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7 성노동자 추모행동/2022 성노동자 추모행동 <모든 취약한 존재가 초대된 장례식>

[후기] 팔도 : 2022 성노동자 추모행동 후기

성노동자해방행동 주홍빛연대 차차 2023. 1. 3. 18:18

photo by. 파란

 

‘우리’의 형식

- 2022 성노동자 추모행동 <성노동자, 성소수자, 약물 사용자, 이주민, HIV/AIDS 감염인, 모든 취약한 존재가 초대된 장례식> 후기

팔도

 

요즘 호명에 관심이 많다. 알튀세르가 이데올로기론을 통해 설명한다는, 호명의 구조에 대해 찾아보면 대충 이런 예시가 있었다. 경찰이 “어이, 거기!” 하고 지나가는 누군가를 부른다. 행인은 돌아본다. 개인이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들과 마주쳐서 어떤 동일성을 부여받을 때 주체가 돌발하고 어쩌고··· 근데 솔직히 뭐라는지 잘 모르겠다. 다만 이런 장면을, 그러니까 누군가가 누군가를 부르고 돌아서는 장면을 자주 생각하게 된다.

작년 차차가 주최한 성노동자 추모행동 때는 눈이 정말 많이 내렸다. (그러고 보면 이때도 행사 ‘안전’을 관리하는 경찰들이 있었다.) 폭설 속에서 걸그룹 음악에 맞추어 가사를 함께 외치고, 웃고, 춤추며 걸었던 기억이 아직, 그리고 아마 앞으로도 내내 선명하다. 그렇게 걷다가 한강진역 부근인지 어디쯤이었을까. ‘우리’는 갈색 종이봉투를 뒤집어쓴 다른 ‘우리’(IW31)와 마주쳤다. 그때 ‘우리’는 서로를 호명했었나? 우연한 마주침에 놀라고 기뻐 손을 마구 흔들며 환호했던 것 같다. 그리고 곧바로 스쳐 지나갔던가, 합류했던가.

2022년 ‘우리’는 달리, 다시 모였다. 온갖 취약한 존재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천천히 부르며. 성노동자, 성소수자, 약물 사용자, 이주민, HIV/AIDS 감염인, 비인간 동물······.  그러나 ‘우리’를 부르며 모인 이 곳은 홍대역 부근의 ‘장례식’ 공간이었다. 이태원이 아니라.


까만 상복이 아니라 하얀 옷을 입고 들어선 ‘장례식장’, 인사이터홈은 말 그대로 ‘공간대관 전문 렌탈 스튜디오’적이었다. 바로 아래층에는 돌고래 스티커가 붙여져 있는 당구장이 있었다. 인사이터홈 내부에는 공간이 구획되어 있고, 실제로 소규모 회의실 같은 다른 공간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계속 드나들었다. 그러니 이들도 건물 1층 유리문에 붙여진 “모든 취약한 존재가 초대된 장례식”의 포스터를 마주쳤을 테다. 당구장을 향하는 중년 남성들, 회의 공간을 대여한 사람들, 어쩌면 1층 식당에서 잠깐 나와 담뱃불을 붙이던 손님들도.

추모행동 공간 내부에는 트리의 전구를 닮은, 따뜻한 색조의 조명이 내리쬐고 있었다. 콘돔과 빈 담배곽, 바이브레이터(딜도?), 도마 위에 놓인 거울, 일렁이며 타들어가는 초, 뜨개 코스터, “너는 누군가에게 너무 특별해”라는 새빨간 문구와 장미 크림이 수놓인 케이크, 라면 과자, 알약 봉투가 한가득 들어간 종지가 놓인 제사상은 프로젝터 스크린 앞에 놓여있었다. 한 쪽에서 차차 활동가들이 『반란의 매춘부』를 판매하고, 다른 한 쪽에서는 라이터와 스티커 굿즈를 배부해준다.

어수선한 온기 속에 착석하자 유리의 진행으로 기묘한 ‘장례식’이 차츰 진행된다. 혜곡, 소주, 나미푸, 달연, 여름, 보통의 발언이 이어졌고, 자유발언, 차차 측에서 구글독스로 수합한 익명의 추모사 대독이 마무리된다. 이윽고 (이끼의 표현을 따르자면) “눈물참기 챌린지”와도 같았던 이 장례식의 닫는 공연이 시작된다. 나는 이끼의 유일한 추모곡 “생일파티”의 멜로디도, 가사도 전혀 몰랐지만 금세 흥얼거릴 수 있었다. 김사월의 “누군가에게”를 함께 부르며 ‘우리’는 ‘너’의 때늦은 생일파티이자 장례식을 마무리한다. 곧바로 『반란의 매춘부』를 판매한다는 활기찬 여름과 열심, 사랑해의 목소리가 쩡쩡 공간을 울린다.


장례식 중에 어떤 말들이 나를 불러 세웠고 ‘우리’를 다시 호명했는지, 어떻게 발언자들이 울고 화내고 흔들리다가도 씩 웃고 박수쳤으며 그걸 보는 나도 기쁘고 슬프게 부서졌는지 모두 되짚기는 힘들 것 같다. 귀한 발언 내용만큼이나, 어쩌면 그보다도 더 내게 실은 중요하고 강렬했던 건, ‘우리’가 ‘우리’를 부르고 초대하는 형식 그 자체였다.

그럼에도 꼭 다시 언급하고 싶은 귀한 이야기 중 하나는, 자유발언에서 자신이 죽으면 꼭 수의로 입고 싶었던 하얀 원피스를 입고 참석했다는 분의 말이다. 그렇구나, 수의는 흰 옷이었구나. 맞아, 나도 흰 옷은 때 탈까 봐 잘 안 사고 안 입는데 하며 고개를 연신 끄덕였었다. 얼룩지고, 때 타고, 낡고, 서로를 더럽히고 서로에 의해 더럽혀지는 것에 대해 계속 생각했던 것 같다.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내보여질 수밖에 없는 흰 옷을 이제는 망설임 없이 입고 싶다. 그리고 얼마나 지연되더라도 ‘우리’가 끝끝내 당신의 생일을 축하하고 죽음을 노래할 수 있으면 좋겠다.

한 해를 건너오며 나는 약물 사용자가 되었다. 동성애자가, 흡연자가 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너’를 기묘한 장례식에서 함부로 그려보고 ‘우리’라고 부르는 사람이 되었다. 알튀세르고 나발이고, 이 변화는 차차와의 마주침, 그리고 차차를 통해 돌아본 ‘우리’ 사이의 긴장, 적대, 연결으로 가능했다고 느낀다. 경찰, 의사, 판검사가, 이런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들이 (라고 쓰면서 여전히 뭔지 모른다고 자백한다) ‘우리’를 호명하는 방식을 뻥 걷어차며 ‘우리’를 다르게 불러 세워 준 차차에게, 너무나 다른 ‘우리’가 서로를 부르고 돌아서는 장면들을 상상하고 실현할 수 있게 만든 차차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전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