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노동 프로젝트/2019 성노동 프로젝트 제 1회 성노동 글쓰기

[2019 성노동 프로젝트 제 1회] 영신 : 레드 로즈 캉캉

성노동자해방행동 주홍빛연대 차차 2019. 9. 19. 18:24

레드 로즈 캉캉

영신

 

*트리거 워닝 : 자해, 성폭력 묘사

[도입]

사라지고 싶어 소리 지르고 싶다

뱃속에는 뭔가 뭉쳐있고 어그러진 목소리가 어그러진 기도를 오르지 못하다

어그러져 뭉쳐버리고 뱃속을 넘어 결국 가슴으로 오른다

결국 나는 운다

아니야 시인은 감정을 절제해야 해

나오려던 눈물이 게 눈 감추듯 들어간다

그렇게 어그러진 눈물은 어그러진 목소리와 함께 어그러져 내 가슴을 채운다 침
대의 이불속의 블랙홀에 있는 작은 가슴 사라지면 좋겠는

귀를 자르면 좀 나아질까 나오지 못하고 가슴에서 와글거리는 어그러진 목소리
듣지 않을 수 있게 될까

아니 그러면 너는 결국 목을 자르게 될 거야

어그러짐의 엉킴을 풀자 실타래의 처음도 끝도 모르겠는

가위로 숭겅 잘라내기에는 너무 소중한 것이 담겨있는

[본문1]

이질감이 멈추질 않는다.

‘모텔’이라는 공간에 발을 들인 것이 처음은 아니다. 게다가, 이런 또래 남성을 마주하고 대화를 나누는 것도 더더욱 처음은 아니다. 뱀이라고 할까? 아니면 벽을 타고 오르는 덩굴? 은우의 발끝부터 머리끝까지에는 위화감과 어색함이 끝 모르고 은우의 입속을 노리고 있었다. 언젠가는 너를 완전히 먹어 버리겠다는 듯이.

씻었어?

샤워를 마치고 나오자 ‘오빠’가 물었다.

네, 오빠.

이 눈빛을 뭐라고 불러야 좋을까? 호의라고 부르기에는 너무나 생경했고 악의라고 부르기에는 너무나 사려 깊었다. 상관없었다.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은우는 침대 위의 ‘오빠’ 옆으로 가 앉았다.

정말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오빠’는 입을 맞췄다. 어떻게 해 보기도 전에 ‘오빠’는 마치 그래야 한다는 듯이 눈을 감고 작업에 열중했고 은우는 그저 그것을 따랐다.

‘오빠’의 손끝이 은우의 손목에 가 닿았다.

뭐야, 이거 다친 거야?

아, 아, 그냥 긁힌 거예요.

은우가 자해흔이 선명한 손을 재빠르게 뒤집는다. 눈빛이 흔들린다.

어떻게 다쳤으면 이렇게 돼?

몰라요.

‘오빠’는 잠시 떨떠름한 얼굴이 되더니 다시 작업에 열중했다.

ATM 앞에서 은우는 잠깐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렇게’ 번 돈을 누가 보는 게 싫었다. 나는 지금 창녀, 몸 파는 여자다. 앞으로도 이 일을 계속하게 되는 걸까? 처음치고는 나쁘지 않았다. 힘들기도 했지만 단시간에 15만 원 받기가 어디 쉽나. 창녀 일이 적성에 맞는 걸까? 앞으로도 이렇게 콘돔 쓰는 사람만 만날 수 있으면 좋겠다. 임신이나 성병은 무서우니까.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졌다.

기계에서 돈 세는 소리가 났다. 거래가 완료되었습니다. 이용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집에 도착하자 열 두시였다. 은우는 가방을 벗고 침대에 드러누웠다. 습관적으로 트위터를 켰다. 약 먹고 씻고 자야 하는데. 약 먹고 씻고 자야 하는데. 진짜 약 먹고 씻고 자야 하는데. 은우는 계속 생각하다가, 트위터에 썼다. 약 먹고 씻고 자야하는데, 라고. 그러나 약을 먹지 않고 씻지 않고 자지 않는다. 생각하는 동안에도 시간은 가차 없이 흐른다. 내일도 학교 가야 하는데. 왜 나는 약 먹기 싫은 마음이 드는 거지. 약을 먹으면 안 될 것만 같다. 왜 나는 제때 자기 싫은 마음이 드는 거지. 난 아픈 게 아니라 그냥 게으른 것 아닐까.

만신창이.

익숙한 목소리가 들린다. 역시 아픈 것이다. 약을 못 먹는 것은 이 목소리 때문이다.

아니거든. 넌 게으른 창녀 쓰레기야. 내가 뭘 했다고.

고약한 룸메이트가 아니다. 제어할 수 없는 또 다른 나의 목소리다. 은우는 그걸 ‘그림자’라고 불렀다. 그림자는 은우의 어두운 부분을 담당하고 있었다. 그의 유일한 목표는 은우가 빨리 자살하는 것이다. 기억할 수 있는 옛날부터 은우는 죽고 싶어 했었다. 그의 나이와 달력을 먹고 자란 감정이 지금은 환청이 되었다.

은우 역시 죽음을 원한다. 은우는 마치 물속에 빠진 채 숨을 멈추고 있는 것만 같았고, 약이 충분히 모이면 바로 자살하려고 결심했다. 그러나 숨을 멈춘다고 해서, 몸이나 시간이 멈추지는 않는다. 그것이 가장 고통스러웠다. 나 자신과 굳게 약속을 했기 때문에 다음 달까지 살아내야만 했다. 어제도 한 시간을 채 못 잤다. 약을 안 먹으면 잠을 못 잔다. 잠을 못 자면 해가 뜨는 걸 보고 늦게 잠든다. 늦게 잠들면 피곤에 절어 학교를 지각한다. 피곤한 몸으로 늦게 출석하면 몸과 마음이 모두 비참해서 또 약을 안 먹는다. 이러한 악순환을 그림자가 종용한다. 자연히 트위터 타임라인을 들여다보게 된다.

새벽이 깊어지자 더 이상 타임라인에 글이 올라오지 않았다. 새로고침을 해도 멈춰있다. 슬슬 그림자의 목소리가 커진다. 자해를 하고 싶다는 생각도 든다.

죽어, 죽어, 죽어, 커터칼을 가지고 손목을 깊숙이 쑤시는 거야.

‘아, 닥쳐, 제발.’

아니, 넌 그렇게 하게 될 거야.

