섹스-노동을 신성화하고 성노동자 혐오를 확산하는 맥키넌 교수의 발언을 규탄한다.
주홍빛연대 차차 활동가 우주
성희롱의 법적 개념을 정립한 법학자이자 반성매매-반포르노그래피 페미니스트로 유명한 캐서린 맥키넌 교수가 12월 4일부터 8일까지 한국을 찾았다. 한국여성인권진흥원, 성매매문제해결을위한전국연대 등 여성단체가 주관한 강연 및 기자 간담회에서 그녀는 ‘성노동’ 개념에 대한 부정적 인식 및 성노동자에 대한 획일적 인식을 당당히 드러냈다. 자신의 입장이 성노동자를 피해자화하는 것 아니냐는 질문에는 아래와 같이 답했다. “사람들이 여성이 가진 권력이 많다고 생각하는 것에 항상 놀란다. 우리에게 여성을 피해자로 만들 권력 있는 것처럼 말이다.”
권력은 유동적이고 상대적이다. 여성들에 의해 자행되었던 성노동자 혐오는 남성들이 행해왔던 혐오만큼이나 그 역사가 깊다. 성노동자를 전염병의 온상, 여성 인권의 장애물로 여기거나 계몽, 구출, 회복, 치유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페미니스트들의 입김은 예나 지금이나 여전하지만, 그들에 의해 납작하게 인식돼버린 성노동자들의 삶은 더욱 취약해지고 있다. 맥키넌 교수 역시 40년 전부터 이어오던 차별적 인식을 이번 강연 및 기자 간담회에서도 여과 없이 드러냈다. 매키넌 교수는 “성노동이라는 용어가 거짓말”이라고 주장하면서 성매매는 “친밀성과 상호성이 없기 때문에” 섹스가 아니고, “생산성과 존엄성이 없기 때문에” 노동이 아니라고 이야기했다. ‘섹스의 신성화’, ‘노동의 신성화’라는 근대적 규범에 입각하여 그녀는 “성매매에서 생존하기 위해서는 탈성매매가 이뤄져야 한다”는 말도 덧붙였다.
‘섹스의 신성화’ 관념은 매키넌 교수뿐만 아니라 반성매매론자들의 입장 곳곳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진정한 섹스’라면 상대를 알아가려는 지난한 노력이 필요한데, 그러한 노력이 보이지 않는 상업적 성거래는 섹스라고도 할 수 없으며, 그저 상대의 몸을 구매하고 통제하기 위한 권력 행사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에 따르면, 캐주얼한 섹스를 즐기는 원나잇 스탠더, 서로의 성향에 맞추어 섹슈얼한 만남을 제안하는 논모노가미스트나 BDSMer, 로맨틱한 끌림 없이 섹슈얼한 끌림만을 느끼는 에이로맨티스트의 섹스 역시 문제적이다. 낭만적 사랑 이데올로기와 섹스에 대한 근대적 규범화가 다양한 섹슈얼리티 사이의 위계를 생산하고 성소수자들에 대한 부당한 차별을 야기해왔음을 비판해온 페미니즘의 역사를 떠올린다면, 저 주장이 얼마나 시대착오적이며 성소수자 배제적인지 더 상술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다만 상업적 성거래가 규범적 섹스의 이미지를 벗어났다는 이유로 비판받아야 한다면, 그 잣대에서 벗어난 여타의 성적 실천 역시 비판을 면할 수 없다.
생산성과 존엄성이 없기 때문에 성매매가 노동이 아니라는 발언 역시 문제가 있다. 생산성을 잣대로 노동과 비노동의 경계를 나누던 관행은 역사적으로 젠더 차별, 장애인 차별을 양산하는 원인이었다. 비장애인 남성들이 담당했던 활동만이 생산적 가치를 창출하는 노동이고, 그 밖의 주변화된 존재들의 활동은 노동으로 인정받지 못했던 사회적 흐름에 맞서, 페미니스트들은 부불 재생산노동의 가시화 및 가치 인정을 요구하는 운동을 지속적으로 펼쳐왔다. 이때 생산노동으로 인정되지 않았던 활동을 ‘노동’으로 명명하는 일은 ‘가사노동에 대한 임금 지불 운동’에서처럼 페미니스트들이 활용한 주요 전략이었다. 엘리 혹실드의 ‘감정노동’ 같은 용어에서부터 수잔 모샤트의 ‘아내노동’, 소피 루이스의 ‘임신노동’, 그리고 성판매자들의 ‘성노동’에 관한 이론적 작업에 이르기까지, 젠더화된 노동의 비가시적·자연적인 구조에 이름을 붙이는 작업은 우리가 어떻게 집단적으로 위와 같은 노동을 가시화하고 가치화하여 주변화된 노동자들의 존엄을 되찾을 수 있는지 모색하는 출발점이었다.
생산성과 존엄성을 노동의 성립 근거로 삼는 생각의 이면에는 노동은 좋은 것이어야 한다는 ‘신성화된 노동’ 관념이 깔려있다. 맥키넌 교수에게 성매매가 노동이 아닌 이유는 그것이 좋은 노동의 상상적 이미지와 다르기 때문이다. 성매매는 노고와 고통, 저주와 처벌에 가까운 착취이므로 노동이 아니라는 반성매매론의 입장, 그리고 성매매는 보람과 성취, 자기표현과 자아실현의 장이므로 노동이라는 반비판적 입장 모두 ‘노동은 좋은 것이어야 한다’는 관념에서 다르지 않으며, 노동이 근본적으로 이중적 성격을 띤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다. 그러나 성노동자들을 포함한 모든 노동자들은 상황에 따라 노고와 고통, 보람과 성취를 복합적으로 느끼는 입체적 존재이다. 맥키넌 교수는 규범적 노동의 이미지에 사로잡힌 나머지, 다층적 서사를 지닌 성노동자를 끊임없이 피해자로 위치시킴으로써 성노동자들이 자신의 노동에 고유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자꾸만 입증하도록 만든다.
