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인권보다 창녀인권
익명
주류 페미니스트들 사이에서 성구매 남성을 욕할 때 가장 자주 사용되는 말이 있다. 바로 ‘창놈’이라는 말이다.
본래 성구매 남성을 욕하는 말은 존재하지 않았으며, 성노동 여성을 욕하는 ‘창녀’라는 말만 존재했다. 남창이라는 말이 있었지만 그것은 몸을 파는 남성을 욕하는 단어였고, 흔히 쓰이지도 않았다. ‘창’의 기본값을 여성으로 설정한다는 문제점도 있었다. 그래서 페미니스트들은 창녀를 욕하는 말에서 “창”만 떼어와 창놈이라는 말을 만들어냈다. 창놈이라는 말은 주로 “더러워” 등과 같은 말과 함께 사용된다. ‘챙넘’, ‘췡럼’ 등으로 변형하여 희화화를 위해 사용하기도 한다. 이러한 단어의 사용은 분명 성노동 여성과 성구매 남성에게 동일하게 적용되지 않는 낙인과 차별의 균형을 맞추고 미러링 기법으로 남성들에게 경각심을 준다는 긍정적 효과가 있다. 그러나 이 말은 ‘창놈’을 욕함으로써 그 말의 원본인 ‘창녀’라는 말을 강화하고 재생산한다. 심지어 ‘창’이라는 한자는 논다니, 갈보(몸을 파는 여자를 비하하는 속어) 창이다. 글자 자체에 여성혐오와 창녀혐오가 들어있다. 또한 창놈이라는 말에는 여성혐오, 창녀 혐오뿐만 아니라 주류가 아닌, 허용되지 않는 섹슈얼리티(비윤리적 섹스)에 대한 혐오도 들어있기 때문에 더욱 문제가 있다.
만약 ‘창놈’이 더럽고 나쁘다면, 그와 동일한 선상에 서 있는 ‘창녀’는 어떻게 나쁘고 더럽지 않을 수 있는가? 더럽다는 말은 윤리적 혐오인 동시에 생물학적 혐오이며, 더럽다고 지칭되는 대상을 나에게서 분리하고 배제하려는 노력이다. 창놈은 성차별적인 관념으로 여성을 구매하여 아무렇지 않게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과 섹스를 하므로 (윤리적으로) 더러울 수도 있고, 전염될 수 있는 성병에 걸려있어 (생물학적으로) 더러울 수도 있다. 그런데 이런 관념들은 얼마든지 “창녀”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는 관념이다. 이러한 주류 페미니스트의 창녀 혐오에서 성노동 여성을 지켜주는 것은 그들이 구조적 피해자라는 사실밖에 없는데, 이 관념은 너무 쉽게 사라질 수 있고 매우 자의적으로 적용된다. 예를 들어 성노동 여성이 즐겁게 일을 하고 한 달에 천만 원을 넘게 벌 경우, 자신이 주체적 성노동자이며 피해자가 아니라고 말할 경우, 자신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포주의 편을 들 경우에 이들은 구조적 피해자로 여겨지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또 다른 창녀 혐오로 이어진다.
모든 자발적 성노동 여성들은 구조적 피해자가 아니라 가부장제에 부역하고, 여성 혐오를 재생산하는 가해자라고 비난하는 이들도 있다. 이것이 주류 의견이 아니라고 해도, 주류 페미니스트들의 창녀 혐오와 연결되는 지점이 있으며 그것의 강도가 스펙트럼으로 존재함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창녀 혐오는 모두 비슷한 논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창녀 혐오를 보여주는 다른 사례는 많다. 반성매매 여성단체들 중에는 성노동 여성을 지원하고 도와주는 곳이 있다. 그런 곳들의 지원 조건은 대부분 비슷하다. “다시는 성매매를 하지 않을 것”, 한마디로 탈성매매다. 여성단체들이 성매매 여성을 지원하는 목적은 대부분 성매매 여성의 수를 줄이고 성산업을 축소시키기 위함이다. 이런 목적과 그를 위한 방법에는 성노동자 당사자의 목소리가 전혀 반영되어 있지 않다.
반성매매 단체의 지원을 받으면서도 성매매를 지속해야 하는 사정이 있는 사람들이 분명히 존재한다. 다른 노동을 하면 되지 않느냐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지만 성노동은 다른 노동과 다르다. 다른 노동과 달리 상하관계가 덜하고, 출퇴근이 자유롭고, 대부분의 업소가 화대를 당일 지급한다. 다른 노동에 비해 평균적으로 버는 돈이 많다는 것은 대부분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움을 받으려면 성매매를 그만둬야 한다" 고 말하는 것은 사실상, "성매매를 그만두지 않으면 너는 구조적 피해자라고 보기 어려우며 성매매를 그만두어야만 진정한 피해자가 되므로 너를 도와줄 수 있다" 라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것이 성산업 축소라는 그들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것이더라도 성노동자 당사자를 억압하거나 성노동자 당사자에게 피해를 주는 방법으로 진행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성노동자 당사자를 위한 것이라기보다 페미니즘에서 얘기하는 주류의 일반적인 대문자 여성을 위한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창녀“의 인권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여성인권이라고 말하는 셈이다.
많은 페미니스트는 성노동자들이 "나는 여성인권이 떨어지든 말든 성노동을 계속하겠다" 라고 말하면 엄청나게 분노한다. 그것은 가부장제에 부역하는 것이며 아주 이기적인 행동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페미니즘이 성노동자들에게 해가 되는 정책을 얘기할 때, 그리고 그냥 단순히 성매매에 대해서 말할 때, 그들은 성노동자들의 입장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그들이 고려하는 것은 일반 여성의 인권이지 '창녀'의 인권이 아니다. 나는 이것이 모순이고 이중잣대라고 생각한다. 페미니스트들이 앞으로는 이런 일에도 똑같이 분노해주었으면 좋겠다. 누구의 인권도 더 중요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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