‘하지만 내 자취방엔 커터칼이 없지롱.’ 깊게 들어가진 않지만 피 보는 데는 아주 효과적인 눈썹 칼은 있다. 그걸로 손목을 걸레짝처럼 만들고 싶은 충동이 올라오지만, 최대한 버텨본다. 있는 약을 털어먹고 싶지만 버텨본다. 이럴 때 필요한 게 있지. 진짬뽕.

[죽고 싶을 땐 역시 진짬뽕이나 먹자.]

단말마 같은 트윗을 올린다. 은우는 자우림 노래를 틀어 이어폰을 귀에 꽂는다. 후드 집업을 걸치고 편의점으로 갔다. 볶음 진짬뽕이 없다. 그냥 진짬뽕이나 먹자. 집 밖에 나오면 그림자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아 좋다. 편의점 밖이 밝아져 온다. 오늘도 해 뜨는 걸 봤다. ‘젠장.’


 

[삽입1]

내 눈은 이제 빛나지 않아
내 뇌는 이제 숨 쉬지 않아
포도주스로 채워진 보라색의 내 심장, 내 심장
가늘게, 가늘게 떨리는 보라색의 내 혈관

내 뺨은 이제 기쁘지 않아
내 귀는 이제 예쁘지 않아
포도주스로 채워진 보라색의 내 심장, 내 심장
새파랗게 멍이 진 유혹적인 내 손목, 내 손목
비 오는 밤은 광기에 차 제물을 기다려
다락에 갇혀 비명을 지르는 작은 몸을


-<Violent Violet>,자우림(김윤아, 이선규 작사)


 

[본문2]

오늘도 똑같은 밤이다. 다락에 갇혀 비명을 지르는 작은 몸을 부수 고만 싶다. 아니, 주어를 정확히 하면 ‘그림자가’ 다락에 갇혀 비명을 지르는 은우의 작은 몸을 부수려 한다.

부엌 천창 건조대에 목을 매.

‘닥쳐.’

커터칼이 없으니 식칼이라도 들고 손목을 부셔버려.

‘그러지 않을 거야.’

그럼 좀 소프트하게. 손으로 목을 있는 힘껏 조르는 건 어때.

더 이상 거절할 수가 없다. 은우의 진짜 의지와 상관없이 손이 목으로 스르르 올라간다. 목에 힘이 들어간다. 뇌로 향하는 정맥이 막히는 것이 느껴진다. 얼굴이 터질 것 같고 숨이 막힌다. 머리가 지끈거리고 귀가 윙윙거린다. 30초가 넘게 흐르고, 겨우 손을 뗀다. 안 되겠다. 정신과 폐쇄병동이란 곳에 들어가야만 한다. 정말 죽을 것만 같다. 하루하루 고통의 총량이 너무나 많다. 그림자는 은우를 하루도 쉬게 두지 않는다. 버티기로 한 그 ‘다음 달’이 왔지만, 그는 이번 달을 버틸 자신이 없다. 충동적으로는 죽고 싶지 않다. 이번 달은 버티고 싶다. 어떡하면 좋을까? 병동에 들어가면 무언가 달라질까? 하지만 달리 선택지가 없다. 밖이 밝아온다. 터미널로 가면 첫차 타고 본가로 갈 수 있을 것이다. 어차피 막다른 골목이다. 치료된 상태라는 게, 일상이라는 게 무엇인지 상상조차 안 되지만, 한번 시도해보자.

외래로 다닐 때는 아무렇지 않던 본가 근방 대학병원이 생경하게 느껴진다. 온통 하얗고 깨끗하고 누구에게나 친절한 곳. 얼룩지고 굴곡지고 더럽혀진 자신과 이 곳이 대비된다는 생각이 든다. 한층 더 이질감이 온몸을 휘감는다. 노란 종이의 입원증을 받았다. F32.9 F43.1 F62 F60.3 아이고 질병 코드가 이렇게 많았나. 모친이 재차 물어본다. 꼭 입원해야만 하니? 아... ‘안 그러면 나 진짜 죽어요’라는 말이 턱까지 차오르지만 꾹 눌러 담는다. 7층으로 올라간다. 하얀 간판에 쓰인 글자 ‘정신건강의학과 안정병동’. 그렇게 모친과 말다툼하며 오겠다고 한 병동인데, 막상 들어가려 하니 왠지 겁이 난다. 초인종을 누른다. 간호사가 나온다.

천은우 환자 맞으시죠? 네. 이쪽으로 오세요.

키와 몸무게를 재고, 소지품을 검사하고, 반입 가능한 물건만 가지고 보호사가 자리로 안내한다. 복도에는 또래의 사람들이 두세 명씩 무리 지어 걷고 있다. 소파에는 세 살쯤 언니로 보이는 분이 책을 읽고 있다. 이질감, 이질감. 이 곳에 섞일 수 있을까. 이 곳에서 지낼 수 있을까. 나는 창녀인 데다가 정신병자인가. 괜히 왔나. 이런저런 생각이 들지만 일단 있어보자, 생각한다. 모친은 떠났고, 은우는 병동에 혼자 남았다. 어떻게 여기서 지내지?

안녕? 몇 살이야?

옆자리 언니가 말을 건다.

안녕하세요. 전 스무 살이에요.

왠지 어색하다.

넌 뭐 때문에 왔어? 난 망상.

전 자살 때문에 왔어요. 우울증이요.

넌 자의입원이야 강제입원이야? 난 강제입원인데. 부모님이 입원시켰어.

자의입원이에요.

그렇구나. 여기에 우리 또래 많아. 친해질 수 있을 거야.

친절한 분을 만나서 다행이다. 강제입원이라는 말이 왠지 무섭게 들리지만, 이 분을 보면 그렇게 정신과 병동이나 강제입원 환자가 무서운 건 아닌가 보다. 잘 어울릴 수 있을까 생각이 드는 것 보면 이 곳도 하나의 사회 인가 봐. 어쩌면 드디어 나를 받아줄 작은 세계.

병동을 좀 둘러보기로 한다. 복도에는 또래 몇 명이 떠들면서 왔다 갔다 하고, 멍한 표정으로 혼자 거니는 분도 있다. 정말 정신병동이구나. 나도 정신병자인가. 맞아. 나는 정신병자니까 이 사회가 나에겐 어울릴 거야. 여기까지 생각이 다다르니 왠지 마음이 편해진다. 거실이라고 해야 하나? 에는 탁구대와 티비, 소파와 운동기구가 있다. 보호사라는 분과 남자 환자 한 명이 탁구를 치고 있다. 옷을 갈아입으며 은우는 자신이 여기서 이방인일까? 아니면 자기도 환청을 듣는 정신병자니까 섞일 수 있을까? 고민한다. 그러던 차, 복도를 오가던 무리가 다가온다. 환자복으로 갈아입은 은우도 그들에게 다가간다.

