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을 횡단하는 몸의 기억
별리
나와 함께 밤을 건너 준 J와 D에게.
여성단체에서 일하는 성노동자를 상상해본 적이 있는가? 여성 인권운동, 반성폭력 운동을 하는 창녀는? 그것이 바로 나이다. 나는 반성폭력 운동가이자 성노동자다.
얼마 전 한 여성인권운동가가 ‘노동, 인권, 여성 등 시민사회단체 활동을 하는 활동가 중에 성판매를 하는 활동가들이 있다. 보통 큰 문제가 아니다. 언젠가 이 문제가 관계자들에 의해 공론화되기를 바란다’ 라는 시민사회 운동, 여성 인권운동에서 성노동자가 색출되고 퇴출당하여야 한다는 글을 작성하였다. 나는, 성노동자는 시민사회 운동, 여성 인권운동에서 검열되고, 색출되고, 퇴출당하여야 하는 흉물스럽고 추잡한 존재로 정의되었다.
책과 이론만으로 성매매 경험 당사자-성노동자를 접한 사람에게 성노동자는 수동적이고 무조건 피해자여야만 하는 정박한, 압화된 존재겠지만, 놀랍게도 성노동자도 사유와 생각이라는 것을 할 줄 아는 인간이다. 배제적이고 분리주의적 입장을 견지하는 페미니스트들은 성노동자들을 계도와 계몽이 필요한 수동적이고, 미성숙하고, 멍청하고, 인생을 쉽게 살려는, 게으른 존재, 여성인권을 하락시키는 존재 혹은 자신들의 정치적 입간판과 선동에 동원할 불쌍한 피해자로만 위치 짓는다. 성매매로부터 탈출시켜주어야 할, 탈성매매라는 구원을 내려 주어아야 한다는 시혜적인 시선으로 성노동자들을 바라본다. 성노동자들은 성노동 현장에서 빈번하게 발생하는 성폭력이라는 산업재해의 피해자이면서 동시에 지금, 여기를 살아가는 인간이며 노동자이다. 산재 피해를 당한 노동자에게 필요한 것은 불쌍하다는 동정이나 ‘산재가 발생하지 않는 다른 안전한 일’로 이직을 하라는 쓸모없는 시혜적 꼰대질이 아니라 노동 현장에서 산재를 입었을 때 정당한 보상과 안전하게 노동할 수 있는 노동권을 보장하려는 사회적 노력이다. 한 존재를 피해자로만 조명하고 피해자의 자리에만 가둬둘 때 그 존재에게는 피해자의 시간만 존재할 뿐, 일상의 시간을 살아갈 수 없다.
어떤 노동이 노동으로 인정받기 위해 그 노동의 즐거움이나 자발성만을 말하거나, 그 노동을 이상화, 낭만화하지 않아도 된다. 성노동에 대해 말하려면 왜 그 노동이 착취적이지 않고 자발적이고 주체적임을 증명해야 할까. 다른 노동 역시 착취적이고 비자발적임에도 불구하고 유독 성노동에 대해서만 증명을 요구하는 성노동 혐오에서 비롯된 것 아닐까. 노동자들은 자신의 노동이 ‘즐거운 노동’이라는 것, 자발적인 노동이라는 것을 증명하지 않아도 된다. 그 노동이 즐겁든, 즐겁지 않든, 자발적이든, 비자발적이든 노동권이라는 이름 아래 성노동자들의 안전과 생명이 보장되어야 한다. 나는 내가 성매매-성노동을 하면서 직접 보고 듣고 내 몸으로 경험한 것들을 기록하고자 한다. 이 경험의 기록이 성노동 혐오를 정당화하고 합리화하는 진영논리에 동원되는 것에 강력하게 반대한다.
