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홍빛연대차차 98

[2021 성노동 프로젝트 제 5회] 모르겠는 사람 : 모르겠다

모르겠다 모르겠는 사람 모르겠다. 하고 싶은 말이 언제나 많았는데, 어느 순간부터인가 나는 말을 잃어버렸다. 예외에서 태어나 법 바깥에서 살아내는 일은 언제나 내 말문을 막았다. 사람들의 질문에는 언제나 답이 정해져 있었고 내 말풍선은 언제나 정답 바깥에 있었다. 붉게 그어진 채점표 아래에서 나는 입을 닫았다. 언제나 바쁘게 설명하고 열변을 토하던 입은 읽는 법도 쓰는 법도 듣는 법도 말하는 법도 잊어버려서 그저 꾸역꾸역 먹기만 한다. 맛있는 음식을 씹어 삼키고 있으면 혀에 스며오는 단맛이 뇌세포를 사르르 녹여낸다. 구겨진 뇌 주름이 매끈하게 펴지는 기분이 나쁘지 않다. 그동안 뇌에 너무 힘을 주고 살았던 걸까? 이전에는 어떻게든 잘 살려고 아등바등했었던 것 같은데 이제는 그냥 살아진다. 그냥. 이 낯선..

[2021 성노동 프로젝트 제 5회] 이오 : 나는 어떻게 성노동론자가 되었나

나는 어떻게 성노동론자가 되었나 이오 나는 젠더퀴어다. 그 이전에는 내 정체성을 고민하는 퀘스처너였고 그 전에는 앨라이였다. 꽤 자주 ‘계집애 같은 새끼’ 라는 소리를 듣고 늘 자기검열에 빠진 채 벽장 속에 갇혀 살던 나에게 퀴어이론과 페미니즘은 자유를 가져다줬다. 많은 과정을 거쳐 나 스스로를 젠더퀴어로 정체화했을 때 나는 내가 나로 사는 것이 틀린 것도 아니고 나쁜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됐다. 그 뒤로 나는 나뿐만 아니라 남들을 이해하고 포용하고 공감하는 시야도 조금 더 넓어졌다. 그렇게 내 안에 있던 다양한 혐오를 조금씩 걷어내고 더 많은 지식을 알게 됐다. 그러면서 누군가 사실이라고 말하는 것들이 실은 얼마나 날조됐고 자기들 편한 대로, 유리한 대로 비틀어댔는가에 대해서도 알게 됐다. ‘페미니..

[2021 성노동 프로젝트 제 5회] 다영~♡ : 참을 만한 존재의 가벼움

참을 만한 존재의 가벼움 다영~♡ 예전에 선배들은 나에게 ‘무엇이 될 것인가’보다는 ‘어떻게 살 것인가’가 중요하다고 이야기했다. 물론 삶의 의미와 가치를 묻는 ‘어떻게’에 대한 문제는 중요하고, 지금도 계속 세상사 속에서 나에게 던져지는 질문 중 하나이다. 하지만 그 ‘어떻게’가 뿌리내려야 하는 ‘무엇’에 대한 문제가 의문문으로 남아 있다면, 즉 내가 정상성 범주에 삶이 놓여 있지 않기 때문에 던져지는 ‘나는 무엇인가에 대해 질문’이 해결되지 않는다면 삶의 가치와 의미는 내 존재 표면에서 계속 미끄러져 내려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서인가 많은 트랜스젠더들은 자기가 원하는 그 ‘무엇’ 자체가 삶에 가치가 되는 경우가 있다. 이 사회에서 소수자로 인생을 사는 사람들은 이 문제에 끊임없이 부딪히고 답을 ..

