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노동 프로젝트/2019 성노동 프로젝트 제 1회 성노동 글쓰기

[2019 성노동 프로젝트 제 1회] 밀사 : 우리의 오랜 연대를 위하여

성노동자해방행동 주홍빛연대 차차 2019. 9. 14. 18:22

우리의 오랜 연대를 위하여

밀사

이 글을 쓰기 전에도 계속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계속 생각합니다. 이 이야기를 감히 나 까짓 게 해도 되는 걸까? 그런 마음이 있습니다.

저는 성노동자 권리모임 지지에 소속된 활동가로서 11년 봄부터 14년 여름까지 활동했습니다. 그리고 14년 성노동자 권리모임 지지 후원금 유용 사태의 주요 인물이기도 합니다. 저는 후원금 유용이라는 실책을 저질렀고, 이로 인한 부정적인 여파는 제가 감히 미루어 짐 작할 수 없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와 관련된 저의 사과문 및 현황 공유는 ideophobia.egloos.com에서 확인 가능합니다.) 언젠가는 14년 지지 후원금 유용 사태 안팎의 일을 정리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한국의 성노동 운동은 계속 이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운동의 전사, 특히나 실패 사례를 정확하게 기록하고, 평가하며, 그에 따른 전망과 비전을 제시하는 일 역시, 과거에 한때나마 운동에 몸담았던 사람이 마땅히 져야 할 책임이고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 글에서 저는 개인적인 잘못에 대한 소회를 최대한 배제하며, 가능한 한 내부인이었던 외부인으로서, 제가 몸담았던 11년에서부터 14년 사이의 지지의 운동에 대한 간단한 평가를 적고자 합니다. 부족한 글이지만 이 글이 현재와 미래에 한국에서 성노동 운동을 실천하는 모든 분들께, 성노동자 권리모임 지지의 후원금 유용 사태를 기억해주시는 모든 분들께, 그리고 한국의 성노동 운동을 비판적으로든 전폭적으로든 지지하시는 모든 분들께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1.


성노동자 권리모임 지지는, 민주성노동자연대의 운동에 연대하는 비당사자 연대조직인 ‘성노동운동 네트워크’를 그 전신으로 하는, 14년 당시까지는 유일한 성노동 운동 조직이었습니다. 민주성노동자연대가 와해되면서 성노동운동네트워크 역시 길을 헤매고 있었고, 그 와중에도 성노동 운동은 줄곧 이어져야만 한다는 문제의식 아래 09년 하반기에 조직된 것이 ‘성노동자 권리모임 지지’입니다(이하 ‘지지’). 하지만 11년 초까지 지지에는 당사자 활동가가 없었고, 지지가 할 수 있는 것은 한국의 성노동자 이슈를 기민하게 포착하며 연대하는 것이었습니다. 민주성노동자연대가 적을 둔 평택 쌈리 집결지에서 아웃리치 활동도 여러 번 진행했지만, 기층 운동조직이 와해된 곳에서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습니다. 일본에서 살해된 한국인 성노동자 ‘하루코’를 기리고 그 죽음을 알리기 위한 전시였던 ‘목소리전’은 특기할 만한 지지의 활동이었습니다.

지지의 활동은 11년 여름, 대만의 성노동 운동 조직 COSWAS와의 만남을 기점으로 가시화되기 시작합니다. 이 과정에서 지지는 당사자 활동가들을 조직원으로 받게 됩니다. 그들은 자신이 가진 당사자성을 기반으로, 트위터를 위시한 SNS에서 성노동론 담론을 확산하는 데에 노력을 기울입니다. 이런저런 이력들이 발판이 되었습니다. 마침내 지지의 활동이 본격적으로 가시화된 계기는, 지지를 인터뷰한 12년 한겨레 21 특집 기사가 나오면서부터입니다.

물론 당시의 지지는 한국 유일의 성노동 운동 조직이었습니다만, 활동 회원 열몇 명 안팎의 작은 단체 이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한 달에 한 번 회의를 열고 해야 할 일들을 열심히 모색했지만, 우리 각자가 갖고 있는 성노동론에 대한 생각, 운동의 비전을 충분히 나누지 못했습니다. 반상근자를 제외한 활동가들은 각자의 생업을 가진 채로 시간을 쪼개 활동에 참여했습니다. 회비는 비정기적인 외부 후원금을 제외하고는 회원들끼리 십시일반 하여 모았으며, 모은 회비의 대부분은 상근비로 지출되었습니다. 11년 당시 상근비는 한 달 40만 원. 13년 중반부터는 한 달 60만 원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성노동자 권리모임 지지가 치중한 것은 문화 운동이었습니다. 당사자와의 소통 창구가 사실상 전무하다시피 했으며, 여전히 비주류인 성노동 담론을 널리 알리기 위한 최적의 수단이 문화 운동이라는 판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조직에 있었던 기간 동안의 대표적인 활동으로는 대중 강연 <안전한 섹스, 즐 거운 섹스>가 있겠습니다. 한편으로 치중한 것은 신문 등의 기사 인터뷰입니다. 매스미디어의 힘을 빌리 면 담론 확산을 보다 효과적으로 이룰 수 있다는 판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당사자성을 지닌 활동가들의 지속적인 SNS 담론 확산 활동이 있었습니다. 저를 포함한 이들은 일상적으로, 상당한 시간을 SNS를 운영하는 일에 투여하고, 공을 들였습니다. 또한 여러 운동에 연대하는 것에도 힘을 기울였습니다. 성매매 관련 이슈가 있을 때마다 양질의 성명문을 내는 것도 놓치지 않고자 했습니다. 마지 막으로 헌법소원을 위시한 법률 투쟁, 성노동자 당사자를 위한 온-오프라인 상담 창구 조직 역시 지지가 추진했던 사업입니다.