나는 내 발로 직접 보도 사무실에 걸어 들어갔다. (아마 이 문장부터 나는 순수하고 완전무결한 피해자에서 탈락일 것이다) 비정규직 일자리의 계약이 종료된 이후로 여러 곳에 이력서를 넣었지만, 그 어느 곳에서도 전화가 오지 않았고 수중에 남은 전 재산이 2천 원이 되었을 때 알바천국에서 일급 25만 원에 당일 지급이라고 표시된, 누가 봐도 유흥업이 확실한 바에 전화를 걸었다. 마지막 남은 전 재산 2,000원으로 버스를 타고 바에 면접을 보러 갔다. 토킹바인 줄 알았던 그곳은 토킹바가 아니라 노래주점에 아가씨들을 공급하는 보도 사무실이었다. 여느 유흥가들이 그렇듯이 내가 일하게 된 곳도 노래주점들 30여 곳이 밀집된 유흥업소 밀집 지역이었고, 손님이 노래주점에 오면 주점에서 보도 사무실 실장들에게 전화를 걸어 아가씨들을 호출한다. 그러면 각 보도 사무실에서 보도 사무실에 소속된 아가씨들을 올려보낸다. 내가 일하게 된 사무실은 일하는 언니들이 10명도 채 되지 않는 규모가 작은 사무실이었다. 30명씩 되는 규모가 큰 사무실에서는 초이스를 볼 때 같은 사무실에 소속된 언니들이 6명, 4명씩 함께 올라왔는데 나만 혼자 다른 사무실에서 올라와 일해야 해서 종종 외로웠다. 이곳에서조차도 혼자라는 감각, 외로움이라는 감각을 느껴야 하는구나 싶어서.
얼굴에 대충 로션만 찍어 바르고 선크림도 바르지 않던 나는 화장을 전혀 할 줄 몰랐다. 처음 출근한 날 같은 사무실의 언니가 화장해주며 화장도구의 이름과 용도를 알려주었다. 이건 마스카라, 속눈썹을 풍성하게 보이게 하기 위해 속눈썹에 바르는 거야, 이건 아이라이너 눈을 크게 보이게 하기 위해서 눈꺼풀에 그리는 거야, 꼬리를 길게 빼줘야지 눈이 커 보여, 한번 네가 그려봐. 언니가 건네준 언니의 아이라이너를 들고 서툴게 아이라인을 그려보았다. 언니는 내가 그린 아이라인을 보더니 풉, 하고 웃으면서 내가 그린 아이라인을 아이 리무버를 면봉에 묻혀 지우고 다시 그려주었다. 그러면서 사야 할 화장품 항목들을 알려주는 식으로 이곳에서 생존할 수 있는 생존 방식을 전수해주었다. 첫날 번 돈으로 아이브로우, 아이섀도 같은 낯설고 생소한 이름의 화장품들을 사야 했다. 몸을 팔아 번 돈 10만 원이 화장품값으로 깨졌다. 허무하고 우울했다. 성폭력을 견딘 돈이 다시 그곳에서 초이스될 수 있는 몸으로 꾸미는 것에 들어가야 하니까. 여성에게 억압적인 것들로 내 몸을 숨기고 무장해야만 돈을 벌 수 있었고 생존할 수 있었다. 그것은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삶의 방식과 가치관과 정반대되는 일이었다. 화장하지 않고 내가 원하는 옷을 입고, 내가 원하는 머리 길이와 스타일을 고수하는 것, 여성에게 자신의 외양과 모습에 대한 자율성이 주어지고 부여되는 것이 여성주의적인 가치 중 하나였다면, 이곳에서는 그러한 선택과 자율성이 봉쇄되고 박탈되는 공간이었다. 그래서 언니들은 모두가 달랐지만, 비슷한 얼굴이었다. 성노동 현장에서의 노동 경험은 내가 원할 때 화장을 하고 안 하고를 선택할 수 있는 것, 내가 원하는 패션과 스타일을 선택할 수 있는 업장이나 환경에 놓인 것이 특권적일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생존을 위해 언니들은 원하든 원치 않든 화장품을 사고, 화장하고, 홀복을 사고, 홀복을 입었다. 성노동자가 성폭력과 여성 혐오의 최전방에 있다는 말은 과장이 섞여 있을지언정 진실의 일면을 담고 있었다. 싫어도 성매매하는 남성 옆에 앉아야 했으며, 옷 속으로 들어오는 손들을 기분 나쁘지 않게 밀어내야 했다. 성폭력을 당해도 신고할 수 없었다. 성매수남이 보여주는 아내 사진, 애인 사진, 어린 딸 사진을 보아야 했다. 성매수남이 자신의 아내나 애인 사진을 보여줄 때 이걸 도대체 왜 보여주지, 아내나 애인이 있으면서 이 새낀 왜 여길 오지, 라는 생각이 늘 들었지만, 특히 딸 사진을 보여줄 때는 착잡한 기분이 들었다. 그 애들은 어렸고 환하게 웃고 있었고 한국 땅에 여자로 태어났다.