[2021 성노동 프로젝트 제 5회] 코토 : 돌연변이

돌연변이 코토 “너희 이모는 우리 집안의 돌연변이야, 돌연변이.” 저 몸뚱이를 봐라, 다들 말랐는데 이모만 저리 펑퍼짐하잖니. 엄마는 혀를 끌끌 차며 말했다. 실존하는 사람에게 저 단어를 붙인 것도 충격이었다. 말을 내뱉은 사람이 나의 모친이고, 내가 이런 사람 아래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에 약간의 절망감까지 느껴졌다. 반면에 사실 조금 안도하기도 했다. 나는 통통했기 때문이다. 이모는 뚱뚱했고. 이모가 없으면 내가 타깃이 되기도 했다. 우리 집 여자들의 서열은 그렇게 정해졌다. 누가 말랐고 살쪘냐는 기준에 따라서 모욕을 하거나 칭찬을 듣곤 했다. 어른들은 피부가 하얗고 애교 있는 깡마른 여자아이가 뿅 하고 나타났으면 하는 눈치였다. “무릇 여자아이란 애교가 있어야지, 피부가 까매서 어떡하니.”라고 하거나 ..

[2021 성노동 프로젝트 제 5회] 적성 : 사랑이 없어도 먹고 살 수 있다니요?

사랑이 없어도 먹고 살 수 있다니요? 적성 “5년 후 본인의 미래를 상상해보세요.” “5년 후까지 살아있다면, 정말 5년이나 지났는데도 살아가고 있다면, 그런 미래라면 그럼 전 분명히 아주 많이 행복하게 살고 있겠죠. 5년이나 나이를 먹었는데도 불구하고 저를 살아가게 하는 것들이 많이 존재하고 있을 게 분명합니다. 그 중엔 사랑도 있으면 좋겠네요.” 내가 올해 초 한 연구자분의 인터뷰에 답한 내용 중 일부이다. 나는 늘 나의 생존이 신기하다. 내가 살아왔음에 신기하고, 살아있음이 신기하고, 살아갈 것이 신기하고. 특히 이 인터뷰에 응할 때까지만 해도 상상도 못 했던 방식으로 올해 내 상황은 매 순간 급변했다. 그것도 꽤 긍정적인 방향이라 나조차 지금의 내 일상이 얼떨떨하다. 그래서 이번 성노동 프로젝트의..

[2021 성노동 프로젝트 제 5회] 카야 : 그래도, 의지하기

그래도, 의지하기 카야 나는 화류계 카페에서 단톡 활동을 즐겨하고, 트위터에서 장미계 활동도 꽤 하는 편이다. 처음엔 화류 커뮤니티에서 단톡방 홍보가 있을 적마다 들어가기만 했었는데, 단톡에 원래 있던 방장이 나가버려 방이 없어지는 상황을 몇 번 겪다보니 이젠 그냥 내가 방장도 맡고는 한다. 방 인원은 40명이 넘게 잘 유지되는 중이다. 내가 방장을 담당해서 사람들이 흩어지는 걸 막고, 다른 사람들은 홍보와 당사자 인증 확인을 담당했다. 주로 난 대화량 체크를 하고, 분쟁이 생기면 부방장들과 의논하기도 했다. 방장이니만큼 괜찮다 싶은 아이디어를 말하고 딱히 반론이 없으면 바로 적용할 수 있었다. 그래서 단톡 공지에 댓글로 유용한 정보를 적어보자든가, 차차의 무료법률상담을 홍보한다든가 하기가 편하다. 실제..

[2021 성노동 프로젝트 제 5회] 로잉 : 여성, 가정, 그리고 성노동론

여성, 가정, 그리고 성노동론 로잉 이 글은 가정폭력에 관한 묘사를 포함하고 있어 주의가 필요합니다. 엄마는 어릴 적 “공부 잘하는 학생”이었습니다. 교육 시스템이 지금보다 더 일관적이고 폭력적일 수밖에 없던 시절에, 읽고, 따라 쓰고, 외우는 게 공부의 전부였던 그 시절에 엄마는 늘 우등생이었습니다. 사실, 세대가 달라졌는데도 일률적인 교육 방식에는 그닥 변화가 없는 것 같지만요. 엄마가 어쩌다 수업 시간에 딴짓을 하더라도 선생님들이 피식 웃으며 "네가 웬일이냐"하고 넘어갈 정도로 엄마는 학교에서 "모범 학생"이었습니다. 엄마는 학창 시절, "한번 들은 내용은 바로 외워버리는" 그런 영민한 아이였습니다. 하지만 저는 아니었습니다. 같은 나이였을 시절의 엄마에 비하면 암기력과 문해력이 현저히 떨어졌고, ..

