흉폭한채식주의자들 삶은 그 자체로 존귀하다.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 우리는 이 낡디낡은 명제가 여전히 낯선 현실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발붙인 이 기이한 세계에서는 같은 피를 흘려도, 동물보다 사람의 목숨이 귀하며 같은 몸과 시간으로 일해도, 성노동은 착취일 수밖에 없으며 죽음 앞에서마저 비천한 죽음과 존귀한 죽음이 경계 지어지기에 그저 ‘내가 귀한 쪽이길’ 바라는 것을 당연히 여기게 됩니다. 정치 철학자 주디스 버틀러의 문장을 빌려 묻습니다. “살아갈 수 있는 삶, 애도할 수 있는 죽음으로 여겨질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왜 어떤 형태의 슬픔은 국가적으로 인정받고 확장되는 반면에 다른 상실은 사유 불가능하고 애도 불가능하게 되는가?” 신고할 수 없는 폭력, 기록되지 않는 삶, 애도할 수 없는 죽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