성폭력은 권력이 작동하는 모든 공간에서 발생할 수 있다. 성폭력은 단순히 성별의 차이에 의해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젠더 권력을 비롯한 각종 권력과 위계의 역동 속에서 발생한다. 성노동 현장에서 몸을 판매하는 성노동자와 성노동자의 몸을 구매하는 성매수자는 결코 동등하지 않다. 그곳은 손님과 서비스 노동자라는 위계가 작동하는 공간이다. 성산업은 여성, 성노동자들의 몸을 자원으로 삼아 그들의 몸과 노동을 착취한다. 노동 착취를 당한 노동자가 해당 노동을 자발적으로 선택했냐 아니냐는 이미 그 방향과 전제부터가 틀린 질문일 수밖에 없다. 페미니스트인 우리들은 성폭력 피해자에게 성폭력을 겪게 된 그 직장이나 공간에 자발적으로 갔는지 비자발적으로 갔는지 물으면서 자발과 비자발의 여부에 따라 성폭력을 정당화하는 것이 반여성주의적이고 비윤리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런데 성노동자 계급에 속한 성노동자들에게 는 그러한 반여성주의적인 질문이 차별적으로 허용된다.
나는 성노동에 종사하기 전에도 성폭력을 당해왔고 성노동에 종사한 이후에도 성폭력을 당해 왔다. 그런데 성노동자 계급에 속하지 않았을 때 당한 성폭력과 성노동자로 성노동 현장에서 일할 때 당한 성폭력은 다르게 취급되었다. 전자는 성폭력으로 ‘인정’되었지만, 후자는 여성인 권을 후퇴시키는 행동이라고 2차가해를 당했다. 성노동 현장에서 손님들의 여성 혐오적 발언과 마주하고 성희롱, 성추행 등의 성폭력을 손님의 기분이 상하지 않게 거절하거나, 옷이 벗겨지지 않게 필사적으로 실랑이를 벌여야 했다. 너는 이런 곳에서 일하지 말라고 말하곤 옷 속에 손을 넣어 가슴을 만지는 남성, 애인하자며 바지 벨트를 풀어 자신의 성기를 빨아달라고 1시간 내내 조르는 남성, 업소에서 처음 만난 사람인 나에게 다음에 밖에서 만나서 공짜로 섹스해달라고 전화번호를 달라고 조르는 남성, 1:1방에서 동의 없이 나의 질과 항문에 손가락을 넣던 남성, 이 모든 것들은 성폭력이었다. 성노동자들이 노동 현장에서 성폭력을 빈번하게 겪음에도 불구하고 사회는 창녀도 성폭력을 당할 수 있다는 명징한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외면한다. 노동과정에서 성폭력에 빈번하게 노출됨에도 불구하고 성노동을 하니까 성폭력을 당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사회가 요구하는 ‘판매하거나 거래해서는 안 될 소중한 성을 팔지 않는’ 도덕적인 여성상에서 벗어난 창녀니까 성폭력을 징벌로 둔다. 성폭력을 당하면 안 되는 여성과 성폭력을 당해도 되는 여성으로 여성을 이분화하고 계급화한다. 절망적이었던 것은 그 성폭력들에 대해 한남뿐 아니라 일부 페미니스트들마저 ‘남자를 못 잃어서 남자랑 몸 비벼보려고, 네가 즐겨서 한 것이 아니냐’라고 말한다는 것이다. 페미니스트들을 향해서조차 도 직업이나 업장에 상관없이 누구나 성폭력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설명하고 증명해야 하는 것은... 참담하다는 말로는 다 담을 수 없이 씁쓸하다. 다른 노동 중에 업장에서 성폭력을 당할 수 있는 것처럼, 성노동자도 성폭력을 당할 수 있다.
