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7 성노동자 추모행동/2022 성노동자 추모행동 <모든 취약한 존재가 초대된 장례식>

[2022 성노동자 추모행동] 혜곡(성노동자해방행동 주홍빛연대 차차)

성노동자해방행동 주홍빛연대 차차 2022. 12. 23. 17:29

 

영상 촬영 : 은석

 

2022 성노동자 추모행동 <성노동자, 성소수자, 약물 사용자, 이주민, HIV/AIDS 감염인, 모든 취약한 존재가 초대된 장례식> 발언문 공유

혜곡(성노동자해방행동 주홍빛연대 차차)

안녕하세요. 주홍빛연대 차차의 혜곡입니다. 이번 발언을 준비하면서 가장 먼저 떠올랐던 건 사실 지난 이태원 참사였습니다. ‘지난’ 이태원 참사라고 말하는 게 적절하지 않은 것 같기도 하네요. 국가는 그날로부터 여전히 달라지지 않고 있으니까요. 아무튼 그날의 비극은 많은 사람들에게 큰 아픔으로 다가왔죠. 개인적인 소회를 밝히자면, 사건이 막 터졌던 당시에 SNS에서 온갖 억측이 난무했던 기억이 강렬하게 남아 있습니다. 특히 ‘이 사람들은 압사당한 게 아니다, 다 같이 마약을 즐기다가 저렇게 된 것이다, 봐라, 몸에 아무런 흔적이 없지 않냐’ 이런 주장이 대표적이었어요. 참사의 영향력이 일파만파 퍼져나가면서 그런 주장은 빠르게 자취를 감췄지만, 사람들이 보였던 반응은 여전히 제 마음에 남아 까끌거립니다. ‘마약 중독자’들이 ‘마약’ 하다가 잘못된 게 뭐 대수냐는 식의 그 뉘앙스들을 도대체 어떻게 납득할 수 있을까요. 그런 식으로 ‘죄 없는 사람들’을 ‘모욕’하지 말라는 훈계들을 어떻게 용서할 수 있을까요.

일단 저는 못할 것 같아요. 그런 말들은요, ‘너무 문란해서 에이즈에 걸리고 만’ 성소수자를, ‘여성으로서의 존엄보다 한낱 돈이 더 중요한’ 성노동자를, ‘불법체류자 주제에 우리 국민의 일자리를 빼앗는’ 이주자를 높은 확률로 함께 찌릅니다. 원한이 부글부글 차오르네요. 하지만 숨을 한번 가다듬고 이 잔혹한 세상에 맞서 쳐들 방패를 고민해봅니다. 우리가 약물 사용자들의 죽음을 진정 애도할 수 있다면 우리는 다른 모든 취약한 존재에 대해서도 그 삶들에 기뻐하고 죽음들에 슬퍼할 수 있을 겁니다. 그건 살면서 못해도 한번은 취약한 순간에 처하게 될 나 자신을 환대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저는 10대 때 성폭력을 겪은 적이 있는데요. 웬 놈에게 강제적으로 몸을 만져지면서 ‘아, 이런 나도 누군가 욕망해주는구나’ 이런 생각에 솔직히 우쭐했습니다. 그 뒤에 페미니즘이라는 걸 알게 되고, 제가 성폭력 피해자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 저는 저 자신을 오롯한 피해자로 보존하기 위해 그때 느꼈던 고양감은 없었던 셈 치려고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함으로써 어떤 이야기는 세상에서 사라집니다. 강간당하고 나서 강간 판타지가 생긴 어떤 못생긴 소녀가 제 얘기를 접하고 비로소 수치심에서 해방될 기회도 사라집니다. 우리가 살아가기 위해서는 더 많은 이야기가 필요합니다.

하지만 성노동자가 이야기되는 곳은 아직도 너무 적기만 합니다. 그마저도 나서서 했냐, 강제로 했냐를 묻고, 탈성매매를 원하냐, 원하지 않냐를 나누고, 그래서 합법화를 원한다는 거냐, 아니면 어쩌자는 거냐를 또 따집니다. 가뜩이나 얼마 없는 공간에 몸집을 잔뜩 불린 편견들 때문에 우리의 복잡하고 변화무쌍한 경험들은 자주 설 자리를 잃습니다. 그러나 여기 모인 성노동자들에게는, 퀴어들에게는, 약물 사용자들, HIV 감염인들, 이주민들, 장애인들과 아픈 사람들, 그리고 각각의 정체성을 가로지르고, 뛰어넘고, 미끄러지는 사람들에게는, 다시 한번 말하건대 더 많은 이야기가 필요합니다. 우리를 배제하고 낙인찍는 말들 속에서 우리가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감각을 안겨줄 그런 이야기들이요. 의료적 담론도 법적 담론도 우리가 겪는 삶의 중층적인 맥락을 완벽히 포착할 수는 없습니다. 심지어 인권을 말하는 담론들도 우리의 진실을 비껴갈지도 모릅니다. 이때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그냥 서로의 얘기를 들어주는 것 아닐까요? ‘왜 그랬지?’, ‘나라면 그러지 않았을 텐데.’ 그런 판단은 잠시 밀어두고, 일단 그냥 들어주는 겁니다. 더 많은 이야기들이 세상에 나올 수 있도록요.

저는 윤회를 좀 믿는데요. 만약 우리 곁을 떠나간 사람들이 어떤 형태로든 이 세계에 다시 돌아온다면, 그때는 조금이라도 덜 괴롭도록, 좋은 것은 좋았다고, 싫은 것은 싫었다고 더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두는 것이 추모하는 자의 도리라고 믿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