몇 살이에요?

예쁘장하게 생긴 한 환자가 묻는다.

스무 살이요.

은우는 살짝 긴장한 듯하다.

와아! 반가워요 저는 열일곱 살이에요. 언니는 어디가 아파서 왔어요?

말 편하게 해도 돼요. 저는 우울증으로 왔어요. 자살사고요.

이렇게 내가 아픈 걸 편하게 말할 수 있는 곳이 있다니, 은우는 신기하다. 긴장이 풀린다.

네 언니. 그럼 말 편하게 할게! 언니 이름이 뭐야? 나는 봄이야. 나도 우울증.

난 은우. 천은우야.

우와! 이름 예쁘다. 복도 같이 걸을래?

시계와 탁구대와 티비와 소파가 보이는 복도를 봄이와 다른 또래 환자들과 함께 걷는다. 또래들이 있어 다행이야. 은우는 생각한다. 처음엔 복도를 왔다 갔다 하는 풍경이 생경해 왠지 모를 에 휩싸였지만, 금방 이들과 동화될 것 같다. 병동메이트, 라는 단어를 지어내고 혼자 웃는다. 소심한 은우였지만, 왠지 이 사회에서는 늘 내 병증을 도와줄 전문가도 있고 인간관계 스트레스도 없을 것 같고 좀 더 자신감을 가져도 될 것 같다.

상담은 언제 해?

은우가 봄이에게 물어본다.

면담? 교수님 회진은 정해진 요일에 하고, 여기선 힘들면 언제든 간호사 언니한테 얘기해서 주치의 면담할 수 있어. 근데 언니 주치의 노쌤 재수없지 않아? 완전 깐깐해. 재섮서.

은우와 봄이는 키득키득 웃는다.

난 들어가서 쉴게.

모두가 거실과 복도에 있어 빈 병실의 병상으로 돌아가 은우는 생각에 잠긴다. 난 진짜 정신병자구나, 재차 생각한다. 그래서 정신병동에 와서 다른 정신병자와 같이 치료받는구나. 나쁘지 않아. 나쁘지 않아. 근데 왜 자해하고 싶지. 창녀인 나도 싫고, 정신병자인 나도 싫고, 그냥 다 싫고 힘들게 살아온 내가 너무 싫고 서럽다. 그래, 나 지금 서럽다. 분명 아까까지만 해도 좋았는데 혼자 자리에서 상념에 잠기니 다시 추락한다. 분명 작은 폐쇄병동이라는 이 사회가 마음에 드는데 이유 모를 서러움이 올라온다. 여전히 이질감인가. 혹은 정신병자 낙인에 대한 두려움인가. 과거의 기억이 생각나 더 자해하고 싶다. 세월호에서 반장의 책임을 다하다 죽은 선배에 대한 기억. 참 서럽다. 선배의 몫까지 잘 살기로 다짐했었는데, 난 왜 내 일상을 망가뜨렸지. 난 왜 여기 있어야만 하지. 자해를 해야겠다. 여기선 칼도 없는데. 칫솔통의 뾰족한 부분이 눈에 들어온다. 수차례 손목을 내리친다. 피가 나지 않는다. 빨개진다. 계속 내리치니 서서히 살이 벗겨진다. 뒤늦게 따갑다.

아아,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이러려고 입원한 거 아닌데. 나 왜 이러지.

간호사실 창문 앞으로 간다. 쭈뼛쭈뼛 거리다가 겨우 입을 뗀다.

간호사쌤, 저 자해했어요.

간호사의 눈이 동그래진다. 오자마자 자해라니, 내가 잘못하긴 했나보다.

은우씨 왜 그랬어.

상처를 보고 간호사가 드레싱 키트를 들고 간호사실에서 나온다. 자해했는데 소독 치료를 받는 건 처음이다. 자해보다 소독이 더 아프네, 웃기다. 드레싱을 받으며 은우는 생각한다.

이렇게 하시면 우린 사물 다 회수할 수밖에 없어. 힘들면 얘기해야죠.

간호사가 바구니에 모든 플라스틱으로 된 사물을 가져간다.

필요할 때 간호사실에 얘기해서 받아서 쓰고 반납하세요.

와, 여기 빡세구나. 이제 내 사물함엔 수건과 책밖에 없다. 이게 뭐야, 텅텅 비었잖아. 스스로 생각해도 오자마자 자해하고 물품 다 회수당한 게 어이가 없어 괜히 피식 웃는다. 봄이를 부른다.

봄이야, 이것 봐. 나 자해해서 물품 다 뺏겼다? 완전 웃겨. 다 비었어.

뭐야, 언니 왜 그랬어. 그러지 마. 자해하면 안 돼. 언닌 왜 마음이 아파? 힘든 일 있었어?

아, 다시 눈물 날 것 같다.

응, 좀 힘든 일이 많았어. 그래서 자살자해 안 하려고 여기 왔어. 이제 안 하겠지.

그래, 하지 마. 알겠지? 약속이야?

약속은 못 해. 근데 노력해볼게.

응응, 꼭! 어떡하면 언니 마음이 안 아플 수 있을까. 힘들면 얘기해. 아니면 간호사 언니한테 얘기해.

봄이 왜 이렇게 친절하고 귀엽지. 벌써 치유되는 느낌이다.

지금은 병실에 은우와 봄이 둘 뿐이다. 봄이가 은우 옆에 발랄하게 다가와 앉는다. 이 친구도 우울증이라니, 나도 치료받다보면 이렇게 밝아질 수 있을까.

여기 언제부터 있었어?

음, 두달쯤 됐어. 언니는 대학생이야?

응. 대학교에서 사회학 공부하는데, 뭐, 공부 안 해. 너는?

나도 뭐. 나 유급될지도 몰라. 사회학이라니, 뭔지는 잘 모르는데 멋지다.

고마워! 너는 학교에서 동아리 같은 거 해? 아니면 뭐 나중에 하고싶은 거 있어?

난 고등학교 졸업하고 나서 쭉 꿈도 없고 생활도 엉망이었는데.

난 연극배우가 꿈. 배우 하고싶어. 학교에서 연극동아리도 했는데, 학교 자꾸 안나가서 짤렸어.

와, 연극배우 잘 어울린다. 멋져!

근데 언니, 나는 유명해지면 안 돼. 나 아마 연극배우 못 할거야.

왜?