성노동 현장에서 성폭력을 당하기 쉽다는 것을 모르는 성노동자는 아무도 없다. 그 현장에서 성폭력이 빈번하게 발생한다는 것을 직접 몸으로 경험한 성노동자들이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곳이, 그 노동이 위험하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아도 그곳에 갈 수밖에 없고, 노동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성노동자들이다. 당신이 선택하지 않은 삶이라고 해서 모든 사람에게 그 선택권이 주어진 것이 아니다. 보지를 팔지 않을 수 있는 것은 일종의 특권이다. 성노동을 하지 않아도 생계를 영위할 수 있는 것은 일종의 권력일 수 있다. 그럴 수 없는 삶들이 있기 때문이다. 성노동을 그만두고 싶을 때 성노동을 언제든지 그만둘 수 있는 것 또한 권력이다. 성노동을 그만두고 싶어도 그만둘 수 없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고된 노동 환경에 몰린 노동자라면 누구나 퇴사나 이직에 대해 고민할 것이고, 성노동자들은 그런 심사숙고와 고민 끝에 이곳에 남는다. 그것이 자발적 선택이든, 환경에 의한 비자발적 선택이든 그 누구보다 당사자인 성노동자가 제일 많이 고민했을 것이다. 성노동자에 대한 차별과 낙인은 노동 현장에서 벌어지는 폭력과 착취에 대해서 더욱더 말할 수 없도록 그들의 입을 막는다. 성노동자에 대해서 게으르고 편하고 쉽게 돈을 번다고, 그 일을 당장 그만두라고 말하는 사람들 옆에도 나와 같은 성노동자들이 있을 것에 대해 생각한다. 내 주변에는 성폭력 당한 사람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에게 성폭력 피해 사실을 말할 수 없고, 퀴어 포비아에게 퀴어라고 커밍아웃할 수 없는 것처럼, 성노동 혐오자에게 내가 성노동자라는 사실을 말할 수 없다. 노동 현장에서 노동자가 산업재해를 입었을 때 그 산업재해로 인해 그 노동을 폐기해야 한다고 하지 않는다. 노동이 아니라 산업재해를 없애야 한다고 이야기하지. 어떤 노동을 금기시하고 열등한 것으로 치부하고 낙인찍는 것으로 그 노동이 사라지거나 사장되지 않는다. 그저 더욱더 당사자들이 말하지 못하도록 존재의 자리를 삭제할 뿐이다. 내가 있을 수 있는 자리를 선택할 수 있는 선택권이 있는 삶, 내가 가고 싶은 곳에 갈 수 있고 그 환경을 지속할 수 있는 자본과 권력이 있는 삶을 모든 사람이 영위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성노동에 종사하는 노동자 개개인을 비난하고 공격하는 것으로 성노동 안에서 벌어지는 성착취와 성폭력을 없앨 수 없다. 그건 그냥 혐오의 놀이이고 혐오의 연장선이다. 누군가의 생존과 삶을 찬성이나 반대에 부칠 수 있는가? 누군가가 위험하고, 사회적으로 천대받고 멸시받는 노동을 할 수밖에 없는 삶과 환경에 처해있을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말과 행동에 대한 윤리적 고민을 사회 구성원들이 해주었으면 좋겠다. 왜 가라앉는 배에서 빠져나오지 않았냐고 말하는 대신, 왜 그때 그 시간에 그 공간에 그런 옷을 입고 갔는지 라고 말하는 대신 하얀 꽃을 옆에 놓아주면 좋겠다. 이야기를 들어주고, 함께 밥을 먹고, 함께 시간을 보내고, 내가 성노동자인 것을 알게 된 시간 이후에도 여전히 곁에 있어 주었으면 좋겠다.
