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성노동자 추모행동 <성노동자, 성소수자, 약물 사용자, 이주민, HIV/AIDS 감염인, 모든 취약한 존재가 초대된 장례식> 후기
탈해
성노동자 추모행동에 참여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말 그대로 세상을 떠난 성노동자(를 비롯한 여러 취약한 존재)를 기리는 행사라고 했다. 진행자인 유리님이 한 말이 기억에 남는다. 이제 좀 안 하려나, 안 해도 될까 싶었으나, 어김없이 각지에서 성노동자가 부당한 죽음을 당했기에 어김없이 행사를 준비했다고. 아무래도 그럴 것이다. 대체로 취약한 존재가 먼저 떠난다, 마치 그것이 중력 같은 물리 법칙이라는 듯이. 하지만 그 죽음들은 철저히 사회적이다. 사회는 이들을 부르는 방법조차 모른다고 항변하겠지만, 오히려 그런 이유에서 이 부당함은 사회적인 것이다.
말할 수 없는 존재들, 불려지지 않는 존재들, 말이 되지 않는 존재들, 말하도록 허락받지 못한 존재들. 언제 어디서 어떻게 스러지든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을 거라고, 그렇게 믿도록 강요당한 이들이 있다. 행사는 그들을 적극적으로 소환했다. 성소수자, 약물 사용자, 감염인, 성노동자, 이방인, 비인간동물, 청소년 등. 당사자와 당사자의 동료, 동지, 친구, 그밖에 친밀함과 공감으로 연결된 분들이 존재들을 위해 발언해 주었다. 혜곡님은 성폭력의 경험 혹은 성노동의 경험이 페미니즘과 합치면서 더 다채롭게 빚어질 수 있고 또 그래야 함을 들려주었다. 소주님은 아픈, 약물을 사용하는, 병을 옮기는, 일하며 살아가는, 잊을 수 없는 이들을 위한 세상을 그렸다. 나미푸님은 떠난 이들과 남은 이들의 이야기를 통해 게이 커뮤니티와 약물 사용에 대한 낙인을 증언했다. 달연님은 커다란 감금시설 같은 이 사회에서 또다시 침묵당하는 비인간 동물과 더불어, 결국 이주민이고 노동자일 우리 모두의 연결 가능성을 짚어 주었다. 정여름님은 외국인보호소에서 아프고, 울고, 죽어간 이들을 기억하고 애도했다. 보통님은 취약한 위치로 내몰린 청소년과 소수자를 이야기했다.
행사 내내 불쑥불쑥 생각난 건, 배제와 혐오가 숨보다 쉬이 쉬어지는 이 세상이 아닌, 다른 어떤 것을 믿는 일의 어려움이었다. 도대체가 가당키나 한가. 시시때때로 침범하는 의구심에 짓눌리면서도 계속 뭔가를 믿는 일은 이미 노동이다. 그러나 그런 믿음은 우리를 살아가게 한다. ‘누군가에겐 너무 특별해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이들이 눈가에 아른거리고, 때로는 발목을 붙잡는 듯도 하지만, 그 무거움 때문에 다시금 살아 무엇이든 해야겠다 다짐하곤 한다. 믿음과 삶이 바닥을 질질 끌듯 납작하게 붙어 있다. 시선은 어제에 머물면서, 우스꽝스럽게 기고 구르며.
닫는 공연에서는 이끼님이 노래를 했다. 생일을 축하하는 노래였다. 정확히는 생일을 축하하려던 어느 문턱에서 떠난 이를 기다리는 노래였다. 떠난 이를 기다리다 ‘꼬부랑 할머니’가 되었지만, 그가 돌아오면 아무렇지 않게 안아주고 늦은 파티를 시작한다. 생일 축하합니다. 사랑하는 너의 생일은 축하합니다. 음은 빠르게 퍼지고 흩어졌지만, 소리가 지나간 자리에 물든 울림은 멈추지 않고 맴돌았다. 자세히 보니 그 맴돌이에는 애도와 축하가 불가해하게 포개져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함께 불렀다. ‘너는 누군가에게 너무 특별해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사람이 되기도 하고’ 이 구절과 그 뒤의 모든 가사가 새겨질 때, 그 자리에 모인 모든 ‘너’들은 또 각자에게 ‘누군가’가 되었으리라고 믿는다, 혹은 믿고 싶다. 세상을 떠난 약물 사용자, 성소수자, 성노동자, 외국인 노동자, 그 외에 이름이 있었던 많은 취약한 이들.
“빈 그릇을 들고 한 방향으로 걷다
맞은편에서 날아 들어오는 커다란 소리에 놀라
몸을 틀어 뛰기 시작하는
어떤 이름을 가졌던 사람의 어떤 하루를 상상해 본다
……
파괴적인 소리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길을 찾아 돌아가려는
어떤 이름을 가졌던 사람의 어떤 혼잣말을 상상해 본다”
- 이랑, <어떤 이름을 가졌던 사람의 하루를 상상해 본다>
성노동자 추모행동은 사회가 지운 이들의 이름을 발굴했고, 낙인으로 여겨지던 정체성에서 자긍심을 길어 올려 기억하고 애도했다. 누군가는 너무 많은 정체성과 분류가 혼돈을 부른다고들 한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정체성은, 그렇게라도 분류되고 기억되어야만 하는 어떤 것이다. 행사는 나아가, 같지는 않아도 비슷하게 혐오받는 취약한 특성들이 모여 우리를 느슨하게나마 이어 줄 가능성을 보여 줬다. 어떤 추모는 꼭 필요하고, 이에 동참해야 한다고 믿으며, 그 믿음을 안고 자리를 함께 한 사람들의 온기가 거기에 있었다. 너무나 당연하게 원한과 슬픔, 분노가 쉴 새 없이 튀어나왔지만, 이는 다시 기억으로, 고민으로, 기억에 대한 고민으로, 각오와 다짐과, 마땅히 지워지지 않아야 할 존재들을 지우지 않는 어떤 것들로 끊임없이 이어졌다.
나는 이 따스함이야말로 매서운 이 세상 한 구석에 꼭 필요한 의식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오히려, 성노동자 추모행동이 절대로 없어져야 할 행사라고 생각했다. 굳이 하지 않아도 될 행사라고, 사회는 이런 식으로 기억과 추모를 외주 주는 직무유기를 중단해야 하지 않겠냐고 생각했다. 기억할 필요도 없이, 그냥 애초에 배제하고 차별하지 않고, 죽이지 않으면 되지 않겠냐고 생각했다.
그리고 자리에 함께한, 내가 사랑하는 이들을 생각했다.
있는 힘껏, 내일을 생각했다. 어제와 모두가 잊히지 않는 내일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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