왜 그렇게 생각하지, 마음이 아픈 은우가 묻는다.

그냥 안돼.

왜 그런지 말해봐.

은우가 재차 물어본다.

내가 너무 몸을 막 굴렸어. 그래서 안 돼. 유명한 사람들은 과거 다 들춰지잖아.

봄이는 씁쓸한 표정이다. 뭔가 말해주고 싶은데 모르겠다.

언니는 섹스 해봤어?

음... 응.

언제 처음으로?

작년에. 고삼때. 너는?

나는 중1때 처음 했는데, 그때 좀 이상했어.

왜? 말해줄 수 있어?


친구들이랑 친구들 친한 오빠들이랑 술 마시는데, 그때 나 엄청 취해 있었어. 근데 왠지 평소 술 마셨을 때보다 훨씬 더 몸이 감당이 안 되는 거야. 세상이 핑핑 돌고. 많이 안 마셨는데. 그때 내가 싫다고 했는데 고등학생 오빠가 자기 사는 오피스텔로 오토바이 태워서 데려갔어.

아, 이건 아니다. 나도 잘은 모르지만 강간?성폭행?인 것 같다. 말해줘야 하나? 그래, 말하자.

봄이야, 그 새끼 술에 약 탄 거 아냐? 봄이야 언니 말 잘 들어. 네가 말한 그거 성폭행이야.

그런가? 근데 그때 내가 오빠들이랑 술 마셔서 그런거잖아.

아니야. 너 잘못 하나도 없어. 왜 네가 몸을 막 굴린 거야. 그 새끼가 다 잘못한 거야. 게다가 진짜 얼마 안 마셨는데 몸을 못 가눌 정도였으면 아마 약 탔을 거야. 씹새끼.

근데 나 몸 막 굴린 건 맞아. 그때 그런 다음부터 친구 따라서 조건만남 했거든. 그래서 나 유명해지면 안 돼. 창녀로 얼굴도 많이 팔렸을 거고, 앞으로도 나 돈 부족하면 조건 계속 할 수밖에 없을걸.

은우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 봄이도 조건을 하고 있었다니. 게다가 그런 힘든 이유로 시작하게 되었다니. 무엇보다 할 말을 잃게 한건 은우와 같은 사람이, 사실 생각해보면 당연한 거지만, 혼자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새삼 충격적이다. 반갑기도 하고. 반가워해도 되는 건가?

봄이야, 사실 나도 조건 한다?

헐 진짜? 언니도? 왜?

용돈 필요해서 했지. 난 시작한지 얼마 안 됐어. 얼마 받아야 할지도 모르겠고, 막 이상한 놈들도 많이 꼬이고 하더라. 넌 괜찮아? 힘들지 않아? 막 손님들 콘돔도 안 쓰고 어떤 새끼들은 뒤로 하자고 하고 그러지 않아?

다 요령이 있지. 용돈은 **만원 받으면 돼. 안 되는 거 뭐랑 뭐 안 된다고 확실히 얘기하고. 그래도 막상 현장 가면 나도 강제로 노콘 많이 당했어. 언니, 아무리 조건하는 거여도 강제 노콘이나 그런 건 다 강간이라고 친구가 그러더라. 손놈한테 휘둘리면 안 돼. 용돈 좀 받는다고 빌빌 길 필요 없어. 어차피 조건은 조건 해주는 사람이 갑이야. 우리가 골라서 만나는 건데 뭐.


그것도 다 강간이었다니. 조건 하는데도 요령이 다 있다니. 빌빌 길 필요 없다니. 모든 게 새롭다. 왠지 모를 연대감이 올라오지만, 그래도 되나 하는 배덕감도 함께 올라온다. 아, 어렵다. 하지만 일단 동지를 만났다는 마음이 앞서 은우는 궁금
증부터 풀고 싶다.

근데 있잖아 성매매 불법이지? 그거 막 경찰이 잡기도 하고 그래?

응응 조건 특히 서울에서는 단속 쩐대. 난 잡힌 적은 없는데 잡히면 안 된대 막 경찰이 함정수사하고 그런대. 그래서 노콘도 당하는 거야. 막 저항했다가 얻어맞아도 우린 경찰 신고도 못 하잖아. 불법이라서 우린 손놈 잘못 걸려도 아무것도 못 해.

그럼 우리 같은 사람들은 어떻게 해?

그런 얘기가 있대. 성매매가 아니라 성노동이라구. 성노동 비범죄화 뭐 그런 말도 있던데, 잘은 몰라. 나도 들어만 봤어.

그렇구나... 합법화하는건가? 퇴원하면 알아봐야겠다. 고마워!

봄이가 순진하게만 보였는데, 반전이다. 그때, 주치의가 들어와 은우를 부른다.
더 이야기하고 싶지만 주치의 면담에 가야 한다. 봄이가 재수없다고 한 노쌤.

천은우님-.


은우를 부른다. 면담실의 아늑한 의자에 앉아 주치의를 마주본다. 뭔가 증상이나 할 말이 있어도 이 좁고 하얀 공간에 들어오면 생각이 안 난다. 모친에게 스프링 없는 노트랑 안 뾰족한 펜, 뭐 형광펜 같은 거라도, 좀 사달라고 해야지. 그건 간호사실에서 허락해주겠지.

많이들 외출이나 외박을 나가고 조용한 주말의 병동이다. 화장실에서 거울을 응시한다. 거울 속의 앳된 얼굴이 가엾어 보인다. 이곳은 폐쇄병동, 마음이 아픈 사람들의 작은 사회. 사실 지금 마음이 편하고 이 곳이 좋아서 혼란스럽다. 안정감과 다소간의 행복감이 생경하기만 하다. 병을 핑계로 호사를 누리는 것 같아 이젠 거울 속의 얼굴이 가엾지 않고 얄궂어 보인다. 배덕감이 올라온다. 거울을 오래 응시하니 얼굴이 얼그러져 보인다. 어지럽다. 폐쇄병동의 거울은 유리가 아닌 깨지지 않는 소재여서 평평하지 않다던데, 그 때문인가. 아니면 얼그러진 마음의 반영인가. 둘 다 일거야. 양가감정 때문에 머리가 터질 것만 같다. 분명 행복하고, 안정적이고 좋은데 한 편으론 시도때도 없이 자해하고 싶고, 답답하고, 창밖으로 뛰어내리고 싶다. 게다가 자해를 하거나 자살사고가 심하면 격리실에 몇 시간 가기까지 한다. 대체 왜 갇힌데다가 아픈 이 생활을 행복하다고 느끼는 걸까. 은우는 자기 자신이 이해가 안 된다.