사회에서 성노동자의 이야기는 거의 말해지지 않는데, 성노동자의 이야기가 사회의 수면 위로 잠시 명멸하는 빛처럼 반짝 떠오르는 순간이 있다. 그것은 바로 성노동자가 죽었을 때이다. 성노동자는 죽음으로서만 사회에 안정적으로 흡수되고 편입된다. 죽은 성노동자만이 사회의 일원으로 안착한다. 왜 성노동자는 비로소 죽어야만 그때 잠시 반짝 사회적 위치와 지위를 부여받을까. 사회적 약자의 죽음은 사회의 구조를 유지하고 가능하게 만드는 폭력과 착취를 드러낸다. 때문에 성노동자의 죽음은 구조적이고 사회적인 죽음으로 해석된다. 죽은 사람은 말이 없다. 성노동을 하는 것이 즐거웠는지, 슬펐는지, 끔찍했는지, 성노동이 힘들어서 죽었는지 그저 다른 이유로 죽었는지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그러한 죽음에는 여러 가지 해석과 각주가 달린다. 어떤 해석과 각주들은 윤리적이고 어떤 해석과 각주들은 비윤리적이고, 폭력적이다. 사회적 약자의 죽음에 대한 해석과 언어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동시에 사회적 약자의 죽음에 대해서 말할 때 윤리의 촉각을 곤두세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성노동자의 죽음을 반성매매 운동을 합리화하고 뒷받침하는 도구로 소환할 때 성노동자는 그저 피해자로만 위치 지어진다. 피해자성을 정치적인 도구로 삼아 운동을 전개하기가 쉽고 편리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피해자성에는 일정 정도의 윤리적 정당성 같은 것이 부여되니까. 피해자성을 정치적인 도구로 삼아 운동을 하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다. 피해자성을 운동의 밑절미 삼지 않아도, 아니 세계를 변혁하려는 사회운동이 아니어도 지금 여기를 살아가는 성노동자들 한 사람 한 사람이 존엄한 인간으로 존중받아야 한다. 한 존재에게서 피해자성과 죽음만을 분절하고 떼어내어 존재를 해석할 때 존재는 대상화, 타자화된다. 성노동 현장에서 만나게 되는 성노동자 중에는 페미니스트가 아닌 거나 퀴어가 아닌 이들도 많았다. 그들이 페미니스트가 아니고, 여성 인권 활동가, 반성폭력 운동가, 투사가 아니어도 부디 행복했으면 좋겠다. 이것이 부적절한 발언이고 언피씨한 발언이라 할지라도 그저 그곳에서 하루하루를 살아내고 생존하는 존재 자체만으로 소중하다. 누군가의 삶이나 행보가 운동의 맥락이나 흐름 속에 있지 않아도 그 삶은 고유하고 존엄하다. 사회운동이 한 개인의 삶이나 생존보다 우위에 있을 수 있는가? 한 존재의 생존과 운동 사이에 우열이 존재한다면 그것을 ‘인권운동’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죽은 성노동자는 ‘성매매를 하다가 불행하고 비참하게 죽은 불쌍한 피해자’가 되지만, 지금 여기에 살아 숨 쉬는 성노동자는 여성 인권을 퇴보시키고 후퇴시킨다며 비난과 공격의 대상이 된다. 죽어서 말 없는 희생자로 존중받는 것 말고 살아있는 사람일 때도 존중받고 싶다. 죽어야만 그때에야 비로소 사회의 일원으로 인정해주고 받아들여 주는 것 또한 성노동자에 대한 차별과 혐오의 결과물 중 하나이다. 