리는, 이태원 소방서 인근에 소위 “양키 바” 밀집 지역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도 1950년대 후반이었다. 덧붙이자면, 루인의 논문 ‘캠프 트랜스: 이태원 지역 트랜스젠더의 역사 추적하기, 1960~1989’가 밝히듯 이태원 기지촌 여성들의 역사는 트랜스젠더 여성들의 역사이기도 하다.
이태원의 전성기라고 알려진 1988년은 반미시위가 가장 많이 열린 해이기도 하다. 민주화 이후 미국이 빼앗아간 것을 되찾으려는 열망이 들불처럼 일어났고, 이때 기지촌 여성들의 몸이 매개한 “양키”와 ‘미국적인 것’에 가장 손쉽게 추방 명령이 떨어졌다. 기지촌 여성들은 미군 범죄의 피해자로 드러날 때만 오직 같은 민족이 될 수 있었다.
1990년대 한국 사회 전반이 국제화되면서 이태원의 특수함은 희석되었다. 기지촌 경제에 의존하던 지역 상인들은 불황에 대비한 자구책을 마련해야 했고 ‘미국적인 것’을 ‘국제적인 것’으로 빠르게 번역하여 호주머니 사정이 좋아진 내국인 소비자를 유치하고자 했다. 동시에 1997년 이태원은 서울시에서 최초로 관광특구로 지정되었다. 같은 해 경기도 기지촌 지역 역시 관광특구로 지정되었음을 볼 때, 구시대 식민화되고 여성 착취적 역사의 흔적들은 지자체와 상인들의 노력을 통해 새로운 문화 관광 상품으로 둔갑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 그곳을 떠나지 못한 여성들은 생존의 어려움을 경험하게 되었다. 2001년 9·11 이후 미군 본부는 테러에 대한 대책을 강화하였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이태원 “양키 바”는 감시의 표적이 되었다. 얄궂게도 매년 엄청난 인파가 몰리는 이태원 지구촌 축제는 그 직후인 2002년부터 시작되었다. 특히 2012년부터 미군 부대가 점진적으로 평택으로 이전하면서 이태원에서 기지촌 경제는 저물고 상품성 있는 다문화 경제가 부상하였다.
오랜 시간 주민이었던 기지촌 여성들은 이제 이태원에 머물러 사는 것도 어려워졌다. “후커힐” 골목은 2017년 재정비 촉진구역에서 해제되었으나 이미 이태원은 2016년, 2017년에 걸쳐 전국에서 가장 땅값이 많이 오른 투자 유망지로 떠오르고 있었다. 금융 전문가들은 이태원을 “돈의 메카”로 부르며 투자 유망 지역으로 꼽았다.
읽기 : [기억전쟁, 미래가 된 과거](6)기지촌에서 투기촌으로 바뀐 이태원, 혐오와 망각의 여성착취사 - 경향신문 (kh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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