[2021 성노동 프로젝트 제 5회] 열심 : 너무한 거 아니냐고

너무한 거 아니냐고 열심 그 즈음 유흥업소는 거의 닫았다가, 잠깐 열었다가 하는 식이었다. 처음에는 동선 공개 때문에 유흥업소에서 확진자가 나오면 신상이 털리고, 언니들이 다 같이 싸잡혀서 너무 욕을 먹으니 다 같이 출근하지 말자는 여론이 주였다. 어떤 언니들은 몰래 영업하는 가게를 신고하기도 했다. 주변에서 다들 대출을 땡겼다. 잠깐만 버티면 된다고 생각했으니까. 근데 코로나 시국이 6개월이 되고, 1년이 되고, 다시 한 해를 넘기니 빚이 연체되는 언니들이 생겼고, 자살하는 언니들이 생겼다. 많은 언니들이 유흥 업종에서 다른 업종으로 떠밀렸다. 나는 평소에 주기적으로 만나던 용손이 연락이 없어서 돈이 다 떨어졌다. 당장 월세, 공과금 낼 돈이 필요한데 수중에 돈이 없으니까 마음이 초조했다. 그렇다고 적..

[2021 성노동 프로젝트 제 5회] 마리아 레인보우 : 저는 ‘성노동자’이며, 앞으로의 미래를 생각해야 하는 ‘취업준비생’입니다

저는 ‘성노동자’이며, 앞으로의 미래를 생각해야 하는 ‘취업준비생’입니다 마리아 레인보우 안녕하세요. 저는 현재 성노동자인 ‘마리아 레인보우’입니다. 원래 본명을 밝히려고 생각했으나, 아직 그런 용기는 나지 않아서 밝히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냥 저의 활동명이자 별명인 ‘마리아 레인보우’ 또는 ‘마리아’라고 불러주시면 좋겠습니다. 저는 따로 바(bar)나 룸 형태 등의 업소를 다니는 것이 아니라, 개인적으로 애인 대행이나 조건만남을 하면서 성노동을 하고 있습니다. 가끔 업소에서 일하고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대부분 밤 시간대에 운영해서 엄마 때문에 외출을 못 하고, 요즘은 코로나 때문에 제가 확진이 되거나 일터에서 확진자가 나오면 가족까지 자가격리에 들어갈까 걱정이 돼서 반 포기 상태에 있습니..

[2021 성노동 프로젝트 제 5회] 왹사리 : 우리는 결코 같은 얼굴을 갖고 있지 않다

우리는 결코 같은 얼굴을 갖고 있지 않다 왹사리 “여성혐오의 발원지는 창녀가 아니라 창녀혐오를 만들어낸 그들의 권력인데. 여성도 창녀를 혐오한다. 그리고 여성혐오 맨 밑바닥에 창녀혐오가 있다. 나는 여성이고, 성노동을 했지만 나는 나를 혐오하지 않는다.”1) 이 문장이 세상에 공개된 지 4년이 다 되어가는데, 여전히 이 논지에 동의하지 못하는 얼굴들이 사회 곳곳에서 숨쉬고 있다. 방구석에서 끽소리 하나 내지 않고 조용히 숨쉬고 살면 훨씬 좋을 텐데, 매번 이 성노동 프로젝트에 관심 두고 참여하게 만드는 얘깃거리를 던지며 지저분하고 추잡하게들 산다. 최근에 “여성들이 제집에서조차 ‘자기만의 방’을 위해 투쟁할 때 남성들은 온 사방에 드나들 ‘룸’을 만들었다”2) 라는 문장에 엄청나게 많은 이들이 공감하며 ..