나의 시체가 운동의 심볼이 되기보다 살아서, 살아있는 지금 현재의 존재로 존중받고 싶다. 성노동자는 성폭력의 피해자이면서 동시에 주체이고 목소리를 가진 인간이다. 성노동자의 피해자로서의 측면에만 집중하고 부각하면서 성노동자도 노동자고, 인간이라는 목소리는 쉽게 묵살하고 외면한다. 성노동자가 말 없는 피해자로서 존재할 때에만 탈성매매 주장을 뒷받침하는 예제로 잠깐 존재가 승인된다. 그러나 폭력의 피해자, 생존자도 얼마든지 주체가 될 수 있다. 한 인간의 존재와 정체성이 피해자성과 생존자만으로 구성되지 않기 때문이다. 분리주의적 페미니스트들은 당사자의 경험과 목소리를 자신들이 지지하는 정치적 선동에 동원하여 자신들의 주장을 합리화하는 것에만 관심이 있고 실제 하는 인간인 성노동자들의 삶, 아픔, 트라우마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 성노동자를 나와 동등한 인간이 아닌 자신들의 정치적 입장을 선전하는 수단이자 도구로 이용하는 것뿐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들에게 성노동자의 죽음은 스포츠이고 포르노, 하나의 이슈 거리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게을러 처먹고 몸 팔아 돈 버는 거로 사는 사람, 힘든 일 하기 싫어서 쉽게 돈 벌려는 사람, 성매매 전도하는 년들 한남 고추 흡입으로 좀 혼쭐을 내줘야 함 니들 때문에 대가리 필터 완성도 떨어지는 한녀들이 성매매한다고, 성노동자들이 업소에서 왕자님을 찾는다’ 이 말들은 분리주의적 페미니스트들의 입에서 나온 말들이다. 그리고 처음부터 끝까지 틀린 말들이기 도하다. 내 옷장에 있는 왕자는 필요 없다는 메갈 티가 너무 어이가 없는 나머지 눈물을 흘릴 것 같다. 성노동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 성폭력에 쉽게 노출될 수 있는 매우 힘든 일이고, 이성애/유성애 정상성의 시각으로 작성되어 레즈비언/여성애자/무성애자 성노동자들에게는 전혀 맞지 않는 주장이라는 점을 차치하고서라도 이 모든 틀린 말들은 성매매 경험 당사자-성노동자를 동등한 인간으로 존중한다면 할 수 없는 말들이다. 그들은 살아있는 행복한 성노동자 가 아니라 불행하게 죽은 성노동자를, 성노동자의 비참한 말로, 비극적 죽음을 원한다. 그것이 자신들의 정치적 입장을 뒷받침해줄 효과적인 도구가 되니까.
그들은 살아있는 성노동자는 증오해 마지 않지만 죽은 성노동자, 성노동자의 시체는 반겨 마지 않는다. 성노동자인 메루메루님의 죽음은 성노동자와 성노동자들의 연대자들을 공격하는 효과적인 선동의 도구로 동원되었다. 메루님이 죽었을 때 메루님과 전혀 일면식 없는 이들이 그가 살아생전에 가졌던 직업이 성노동이었다는 이유만으로 그의 삶과 죽음에 입을 가져다 대고 비윤리적 해석과 각주들을 덧붙였다. 그의 주변인이 그의 죽음을 막지 못했다고 고인의 친구들을 공격하고 비난했다. 성노동자의 시체를 장대에 매달고 이게 너희들의 예정된 미래라고 말하며 성노동자와 성노동자의 친구들을 공포와 죄책감 속으로 밀어 넣는 것이 당신들의 윤리이고, 대의이고, 운동인가. 성노동자의 시체를 장대에 매달고 광장에 전시하며 그것을 운동이라고 부르는 파시스트들을 경멸한다.