물론 성산업 안팎에서 벌어지고 있는 문제들은 심각하다. 성구매자와 관리자들의 착취적 관행은 변함이 없으며, 성구매자에 대한 처벌을 명시한 성특법 하에서도 그들의 행위는 제대로 처벌된 적이 없다. 친밀한 감정, 상호적 존중, 동등한 협상, 기꺼운 감정노동 등은 친밀성 실천, 고용‧노동 관계를 포함한 모든 곳에서 필요한 윤리이다. 하지만 누군가의 노동이 상품화되는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이러한 태도는 빈번히 생략된다. 성노동자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노동자들이 인간적인 대우를 받지 못한다. 폭력적인 산업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그 산업을 둘러싼 구조적 문제들을 개선해야 한다는 인식으로 이어지는 게 보통이지만, 성산업의 경우 노동자에 대한 존중을 회복하고 폭력의 감소시키려는 개선책보다 그 산업 자체를 파괴하고 없애야 한다는 근절책, 성노동자를 구출해야 한다는 구제책이 먼저 튀어나온다. 맥키넌 교수 역시 취약한 사람들을 성산업으로 유입시키는 ‘구조적 문제’를 언급하면서도 일단 “탈성매매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주장을 고수하고 있으며, 우리를 둘러싼 ‘구조적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한 ‘탈성매매자’들이 다시 성산업으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다는 점을 무시한다.
성산업 유입의 물질적‧경제적 원인을 피상적으로만 사유해왔던 반성매매의 경향은 경찰력을 강화하고 성노동자를 더욱 취약한 상황으로 빠뜨린다. 일례로, 맥키넌 교수는 과거부터 “구매자가 사라지면 판매자, 즉 인신매매범도 사라질 것이다.”라고 단언하면서 ‘성판매자’를 ‘인신매매범’으로 규정하고, 성판매자들이 경제적 유인에 의해 움직일 수 있다는 사실을 지워버림으로써 사람들을 형법적 처벌에만 매달리게 만든다. 맥키넌 교수가 기자 간담회에서 언급했던 크레이그리스트와 백페이지닷컴 사이트 폐쇄 운동 역시 성노동자들에게 더욱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한 바 있다. 성노동 광고 웹사이트 제공자를 처벌하는 SESTA-FOSTA 시행 이후, 미국의 성노동자들은 폭력적 성구매자 정보를 얻지 못한 채 실내에서 길거리 성노동으로 옮겨갈 수밖에 없었고, 성노동자들을 향한 폭력, 그리고 사망 사건은 더욱 증가했다. 사람들의 물질적·경제적 욕구가 형법을 통한 성매매 근절책으로는 해소되지 않는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을 망각한 사람들은 성노동자의 탈성매매 이후 수입을 대체할 방법이 무엇인지, 혹은 그들이 필사적으로 그 수입을 메우려고 할 때 무엇이 그들의 안전에 영향을 미치는지 더 이상 고민하지 않는다. 성노동자가 경찰로부터 빈번히 성폭력을 당한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맥키넌 교수가 경찰 기구를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감옥이 ‘포주와 거리로부터 멀어져 잠시 휴식’할 수 있는 공간이라고 말하거나, 성노동자들의 감방 생활을 미화하는 듯한 글을 쓰고, 심지어 “많은 매춘 여성들에게 감옥은 피해자 쉼터와 가장 가까운 곳”이며, “다른 은신처나 쉼터가 없는 것을 고려한다면 감옥은 안전한 임시 거처를 제공한다.”는 말을 인용했던 것 또한 이 때문이다.
요컨대, ‘섹스의 신성화’가 성거래를 정상적 섹스 밖에서 인간관계를 파괴하고 사회를 병들게 하는 행위로 위치시킨다면, ‘노동의 신성화’는 성판매를 노동이 아닌 것으로 배제함으로써 사회적으로 취약한 사람들을 더욱 궁지로 몰아놓는다. 맥키넌 교수는 성노동자들이 자신의 경험을 하나의 틀로 설명하게 만들고, 처벌받지 않고 생계를 꾸려나갈 자격이 있음을 주장하기 위해 성산업 방어에 나서도록 만든다. 하지만 직장에서 안전을 보장받기 위해 자신의 노동이 사회 내 고유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성노동자들이 자꾸만 증명하도록 해서는 안 된다. 더 많은 사람들의 노동이 더 가치 있는 것으로 폭넓게 인정받는 것, 원하지 않는 노동을 하지 않을 권리를 보장받는 것은 맥키넌 교수가 언급한 탈성매매 전략이나 성노동 범죄화를 통해 이룰 수 없다. 주변화된 사람들의 물질적 필요와 생존 전략을 사소하게 취급하는 방식으로도 이를 이룰 수 없다. 성판매에서 ‘친밀한 감정, 상호적 존중, 동등한 협상, 기꺼운 감정노동’ 등이 잘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은 그러한 윤리가 당연하게 여겨질 수 있는 노동환경과 문화를 만들어야 한다는 근거일 뿐, 그것이 노동이 아니라는 근거가 될 수는 없다.
주홍빛연대 차차는 캐서린 맥키넌 교수의 성노동자 혐오 발언이 마치 '반성매매' 진영의 근거있는 다른 주장일 뿐, 혐오 발언이 아니라며 방관하는 주최진을 규탄한다. '반성매매' 운동이 제대로 이루어지려면, 당장 성노동자 혐오를 멈춰야 할 것이다.
2020년 01월 01일
주홍빛연대 차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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