지금 돌아보건대, 당시의 성노동자 권리모임 지지는 조직이 가진 역량에 비해, 너무 많은 일들을 벌였다고 판단합니다. 우리는 충분히 사유하지 못했고, 서로를 돌아보지 못했습니다. 한국 유일의 성노동 운동 조직이라는 부담에 눌려, 내실을 다지고 내부 역량을 강화하는 활동은 줄곧 뒷전으로 밀어놓았습니다. 14년에 지지를 탈퇴한 후로부터 거진 1년은 매일, 끊임없이 지지에서의 지난 일들 그리고 지지 후원 금 유용 사태에 대해 생각하고 또 생각했습니다. 후원금 유용이라는 사건과 더불어 활동가로서의 과거에 대해 가장 큰 후회가 드는 것은, 내부 역량을 충분히 다지고 강화하기 위한 활동을 하지 못하고, 활동가로서 지친 우리 자신과 서로를 충분히 돌아보고 보듬을 시간을 충분히 가지지 못한 것입니다.

 

2.


지금부터 하는 이야기는, 14년도에 지지에 몸담았던 저 자신을 위한 변명 같은 것이라기보다, 지지뿐만 아닌 다른 운동 조직에서 반상근 내지 상근으로 활동하는 활동가들 모두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이자, 운동이 세상을 바꿀 수 있으리라 믿는 모두가 알아야만 하는 이야기라고 생각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활동가들은 충분히 쉬어야 합니다. 그들의 일상은, 활동을 전혀 하지 않는 시간에마저 활동에 잠식되어있습니다. 활동가들에게는 최소 일주일에 하루에서 이틀 정도는, 활동에 대한 생각을 완전히 끊고 의식적으로 휴식에 전념하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활동 그 자체를 업으로 삼으며 활동 후원금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반상근 내지 상근 활동가는 더더욱 그러합니다. 그들은 조직의 넉넉지 못한 사정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습니다. 또한 자신이 몸담은 운동을 위해 어떤 활동들이 시급한지를 언제나 곱씹습니다. 더 잘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고 있다는 자책에 상시적으로 노출되어 있습니다. 이들은 상시적으로, 활동으로 인한 스트레스를 경험합니다. 마치 게임 안에서, 체력과 기력을 지속적으로 깎아 나가는 상태 이상을 겪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 부분을 제대로 돌보지 못하면, 활동가는 쉽게 소진됩니다. 그때서야 우리는 말하죠. 그가 번아웃되었다고 말입니다.

하지만 이 부분을 스스로가 통제하고 수행하기란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주변인들의 협력이 절실합니다. 서로는 서로를 도와야 합니다. 예를 들어 밤 9시 이후 활동 관련 내용 공유 금지, 일요일 활동 금지 등의 지침을 세우며, 최소 2주에 한 번씩은 활동에서의 힘든 점을 스스럼없이 터놓고 공유할 수 있는 온-오프라인상 자리를 마련하는 등, 현실적이고 구체적이며 물질적인 지침을 마련해야 합니다. 각자의 활동 가능 시간을 정확하게 스케줄로 정리하여 공유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겠습니다. 그 외의 시간은 서로를 활동 관련 사안으로 터치하지 않는 것이지요.

더불어, 상근비를 수령하는 활동가에게 자연스럽게 업무가 과중되는 일이, 모든 운동 조직에서 빈번하게 발생하는 일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가능하다면 상근 활동가의 휴식을 유무형으로 지원할 수 있도록 조직적인 차원의 대책을 마련하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오랫동안 고립된 반상근 내지 상근 활동가는 부담감과 책임감, 그리고 죄책감에 짓눌려 번아웃돼 활동 공간에서 사라지거나, 최악의 경우 조직의 근간을 흔들 정도의 실착을 저지를 수 있습니다.