내가 죽었을 때 나의 직업이 성노동자라는 이유만으로 나의 소중한 친구들이 왜 그가 성매매하는 것을 말리지 못 했냐고 비난받는다면 그것만큼 슬프고 고통스러운 일이 없을 것이다. 주변 지인들에게 죽음의 탓을 돌린다면 그거야말로 내가 조금도, 전혀 원하지 않는 것이다. 성노동자인 내 곁에 변함없이 친구로 함께 해주고 걱정해주고 울어주고 밥 사주고 한 건 내 소중한 친구들이다. 성노동자의 비극적인 죽음 말고는 관심 없는 비윤리적이고 추한 당신들이 아니라. 성노동자들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것은 성노동자의 친구와 연대자들이 아니라 성노동자의 비참과 불행과 슬픔을 간절하고 간곡하게 바라는, 성노동 혐오자 당신들이다. 내 친구들을 떠올리면 아프고 고통스러운 세상이지만 그들을 생각해서라도 오늘을 건너고 버텨야 한다고 생각하게 된다. 깃대에 매달려 광장에서 흔들리는 시체가 아닌, 시혜적 동정이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는데 이용되는 도구가 아니라 살아있는 인간으로 존재하고 싶다.
시간이 지난 뒤에야 뒤늦게 그것이 폭력임을 알 수 있는 폭력들이 있다. 선의와 호의를 가장한 따뜻하고 온정적인 폭력들. 업소에서 너는 여기에 있을 여자가 아니라며 너를 구출해주겠다며, 알바 자리를 소개해주겠다며 희망을 읊조리는 이들 그러고 나서 팔린 내 몸, 입술 곳곳을 만지고 침범하던 놈들. 내가 유순하게 앉아있으면 이곳이 아닌 다른 자리로 옮겨줄 것처럼, 다른 삶을 줄 것처럼 말하던 이들 혹은 창녀를 그만두고 콜센터나 숙식이 제공되는 공장에 가서 일하라던, 스스로를 올곧고 정의롭다고 믿는 폭력배, 살인자들. 혐오자들은 얇은 모눈종이 한 장의 차이였다. 한남과 배제적 페미니스트들은 서로를 싫어했지만, 역설적이게도 닮아있었다. 그들의 공통점은 바로 창녀를 구원하려 한다는 점이었다. 당신들이 하는 말과 똑같은 말을 가게에 오는 손님들도 똑같이 말한다. 아직 젊은데 카페 알바나 편의점 알바 같은 다른 떳떳한 일을 구하기 위해 노력해보라고. (그리고 나는 이들이 나열하는 노동들 모두에 이력서를 넣어보았으나 채용되지 않았다) 당신이 구원이라고 간절히 믿는 어떤 것이 타인에게는 뚜껑이 덜 닫혀 마른 물티슈 같은 것일 수 있다. 당신은 타인을 구원할 수 없다. 성노동자들 은 당신에게 구원을 바라지 않는다. 당신은 길 가다가 사이비 종교나 도를 아십니까 에게 포교를 당해본 적이 있는가? 당신이 사이비 종교와 기독교가 말하는 구원을 원치 않듯이 성노동자도 당신의 구원을 원치 않는다. 본인들 자신의 입으로 그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구원은 셀프라고. 내가 타인으로부터 구원을 바라지도, 구하지도 않듯이 당신들도 성노동자들을 구원하려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건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니까. 기독교 포교인이 건네주는 ‘예수님 믿고 천국 가세요’라고 쓰여 있는 싸구려 물티슈가 당신의 삶을 구원해주지 않듯이 말이다. 그러니 당신의 구린 말이 써진 주보를 성노동자들에게 건네지 말기를.
