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회, 세미나, 라운드 테이블/2023 탈시설 기획 토론회 : 성매매 여성과 시설의 역사

[후기] 보리, 탈시설 기획 토론회 : 성매매 여성과 시설의 역사

성노동자해방행동 주홍빛연대 차차 2023. 6. 14. 15:46

photo by. 은석

 

탈시설 기획 토론회 : 성매매 여성과 시설의 역사 후기

 

보리

 

성노동자와 비인간동물, 서로 동떨어져 있어 보이는 두 존재가 꽤나 연결되어있다는 것을 느꼈던 토론회였다. 토론회를 시작하기에 앞서 패널 중 한 분이 탈시설 담론에 끼고 싶었지만 딱 맞아떨어지지 않는 부분도 있었다는 말을 하셨었는데, 나 또한 장판의 언어들로 생추어리를 설명하려는 시도를 했었기 때문에 공감이 되었다. ‘이건 생추어리와 겹치는 내용인데’, ‘소름 돋게 내가 했던 생각이랑 비슷한데’ 하는 부분들이 있어서 좋았고, 말하기 어려웠던 얘기를 꺼내고 그것에 다시 사람들이 공명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새벽이생추어리도 저렇게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만들었었다. 다시 한번 토론회를 주최해주신 분들께 감사의 인사를 전하며, 발제를 들으며 생추어리와 겹쳐 보였던 부분들을 중심으로 얘기해보려고 한다.

‘새벽이는 탈시설한 동물’이라는 표현을 들었을 때 맞는 말이지만 딱 맞아떨어지진 않다고 생각했는데, 생추어리가 시설의 요소를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유엔장애인권리협약은 시설이 단순히 어떤 담장 또는 벽으로 구성된 건물이 아니라 시스템 혹은 문화라고 하면서 소수의 인원이 거주하더라도 시설의 요건을 갖추고 있다면 시설이라고 말한다. 유엔장애인권리협약에서 말하는 시설의 요건은, 거주하는 공간 밖에 나가고 싶을 때 마음대로 나갈 수 없는 것, 먹거나 자는 시간을 자신이 결정할 수 없는 것, 내가 하고 싶지 않은 활동을 해야 하는 것, 같이 사는 사람을 내가 결정할 수 없는 것, 활동 지원을 원할 때 자유롭게 받을 수 없는 것 등이 있다. 해수님이 발제해주신 성매매 여성 쉼터를 경험한 인터뷰이의 사례에서, 외출과 외박이 자유롭지 않았다는 점, 쉼터에 머물기 위해선 원하지 않더라도 해야 하는 일들이 있다는 점, 자치 회의가 형식적이고 입주자의 요청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점 등이 시설이라고 할 수 있는 조건인 것 같다. 생추어리도 생추어리 바깥으로 외출이 불가능하다는 점 (몸집이 작은 잔디는 보듬이의 동행하에 외출하지만 보듬이보다 커서 물리적으로 통제할 수 없는 새벽이는 외출이 불가하다), 먹는 시간을 생추어리 운영자가 정했다는 점, 돌봄 (지원)을 받는 시간이 제한되어 있다는 점 등이 시설의 요건을 충족한다. 생추어리는 대안적인 관계를 추구하는 공간이지만, 입주민이 생추어리 바깥을 나갈 수 없고 평생을 사는 곳이라는 점에서 아무리 좋은 생추어리라도 결국엔 좋은 시설이라는 태생적인 한계가 있다.

동물권 운동은 반성매매 운동이 했던 것처럼 거대한 산업을 가시화하고 이것은 폭력이라고 호명하는 단계에 있다. 운동의 의미를 전달하고 후원을 받으려고 하다 보면 앞서 말한 한계들을 전면적으로 얘기하기 어려워지는 것 같다. 하지만 성매매여성 쉼터도 처음엔 여성운동의 일환으로 성매매피해자의 피해회복과 자립을 위해 만들어졌을 텐데 경악스러운 사례들이 나올 정도로 시설화되었듯이, 생추어리 또한 자신의 한계를 직시하지 않고 운동적인 의미만 강조한다면 지원받는 당사자의 관점을 놓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생추어리가 더 확대되려면 제도적인 지원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었는데, 사회 구조를 변화시키지 않으면서 ‘정상성’을 놓지 않으려는 사회의 구미에 맞는 조건으로 제도화가 되어 턱없이 부족한 지원을 받는다면, 생추어리 또한 시설화된 쉼터가 될 수 있다는 경각심을 가지게 됐다. 입주민 개개인의 역사와 특성을 고려하면서 개별적인 돌봄 지원을 하기 위해선 충분한 시간 속에서 관찰과 관계를 쌓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에, 돌봄의 질을 유지하려면 현재 새벽이생추어리는 입주자를 더 받기 어렵다. 만약에 충분한 자원 없이 실적만을 위해 더 많은 입주자를 받는다면 입주민들의 트라우마적인 행동을 공격적이라고 쉽게 단언하거나 입주민이 불편함을 행동으로 표현할 때 환경을 바꿔주기보다 개인의 행동을 교정하려는 등 생추어리 내부에서 입주민을 추상적으로 판단하고 규율하려는 시도로 이어지기 쉬울 것이다.