조직의 뿌리와 운동의 전사를 공유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선배 활동가는 후배 활동가에게 이러한 지식들을 직접, 성실하게 전해주어야 합니다. 문서화된 기록만을 직간접적으로 보여주는 차원을 넘어, 깊은 대화의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구체적으로 그동안 이 조직이 무슨 활동을 해왔는지, 어떤 것이 성공적이었으며 어떤 것이 아쉬움을 크게 남겼는지, 가능한 한 모든 것을 공유해야 합니다. 이것이 제대로 수행되지 않은 경우, 후배 활동가들은 활동에 대해 언제나 일말의 불안함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불안감은 스스로를 고립시키고 과중된 활동 및 상근 업무에 치중하는 방향으로 활동가를 몰아가게 마련입니다.

 

3.


상대적으로 지지받지 못하는, 낙인에 휩싸인 부문을 직접적으로 건드리는 운동, 운동 조직, 해당 운동에 몸담은 활동가들은, 언제나 여타 주류 운동의 경우보다 훨씬 더 많은, 비판적인 감시의 눈 사이에 있음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이 말은 지지의 실책이 부당하게 더 주목받았다는 이야기와는 다릅니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이 바람직하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도 아닙니다. 요지는, 활동에 몸담는 우리가, 일희일비를 지양하며, 멀리 보고 매사 보다 신중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운동의 당사자가 배척받는 만큼, 운동도, 활동가도 배척받습니다. 우리는 쉽게 소진될 수 있고, 힘이 없습니다. 이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지속적으로 활동을 전개할 수 없습니다. 천천히, 그러나 끊임없이, 거북이처럼 나아가야만 합니다.

지지는 14년 초에 CMS를 조직했습니다. 당시의 지지는 가파른 비탈길을 굴러 내리는 바위와도 같았다고 기억합니다. 너무 많은 일들을 벌였고, 우리는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 당시까지 지지의 반상근 활동가였던 저는 제대로 반상근 활동가로서의 인수인계나 교육을 받은 바가 없습니다. 공금을 무겁게 생각해야 한다는 것, 후원자들에게 달마다 후원 내역과 공금 사용 내역을 알려야 한다는 것, 영수증을 모두 모아 실물로 관리해야 한다는 것, 심지어 회원들끼리의 십시일반, 주먹구구로 돌아가는 조직일지라도 금전 문제에 있어서는 가능한 만큼 최대한 철저하고 칼 같아야 한다는 사실을, 제가 조직에 들어가기 전에 알았다면 좋았겠지만, 슬프게도 이 부분은 개인에게만 온전히 책임을 묻기 어려운 문제이기도 합니다. 실무 전반을 위한 아주 구체적인 능력도 마찬가지입니다. 멘토가 없다면 서로가 평가하고 도울 수 있어야 합니다. 당시의 지지가 이 부분을 놓친 것은, 결국 과거와 현재를 놓친 채 지나치게 성급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가능한 한 충분히 내실을 다져야만 합니다. 기본적인 업무 수행 능력을 차근차근 쌓아나가야 합니다. 운동의 전망과 비전을 누군가 질문했을 때 곧바로 청사진을 제시할 수 있을 만큼, 운동의 전략과 미래에 대해 고민할 시간을 충분히 확보해야 합니다. 이때에 운동의 전사를 확인하는 것은 여러모로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지지의 경우, 여러 상황상 어쩔 수 없이 문화 운동에 치중한 바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장기적으로 필요한 전략이되 곧바로 효용을 기대할 수 없으며, 운동의 논지 자체를 나이브하게 만들 우려가 있습니다. 공부 모임을 만들어 조직 내 활동가 전체의 담론 역량을 키워야 합니다. 협력 가능한 선 배 활동가 내지 전문가와의 네트워크를 조직하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11년에서 14년 사이 지지의 경우 연대 가능한 당사자 네트워크가 없는 것 또한 지속적인 불안 요소 중 하나였습니다. 당사자들을 만나고 대화할 기회, 당사자들의 운동에 연대할 기회를 계속해서 마련하는 일은 조직의 내실과 역량을 키우는 동시에 성노동 운동 자체의 힘을 키우는 중요한 활동일 것입니다.


운동은 계속되어야만 합니다. 한 세대 안에서 거대한 운동의 흐름이 기승전결로 깔끔하게 마무리되는 꿈같은 일은 일어날 리 없기 때문에, 우리는 최대한 오랫동안, 끊임없이 나아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오랫동안 끊임없이 나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얼마나 무거운 일인지를 제가 활동하는 초반에 미리 알았더라면, 조직에 몸담은 동안 좀 더 나은 활동을 전개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지금이라도, 성노동 운동에 몸담은 분들이 계시다면, 제 여력이 되는 만큼 연대하고 싶습니다. 저의 트위터 @Milsa__의 다이렉트 메시지나, 저의 이메일 ideophobia.lee@gmail.com로 여러분의 이야기를 나누어주세요. 가능한 한 힘껏 서포트해드리고자 노력하겠습니다.


우리는 약하지만, 견뎌내고자 마음먹었다는 데에서 이미 충분히 강하기도 합니다. 우리의 유대와 연대는 영원히 사라지지 않으리라 믿습니다. 각자의 자리에서 힘껏 존재합시다. 우리는 이미 그런 사람들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