노쌤, 저 병동이 좋아요. 왜 그런진 모르겠어요. 근데 안 나가고 싶고, 나가라고 하면 무서울 것 같고, 그냥 여기가 편해요.

천은우님, 여기는 감옥이에요. 갇혀있고 나가고 싶을 때 나가지도 못하고, 뭐 좀 하려고만 하면 독방가고, 그런 곳이잖아요. 천은우님이 행복하다고 느끼는 건 감옥에서 벌 받고 있어서 그런 거예요. 벌 받고 싶은 마음을 폐쇄병동이 대신 채워 주는 거죠. 그러니까 자해나 자살시도 하려고 하면 그런 천은우님이 스스로에게 벌주는 마음을 격리방에서 잠깐 있게 하면서 채워주는 거예요. 천은우님 워낙에 똑똑한 분이니까 이해하시겠죠?

네, 좀 그런 것 같아요. 머리로 안다고 혼란스러움이 바로 사라지진 않겠지만요.......

환청 들리는 건 좀 어때요? 어젯밤에도 그림자가 괴롭혔어요?

네. 사실 이불 속에서 환의 벗어서 그걸로 목 조르는 자해 했어요... 그림자가 시켜서.......

아이구. 또 하셨네.

근데 우울증 심해지니까 기억력이나 집중력이나 독해력 논리력 같은 게 너무 떨어졌어요. 바보 되는 느낌이에요. 이거 괜찮아지는 거예요? 저 겁나요. 계속 그럴까봐. 책도 못 읽고.

그럼요. 우울증 나으면 같이 괜찮아져요. 근데 자꾸 목 조르면 계속 심해져요. 뇌에 산소가 안 가면 뇌세포가 파괴돼요. 그건 복구도 안 되고. 참아볼 수 있으면 최대한 참아요, 알겠죠?

오늘도 그림자의 세계에 침전하는 밤이다. 은우는 병실 침대에 누운 채 생각했다. 이 내려가도 내려가도 차고 올라갈 바닥-아니 사실 알고 있다. 바닥은 닿지 않기에 진정 바닥인 것이다-조차 없는 끝없는 세계는 어떻게 생겨난 것일까. 검은 바다를 허우적거리는 어린 아이는 왜 나타난 것일까. 은우는 중얼거려본다.

그림자. 넌 언제부터 있었지? 왜 생겨난거지?


사실 은우는 알고 있다. 은우의 기억이 시작되는 때부터 그림자는 은우와 함께 있었다는 것을. 내가 힘들 때 선명해지는 이 아이는 앞으로도 영원히 함께 할 것 이라는 것을. 그러면 왜 있는 거지? 그리고 사라지지 않는다면 난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은우는 생각에 잠긴다. 어쩌면, 그래, 어쩌면 그림자는 원래 사악한 악마가 아닐지도 몰라. 힘든데다가 완전히 고립되어 있었던 유년기를 떠올리며 은우는 생각을 이어나간다. 그때 나는 혼자였잖아. 나의 고통과 외로움을 함께 감당해줄 누군가가 필요했을 거야. 수호천사처럼.

은우씨 정말 똑똑하다. 맞아요. 심리학적으로 인간은 고통을 감당하기 힘들 때 이에 회피하는 방법을 선택하기 쉬워요. 그림자를 만드는 것도 그런 방법의 하나였고 그 당시에는 유효한 전략이었을 거예요. 다만 한때 은우씨의 갑옷이 되어 주었던 것이 이제 어른이 된 천은우님에게 맞지 않는 옷이 되었을 뿐이죠.

진전된 생각을 상담 시간에 임상심리사에게 털어놓으니 임상심리사가 기뻐하며 말했다.

그러면 이제 맞지 않는 옷을 벗을 필요가 있겠죠. 일단 이게 은우씨를 해치려는게 아니라 오히려 지키려고 생겨났다는 것을 알았다는 게 중요해요. 그리고 그 다음 단계로 그림자에게 이제는 은우씨가 어른이 되었다는 것을 알게 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애써준 것에 대해 고마움을 표해줘요. 그림자가 은우씨가 자신을 없애려고 하는 것 일까봐 불안하게 하면 안돼요. 그림자가 노력한 것을 인정해주고, 이제는 안심해도 된다고, 은우씨는 이제 어른이라고 끊임없이 말해줘요. 그림자가 안심할 때까지.

멋진 상담이었어, 면담실을 나오며 은우는 생각했다. 나를 괴롭히는 그림자가 사실 원래는 수호천사라는 것을 당장 받아들이기는 힘들다. 없애려 하지 말고 안심하고 가만히 있게 해야 한다는 것이 이해는 간다. 언제쯤 그 작업을 할 수 있을까. 언제쯤 최소한의 화해라도 할 수 있을까.

매일같이 주치의 노쌤과 면담하고, 다른 것 신경 쓸 것 없는 안정된 환경에서 봄이와 이런저런 이야기도 하며 치료받다보니 은우는 꽤 나아져 있었다. 자기파괴적 행위를 충분히 제어할 수 있다는 판단이 서자, 은우는 퇴원하게 되었다. 드디어 퇴원 전날이다. 그림자가 무슨 일을 저지르면 얼마든지 미뤄질 수 있는 퇴원이지만, 어쨌든 내일 퇴원이다. 잠자리에 들며, 오늘은 그림자 말고 장미꽃 한 송이가 지켜주는 밤이 되길, 은우는 생각했다.

하얗다. 온 세상이 하얗다. 여긴 어디지? 은우는 주위를 둘러본다.

누구 있어요?

아무도 대답하지 않는다. 왠지 하얀 땅 끝으로 가고 싶다. 걸음을 옮기려 해본다. 걸음이 떼어지지 않는다. 눈이 부셔 손을 이마에 대고, 은우는 몸을 기울여 땅 끝을 보려 한다. 기웃기웃. 불긋불긋한 무언가가 보일락 말락 한다. 장미꽃 인가봐, 은우는 생각한다. 손을 뻗어도 너무 멀어 닿지 않는다. 걸음이 떼어지려 하는 찰나, 간호사쌤의 목소리가 들린다.

병실 불이 켜진다. 혈압 재러 나오세요- 아침이다.