이런 쉼터의 시설화에 대한 비판과 별개로, 더이상 갈 곳이 없는 성노동자에겐 시설화되었을지라도 쉼터가 하나의 선택지이고 거대한 성산업의 규모를 생각했을 때 쉼터의 수와 자원은 턱없이 부족하다. 마찬가지로 농장 동물이 생추어리로 오지 않았다면 축산업 안에서 죽임당하거나 돌봄이 없어 생존하기 어려웠을 것이기 때문에 생추어리가 가장 나은 선택지이고, 생추어리에 와서 죽음을 면할 수 있는 이들은 매년 축산업으로 죽는 이들에 비해 티끌같이 적다. 결국 농장 동물에겐 죽는 시설(축산업)과 사는 시설(생추어리)밖에 선택지가 없는 것이다. 몸을 착취하는 거대한 산업도, 착취적인 산업의 피해자를 지원하는 쉼터도 사회와 분리된 공간에 위치하여, 사회가 이들을 시설화의 굴레 속에서 살아가게끔 한다는 점은, 성노동자도 생추어리로 오게 된 농장 동물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요즘 축산업 속에서의 삶, 생추어리에서의 죽음의 위협을 같이 다루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축산업 피해당사자는 삶을 연속적으로 경험하기 때문이다. 물론 삶이 구조되기 전과 후가 엄청나게 달라지는 건 사실이지만, 구조로 단번에 바뀌지 않는 것들도 있다. 축산업이 이윤을 최대한 뽑아내기 위해 살이 불어나도록 개조한 몸과 축산업에서 겪었던 학대의 경험을 피해자는 고스란히 안으며 살고 있고, 매년 전염병이 돌고 병이 발생한 지역에서는 병을 예방한답시고 살처분, 대량 학살을 하기 때문에 삶을 보장하려고 노력하는 생추어리에서도 죽음의 위험이 있다. ‘폭력적인 산업에서 탈출해 구원자들의 품에 안전하게 안긴다’고 한들 사회에서 피해자의 지위가 바뀌지 않는 한 바뀌지 않는 것들이 있는 것이다.

해수님이 ‘탈시설이라고 해서 쉼터의 전면 폐지를 주장하는 게 아니’라고 말했듯이, 착취적인 산업의 피해자를 지원하는 쉼터에게 필요한 것은 충분한 지원과 애정 어린 비판이다. 그리고 토론 중에 들었던 말처럼, 좋은 시설을 만들기 위한 노력이 탈시설 운동과 같이 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생추어리가 좋은 쉼터가 되기 위해서, 더 나아가 새벽이와 잔디가 정말로 탈시설해서 생추어리 바깥에서도 잘 살 수 있기 위해서 필요한 건 ‘주거의 공공성과 삶을 향유하기 위한 자원의 보장’이라고 생각한다. 지금 생추어리는 땅주인의 사정으로 인해 다른 땅으로 이사를 갈 준비를 하고 있는데 땅값이 비싸 돈이 많이 필요하다. 새벽이와 잔디도 돈 없는 세입자이고, 원하는 곳에서 계속 주거할 권리, 충분히 넓은 공간에서 주거할 권리가 필요하다. 그리고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하다고 여겨지곤 하는 새벽이, 잔디도 단지 살아있는 생존을 넘어 좋은 삶을 누릴 권리가 있다. 먹히던 존재에게 충분히 좋은 삶을 누리기 위한 자원이라니, 멀고 불가능한 미래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정말 모두가 해방되기 위해서는 유일한 길인 것 같다. 각자의 자리에서 또 같이, 해방의 길을 모색해나갔으면 좋겠다.

* 보리는 새벽이생추어리에서 활동하고 있다. 새벽이생추어리 모르시는 분들은 홈페이지 들어가 보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