내가 죽었을 때 나의 직업이 성노동자라는 이유만으로 나의 소중한 친구들이 왜 그가 성매매하는 것을 말리지 못 했냐고 비난받는다면 그것만큼 슬프고 고통스러운 일이 없을 것이다. 주변 지인들에게 죽음의 탓을 돌린다면 그거야말로 내가 조금도, 전혀 원하지 않는 것이다. 성노동자인 내 곁에 변함없이 친구로 함께 해주고 걱정해주고 울어주고 밥 사주고 한 건 내 소중한 친구들이다. 성노동자의 비극적인 죽음 말고는 관심 없는 비윤리적이고 추한 당신들이 아니라. 성노동자들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것은 성노동자의 친구와 연대자들이 아니라 성노동자의 비참과 불행과 슬픔을 간절하고 간곡하게 바라는, 성노동 혐오자 당신들이다. 내 친구들을 떠올리면 아프고 고통스러운 세상이지만 그들을 생각해서라도 오늘을 건너고 버텨야 한다고 생각하게 된다. 깃대에 매달려 광장에서 흔들리는 시체가 아닌, 시혜적 동정이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는데 이용되는 도구가 아니라 살아있는 인간으로 존재하고 싶다.
성노동자들의 무덤에서 운동적 보탬이나 효용이 되는 무언가를 도굴하고 캐내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당하는 폭력과 죽음을 어떻게 윤리적으로 대면할 수 있을지 고민하고, 옆에 살아 생존 하는 성노동자들을 바라보고 직시했으면 좋겠다. 성노동론은 삶 정치이고 생존권의 또 다른 이름이다. 지금 여기를 살아가는 성노동자들을 위한 정치학의 이름이다. 나는 내가 창녀라고 말해도 안전한 사회를 원한다. 내가 나인 것을 말해도 괜찮은 사람들, 내가 창녀라고 말해도 버려지거나 배제되지 않는 곳. 내가 나인 것을 말해 도 안전한 공간을 원한다. 성노동자들에게 내가 나임을 말할 수 있는 공간, 말의 자리가 필요하다. 성노동자-성매매 경험 당사자들은 그 안에서 일어나는 착취와 폭력, 그리고 서로를 돌보는 연대와 생존권에 대해서 꾸준히 목소리 내어 왔다. 그 목소리에 대해서 국가와 사회가 외면해왔을 뿐이다. 폭력을 증언하는 몸이 건네는 말에 국가와 사회가 귀 기울여주었으면 좋겠다.
동료 퀴어들의 죽음으로 인해 역사가 한 걸음 앞으로 진보하는 것을 볼 때 종종 불온한 생각을 한다. 세상이 더 나아지지 않아도 좋으니 당신이 살아달라고.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가 제 죽음으로 차별과 혐오를 증명해야만 간신히 바뀌는 척하는 세상에 틀렸고 잘못된 것이라고. 어떤 죽음을 정치화하지 않아도 되는 운동과 사회를 꿈꾼다. 죽음이 운동의 선전도구나 전략이 아닌 그저 죽음으로 존재할 수 있는 사회를 꿈꾼다. 성노동자가 자신이 당한 성폭력을 안전하게 말할 수 있는 세상이 오기까지 열심히 외치고 싸우고 운동할 거니까 그때까지 당신이 죽지 않고 살아있었으면 좋겠다. 당신이 말할 수 있는 세상, 당신이 자신의 삶과 삶 안에서 일어난 폭력들에 증언할 수 있는 세상, 당신이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위해 매일의 죽음을 견디고 버텨낸다. 죽음을 건너고 횡단한다. 죽지 않은 너와 어제와 오늘처럼 술을 마시고, 담뱃불과 담뱃불을 붙여 담배를 피우고 맛있는 비건 음식을 먹고 밤새도록 이야기 나누고 싶다. 그 모든 일에도 불구하고 오늘을 숨 쉬고 호흡하는 당신의 삶, 당신의 생존이 운동이다.
내가 그 시간에 대해 글을 쓴다면 그 글의 맨 앞에 나와 함께 그 시간을 건너준 사랑하는 당신들의 이름을 적고 싶었어.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은 그 이름을 떠올리고 부르는 것만으로 행복하게 하거든.
당신들은 내가 나여도 괜찮다고, 내가 이 세상에서 살아가고 존재해도 괜찮다는 기적 같은 생각을 하게 해.
그 밤들에 나의 울음을 안아주고 전화를 받아주었던 J와 대기실에서 함께 손님 욕을 해주던 D에게 사랑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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