 

[삽입2] 창작시 <괴물에게도?>

순수한 모순이여, 릴케는 말했지
배반의 장미, 쉽게들 말하지
장미의 가시는 죽음이고 배반인가

순수한 모순이여, 갈망이여, 릴케는 말했지
빨간 장미의 꽃말은 욕망이래, 쉽게들 말하지
왜 갈망하는가 왜 쟁취하려 하는가
왜 펜과 칼을 들고 결의하는가

인간은 빵으로 사는가
인간은 장미로 사는가
장미는 누구의 것인가
그래, 우리 모두 장미가 필요해
장미는 어디에서 탄생하나

우리는 파편이기에 서로를 찌르지만
피로 물든 붉은 파편은 꽃잎이 되네
나약한 우리도 모여서 스스로 장미가 되네

모여야 하는 파편들 그러나
어떤 조각은 오지 말라네
못생긴 조각은 오지 말라네
괴물도, 불법 인간도 장미가 될 수 있는가

장미여, 봉기의 창을 감싸 피어올라라

[본문 3]

퇴원이다.
두 달간의 병동생활 끝에 다시 만난 세계는 마냥 어색하고 새롭다. 이제 학교로 돌아가야 한다. 이제는 ‘일반적인’ 대학생활이란 것을 할 수 있을까. 똑같이 하루하루 지치더라도 소모적이고 자기를 파괴하는 생활로 지치는 게 아니라 생산적이고 자기를 계발하는 생활로 지칠 수 있을까. 그게 가당키나 할까. 뭐, 일단 생활 패턴 유지부터 하자. 반드시 할 것이다. 다시는 수면장애와 식이장애의 지옥으로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나는 버틸 것이라고, 살아서 꿈틀거릴 것이라고, 은우는 다짐했다.

여보세요? 응 나야. 지금 집에 들어왔어. 약 먹을 때까지 너랑 통화하려고.

오늘 점심약은 잘 챙겨먹었어?

응응 점심약 먹었어.

생활패턴을 유지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약 먹지 말라는 그림자의 목소리는 예전만큼 강력하지는 않았지만, 수월하게 복용하려면 친구와 통화라도 하면서 먹어야 했다. 그렇게 장기입원도 아니었고, 입원치료라는 게 뭐 엄청나게 대단한 것도 아니었다. 생각보다 병동 치료가 사회 생활을 위한 재활보다 그저 관리와 위험으로부터의 격리에 심하게 치중되어있다고, 은우는 항상 생각했다. 하지만 은우와 같은 정신질환자에게 최소한의 자기파괴 욕구 통제와 생활패턴 확립이라는 것은 대단한 것이었다. 혼자만의 힘으로는 아직 어렵지만. 오늘도 친구와 통화하면서 취침약을 먹었다. 친구를 괴롭히고 싶지는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다소간의 자괴감이 들었지만 이전에 비해 잘 하고 있다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은우의 일상은 여전히 힘들었지만 이전과의 결정적인 차이점은 힘들 때 자해나 자살행동으로 도피하려 하지 않고 현실을 산다는 것이었다. 은우를 창녀 정신병자로 낙인찍는 것은 그림자뿐만 아니라 은우 역시 스스로에게 하고 있었는데, 그것이 은우를 많이 괴롭혔다. 그만두기로 했다.

나름 학교생활 열심히 하느라 잊고 있었는데, 오늘은 시간이 좀 남는다. 왠지 돈을 벌고 싶다. 데이팅어플을 다시 깔았다. 오랜만에 일 해야지. 쪽지가 순식간에 십수개가 날아온다.

페이가 어떻게 돼요? 사이즈는? 위치가? 저기요 답장 줄래요? ᄌᄀ 맞아요?

여기서 촉을 발휘해 고객을 잘 잡아야 한다. 이제 은우는 잘 알고 있다. 진상을 잡으면 힘들어진다. 노쇼도 골치 아프다. 정 재수 없으면 어쩔 수 없지만, 최대한 피해볼 요령은 있다. 다 봄이가 알려준 거다. 할 짓이 그렇게 없나, 대체 노쇼는 왜들 하는 거야. 촉을 발휘하려 머리를 최대한 굴리며 은우는 중얼거렸다. ‘사이즈 156 48 75B 페이 17 텔비 미포함이구요 두 번까지 가능하고 두 시간까지 가능하고 노콘이나 애널 안돼요’ 괜찮아 보이는 고객을 물색하며 채팅창에 복사하기 붙여넣기...

픽업 약속한 장소에서 노래를 들으며 여유롭게 고객을 기다리고 있었다. 한 외제차가 은우 앞에 멈춰 서더니 창문을 내렸다. 늘 그렇듯 문을 열고 타려던 찰나,


음 저기 잠시만요 타지 마시고요..!

뭐지? 은우는 순간 무슨 일인가 겁먹었다.

네? 픽업하러 오신 거 아니에요?

아 맞는데, 미안해요 머리가 그렇게 짧으실 줄 몰랐어요 제 스타일이 아니어서...

만남 힘들 것 같아요 죄송합니다...

야, 고작 머리? 머리가 짧아서 안 만나겠다고?

앗... 아....... 알겠어요 조심히 가세요.......

얼마 전 은우는 기분전환 겸 머리를 짧게 잘랐다. 그게 제약이 될 줄이야. 물어보지도 않았잖아. 그리고 애초에 머리가 무슨 상관? 은우는 다소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뭐, 다른 사람 찾으면 되니까, 생각했다.

다른 사람과 만남이 끝나고 모텔에서 나와 집으로 가며 은우는 자연스레 담배케이스를 꺼내들었다. 로맨스진상에 노콘러다. 재수 없었다. 문득 봄이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런 얘기가 있대. 성매매가 아니라 성노동이라구. 성노동 합법화였나 뭐 그런 말도 있던데, 잘은 몰라. 나도 들어만 봤어.’


‘성노동’을 검색했다. 은우에게는 생소한 단어인데 생각보다 검색결과가 많아 깜짝 놀란다. 비범죄화? 합법화랑 다른건가? 트위터 검색결과에 들어갔더니 어떤 계정 닉네임 옆에 빨간 장미 이모지를 달고 있다. 예쁘네, 생각한다. 그런데 한 명이 아니다. 성노동을 이야기하는 사람들 중 여러 명이 장미 이모지를 달고 있다. 그 중 한 명의 자기소개를 클릭해본다. #sexworker 라고 써있다. 섹스워커. 성노동자. 이번엔 그 해시태그 #sexworker를 클릭해본다. 아까 봤던 빨간 장미 이모지를 단 계정들이 나타난다. 아, 이 사람들이 성노동자라고 자신을 지칭하는 사람들이구나.


‘성노동 비범죄화’도 검색해본다. 뭔지는 모르지만 갑론을박이 많은 것 같다. 그리고 더 검색하면서 나와 같은 사람들은 ‘우리’의 권리를 위해 성매매가 범죄가 아니게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분명 중고등학교에서는 성매매는 없어져야 하는 것이라고 배웠는데. 게다가 불법은 나쁜 거잖아. 내가 하는 일이지만, 그래도 이건 나쁜 일인 줄 알았는데. 혼란스럽지만 '장미' 계정들의 트윗을 보니 뭔가 나 같은 사람들을 위해 말하는 것 같다. 봄이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와 똑같이 왠지 모를 연대감과 배덕감이 함께 올라온다. 덕질하는 계정에 내가 몸 파는 여자인 것이 알려질까봐 두려워 은우는 성노동에 대해 알아가기 위한 계정을 새로 만든다. 그리고 장미 이모지를 단 계정들을 팔로우한다. 나도 장미 이모지를 달아도 되는 건가? 생각하다가 장미 계정들을 잇는 계정을 발견하고 멘션을 나눈다. 성노동자라는 정체성을 가진다면 누구나 장미를 달 수 있다고 한다. 조건할 때 이름을 물어보면 주로 둘러대던 이름을 닉네임으로 하고, 옆에 장미를 달았다. 다른 장미 계정들과도 친해지기 시작했다. 가장 신기한건 그거다. 나는 내가 일반인들 사이에 숨어 사는 괴물인 줄 알았는데, 이분들은 정말 그냥 평범한 사람들이다. 창녀들도 노동자고 어디에나 있는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내가 그런 사람인데도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오늘도 익숙하고 자연스럽게 고객을 만나 모텔에 들어갔다. 이제 더 이상 만남하는 ‘오빠’가 은우를 바라보는 시선이 신경 쓰이거나 이질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오빠’의 요구에 따라 함께 샤워하러 들어가서 물줄기를 틀었다.

뭐야, 이거 문신이야?

만나자고, 답장 달라고 애걸복걸 하더니 모텔 들어오자마자 웬 반말이람.

네 여기에 원포인트로 하나만 있어요.

나 문신한 여자 싫어하는데.

어쩌라고. 가 입 밖으로 터져나올 뻔했다. 예전에는 ‘오빠’와 둘이 모텔 안에 있는 상황이 무서워서 만남 할때마다 늘 겁먹어 있었는데, 트위터 장미님들과 이야기하며 많이 자신감과 성노동자 프라이드가 생기긴 했나보다. 이제 겁먹지 않는다. 자해 흉터도 가리지 않는다.

크지도 않은데요 뭐, 헤헤.

웃으며 자연스레 넘긴다. 저번엔 고작 머리. 이번엔 고작 타투. 참 조건녀의 기준도 까다롭다.

오늘 만남한 고객도 콘돔 동의하고 만나서 막상 할 때 빼려고 했다. 장미 이모지를 단 분이 쓴 성노동 조언 트윗대로 성병을 겁주면서 나를 뭘 믿고 노콘하려 하냐고 우겨봤다. 운 좋게 성공했다. 점점 성노동자의 연대에 대한 확신이 생긴다. 물론 이 계정들을 보면서 성매매를 하려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지 않을까, 그리고 나는 그냥 사치 부리려고 몸 파는 여자 아닌가, 불법인데 이렇게 권리라고 주장해도 되나 하는 자기의심이 완전히 멈추지는 않는다. 몸 팔아서 쉽게 돈 버는 것 가지고 멋대로 권리라고 주장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든다. 일단 오늘은 타투 시비를 비웃으면서 수면제와 항우울제를 삼키고 잠에 든다.


검은 그림자들이 은우를 휘감는다. 에워싸는 목소리.


몸 파는 년.
몸 파는 년.
몸 파는 년.


그림자 사이에서 검은 손이 불쑥 튀어나와 은우의 이마에 새긴다.


몸 파 느...

나는 몸 파는 게 아니라 일 하는 거야!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은우가 웅얼웅얼 외친다. 꿈에서 겨우 깨어난다.

씨발,

은우가 힘에 겨워 욕을 뱉는다. 그래, 나는 몸 파는 게 아니라 일 하는 거다. 은우도 이제 장미 계정에 은우의 성노동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은우는 천천히, 은우를 죽일뻔한 고립과 낙인의 늪에서 함께 손잡고 빠져나가고 있었다.

봄이가 생각났다. 연극배우가 하고 싶지만, 창녀라서 유명해지면 안 되기에 포기 한다던 봄이. 끼도 많고 활발한 친구가 그런 이유로 꿈을 접게 두고 싶지는 않다. 어느새 페미니즘과 성노동이론을 접하게 된 은우는 여성에 대한 사회의 낙인이 참 얄궂다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우울증의 늪에 빠지기 전 가지고 있었던 자신의 꿈도 정말 오랜만에 떠올린다. 그래, 나는 작가가 되고 싶었어, 은우는 생각한다. 글을 쓰는 예술가가 되고 싶었어. 다시 꿈을 가지고 싶어. 잘 모르겠지만 섹스가 노동이 될 수 있다면, 만약 성 서비스를 파는 게 노동이라면, 그것과 관련된 글을 쓰고 싶다. 그 노동, 성노동을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연극으로 쓰면 어떨까?
봄이에게 주인공을 맡길 거야. 극작가가 되어서 먼저 성노동자의 이야기를 쓰고, 봄이와 초연을 올리고, 나중에는 다른 종류의 약자들의 이야기도 쓰고 싶다. 그래, 꿈이 생긴 것 같아.

그리고 성매매가 더 이상 범죄가 아니게 된다면, 그래서 성노동자가 자신을 드러내도 위험해지지 않는다면, 나의 연극 초연에 그들을 무료로 초대하고 싶어. 언젠가 그럴 수 있는 날이 올까? 우리가, 고립되고 낙인 찍혀 심지어 죽기도 하는 이 사회의 가장 어두운 바닥의 사람들이, 그렇게 함께 어울리고 빵 만이 아닌 장미를 누리고 양지에 나올 수 있는 세상이 올까?

은우는 다짐한다. 내가 그런 세상을 만들 거야. 나는 고립되고 낙인찍히는 것을 거부할거야. 봄이와 함께 나의 예술을 할 거야. 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한편으론 다소 비장해진다. 남을 돕기 위해선 나부터 강해져야겠지. 남을 행복하게 해 주기 위해서는, 나부터 행복해져야겠지. 달라진 내 모습이 스스로도 놀랍다. 제발 예전으로 돌아가지 말자. 지금 난 나름 행복해.


[삽입 3]

Rose, oh reiner Widersprluch, Lust
niemandes Schlaf zu sein unter soviel Lidern.
-Rainer Maria Rilke

장미여, 오 순수한 모순이여, 갈망이여
그 많은 눈꺼풀 아래에서 누구의 잠도 아닌.
-라이너 마리아 릴케


 

[상편 결말]

이상하다. 뭐가 이상하지? 공허한건가, 심심한건가, 어색한건가. 아무래도 어색한 것 같다. 보통 이 시간이면 그림자와 싸우면서 꺼져, 닥쳐를 외쳐야 하는데, 꿈이 생긴 그날 이후 그림자의 사악한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은우는 연극을 구상하면서, 취침 전 먹는 알약들을 한입에 털어 먹었다. 자우림 노래 플레이리스트를 틀어놓고 흥얼거리며 침대에 눕는다. 이제 그 가사는 내 이야기가 아니다. 이제 ‘포도주스로 채워진 보라색의 내 손목’은 더 이상 실제로 그을 정도로 유혹적이지 않다. 세상에, 별다른 어려움 없이 내 의지만으로 약을 챙겨먹고 씻고 제 때 잠을 자다니. 은우는 미소를 지었다. 입꼬리가 올라간 게 너무 오랜만이었다. 고등학생 때 우울증이 급격하게 심해진 이후로 처음이었다. 성노동자 트위터친구들 중 우울증으로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참 많다. 물론 당장 암흑 속에서는 빛의 존재조차 믿기 힘든 것이 당연하지만, 그리고 은우도 그랬지만, 서서히 빛을 볼 수 있다고 말해주고 싶다. 적극적으로 치료를 받으라고 내 삶을 증거로 권해주고 싶다. 우리는 행복할 권리와 일할 권리를 가진 사람이다. 일할 권리를 위해 성노동 비범죄화를 이야기하는 분들 모두가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다. 행복할 권리도 스스로에게 이야기해주면 좋겠다. 조금이라도 나아질 수 있다고, 덜 힘들어질 수 있다고 믿을 수 있으면 좋겠다. 은우는 눈을 감았다. 포갠 손 사이에 빨간 장미 한 송이가 있다고 상상하며 잠에 빠진다.

하얗다. 온통 둘러봐도 하얀 천지다. 발을 내딛을 때마다 낯선 감촉이 느껴진다. 아니, 사실 낯설지 않다. 병동에서 꿈에 나왔던 바로 그 곳이다. 말랑말랑한 땅의 끝에 길게 빛나는 지평선이 보였다. 은우는 지평선을 향해 걸었다. 걸으면 걸을수록 흰색의 빛에 빨간색이 섞이기 시작했다.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빨간색이 많아지고, 뚜렷하게 보였다. 은우는 달리기 시작했다. 저기라면 쉴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맨발이니 더 빨리 달릴 수 있을 거야. 은우는 몸을 앞으로 숙이고 무릎에 힘을 주었다. 정신없이 달리느라 산발이 된 머리를 누군가가 묶어주었다. 누구지? 돌아보니 그림자가 따라오고 있었다. 그렇게 보기 싫던 그림자가 오늘따라 반가웠다.

저긴 야생장미 군락지야. 어서 가봐.

야생장미 군락지라는 곳은 낯설지 않았다. 원래 있었던 곳인 양 편안했다. 초원에 울려퍼지는 재즈풍의 레퀴엠. 빨간 장미 한 송이 한 송이가 오랜 친구처럼 느껴졌다. 은우는 그림자를 돌아보았다. 언제나 검고 커다란 성인 남자였던 그림자가 작은 어린아이가 되어 서 있었다. 그림자는 장미 바깥에 서 있었다. 은우는 장미를 헤치고 아이에게 다가갔다. 은우의 온몸에 꽃잎과 잎사귀가 묻었다. 은우는 아이의 앞에서 무릎을 굽혀 앉아 그림자를 끌어안았다.

지금까지 나를 따라다니느라 고생 많았지? 네가 내가 외롭고 추운 어린 시절 나를 보호하기 위해 생긴 수호천사라는 걸 알고 있어. 네가 병원을 싫어하고 약을 못 먹게 한 것 역시 마찬가지라는 것도. 결국 내가 죽음의 품으로 가서 더 이상 힘들지 않기를 원한 거잖아. 하지만 난 이제 어른이야. 나는 고립되어있지 않아. 의사도 있고, 친구도 있어. 문제가 생기면 회피하지 않고 스스로 해결할 힘도 있어. 이제 더 이상 어린아이인 네가 힘들게 덩치를 키워 나를 지킬 필요가 없다는 뜻이야. 알겠니?

희미해진 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은우의 마음속에서 어떤 것이 벅차올랐다.

이제 걱정하지 마. 내 뒤에 가만히만 있어. 네가 나타나면 어른인 나의 삶은 엉망이 돼. 이제 나는 내가 책임질게. 그동안 정말, 정말 고생했어. 이제 푹 쉬어.

은우는 한참동안 그림자를 안고 있었다. 그림자는 점점 그 색을 잃고 있었다. 하얀 빛이 군락지의 하얀 땅에서 자라나와, 은우와 그림자를 휘감기 시작했다. 은우는 발가벗었다. 그림자는 나에게 미소지었다. 신이 내린 거울이 내려왔다. 은우와 은우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보인다. 그들은 드디어 손을 잡고 웃고 있다. 텅빌 주머니도 없는 채 자유롭게 춤을 추었다. 계속 춤을 추었다. 이슬이 목을 축여준다. 하얀 빛의 기둥 속에 감싸인 채 은우는 그림자와 하나가 되는 것을 느꼈다. 빛의 기둥들이 은우를 흰 땅 속으로 묻어간다. 다른 전혀 낯설지 않은 장미들 사이에 있었기에 은우는 무섭지 않았다. 포근했다.

땅 속에서 붉은 봉오리가 자라난다. 튼튼한 줄기를 가진 붉은 장미다. 은우가 잠자리에 들기 전 상상했던 빨간 장미였다. 들풀들 사이에서도 위화감이 없다. 애초에 야생의 장미다. 은우를 땅 밑으로 데려간 흰 빛들이 장미를 축복하듯 비췄다. 장미가 봉오리를 활짝 피워낸다. 은우꽃이었다. 퇴원하고 한동안 만나지 못했던 봄이, 보고 싶었던 봄이. 봄이도 장미꽃이 되어 피어있다. 봄이꽃은 지극히 평온해보인다. 봄이장미와 은우장미가 위로 올라간다. 그래, 장미들을 위로한다. 봄이장미와 은우장미 위로 빨간 우산이 내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